Inside

[정수현의 바둑경영] 화가의 포석을 하라 

안정성·능률성 못지 않게 창의성도 중요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집짓기에 비유되는 바둑은 보통 한 판의 과정을 초반·중반·종반으로 구분한다. 축구의 전반전과 후반전처럼 명확하게 나눠진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이렇게 구분한다. 이 세 단계를 포석·중반전·끝내기라고 칭한다. 건설공사로 치면 포석은 기초 공사이고 중반전은 본 공사에 해당한다. 끝내기는 마무리 공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단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본격적인 싸움 단계인 중반전이다. 중반전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대부분 승부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메인 공사인 중반전은 기간도 가장 길고 여러 가지 사건도 많이 발생한다. 중반전에 왕대마라도 잡히는 날이면 종반까지 가기도 전에 항복을 해야 한다.

그런데 고수들은 중반전 못지않게 초반 포석에 고심을 한다. 포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판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포석이 나쁘면 다가올 중반전에 고전을 하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인생 경영에서도 포석이 중요함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둑 고수들의 포석 노하우를 알아보기로 하자.

포석의 기초 공법: ‘포석(布石)’이란 말은 바둑에서뿐만 아니라 매스컴에서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대권도전 포석, 내수활성화 포석 같은 말을 헤드라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포석이라는 말은 원래 바둑용어인데 요즘은 이렇게 시사용어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포석은 돌이나 사람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돌을 배치하여 진용을 갖춘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바둑에서는 ‘포진(布陣)’이라는 말도 쓰인다. 바둑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면 포석은 기초 공사에 해당한다. 기초 공사가 튼튼해야 높은 집을 지을 수 있듯이, 포석이 좋아야 다가올 중반전을 순조롭게 치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포석을 해야 할까? 기초 공사를 하는 공법처럼 바둑의 포석에도 공법이 있다. 경제성이 높은 지역에 터를 잡은 후 교두보를 형성하고 주변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 일반적인 공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뚝을 박고 집의 골격을 만드는 데도 원칙과 요령이 있다는 것이다. 대충 배치하면 엉성한 구조가 된다.

[1도]처럼 만일 이런 모양에서 흑1로 둔다고 하자. 포석을 잘 모르는 사람 중에는 귀에서 양팔을 벌리듯 이렇게 두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두면 5급 이하의 실력으로 취급된다. 포석의 기본 공법에 어긋난 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명 ‘바보굳힘’으로 통한다. 흑이 이 지역에 3수를 들였음에도 백2에 들어가면 간단히 깨지게 된다. [2도]에서는 흑1로 단단하게 두는 것이 올바르다. 이렇게 되면 백은 흑의 지역으로 함부로 침입하지 못한다. 흑1은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쪽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과 같다. 이처럼 포석은 적당히 바둑돌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공법과 같은 기법에 따라 돌을 배치하는 작업이다. 포석의 공법은 능률성과 안정성의 원리를 따른다. 능률을 추구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안정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 공사의 ABC를 지키지 않으면 엉터리 포석이라는 지적을 받게 된다.

밑그림에 따라 판세 좌우: 때로는 포석을 화가의 스케치에 비유하기도 한다. 화가의 스케치에 따라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듯이, 포석에 따라 그 판의 모양새가 드러난다. CEO의 포석 구상에 따라 회사의 방향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포석이 화가가 그리는 그림에 비유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창의적인 요소가 가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 공사의 기초 작업처럼 정해진 방식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남이 그린 대로 따라서 그린다면 그것은 모조품이지 창작이 아니다.

[3도]처럼 진행된 포석이 있다. 흑5와 백6으로 귀를 굳히고 난 후 흑7로 우변을 차지했다. 백8로 다가서자 흑9에 협공하여 흑은 우변 일대에 웅장한 세력을 쌓았다. 흑백 간에 불만 없는 포석이다. 하지만 이런 바둑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4도]에서처럼 그런 사람은 우변에 둔 수로 흑2와 같이 하변에 둘 수 있다. 그러면 백3에 갈라쳐서 앞그림과는 전혀 다른 포석이 된다. 두 포석은 그림이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포석의 양태가 달라지고 바둑 자체로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포석에는 개인의 취향과 창의성이 가미된다. 포석의 원리나 기법에 따라 정해진 대로만 두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창의적인 요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포석이 재미있다. 어떤 사람은 우주를 나는 것과 같은 호쾌한 스타일의 바둑을 둔다. 어떤 사람은 지하철처럼 밑으로 파고드는 바둑을 둔다.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나 일본의 다케미야 마사키 9단 같은 고수들은 요즘 젊은 기사들의 바둑에서 이런 창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경쟁에서 이기려는 생각이 앞서 남들이 두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독창적인 포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석의 공법에 따라 두다 보면 화가의 예풍 같은 요소가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영과 인생의 포석: 바둑의 포석처럼 세상의 많은 일에는 포석이 있다. 기업 경영이나 삶의 다양한 장면에서 포석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때 집짓는 기초 공사와 화가의 스케치라는 두 면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새로운 계획이나 사업구상을 할 때, 또는 인력이나 자원을 배치할 때 매뉴얼에 따라 기초 공사를 하듯 원리나 기법에 충실하게 따르도록 하라. 기본 공법을 무시한 포석 구상을 하면 엉터리 포석이 된다. 시간과 인력을 쓰고서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화가의 그림처럼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이나 기법을 가미하도록 하라. 비즈니스에서 남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상하는 것은 고객들에게 참신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차별화’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창의성을 가미하여 자기만의 색깔을 낼 필요가 있다. 포석의 기법에 충실하면서도 화가처럼 자기만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 일견 모순인 것 같지만 세상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책에 있는 대로만 두는 것은 고지식하고 묘미가 없다. 매뉴얼에 따르면서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포석 구상을 하라.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1339호 (2016.06.20)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