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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16)] 비리 만연한 은점(銀店) 폐쇄 진언 

소론의 영수 남구만의 병중 사직상소... 백성 안위보다 국가 재정 확충에 집착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교과서 등에 실려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이 시조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작품이다. 그는 이른바 소론의 영수로 불렸는데, 이 때문에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과 소론이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補闕正誤)]는 그에 대한 평가를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다. 다만 두 기록 모두 ‘그의 성품이 강직하다’는 것에 동의할 정도로 (숙종 37.3.16) 그는 관료 초년 시절부터 임금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을 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노론에서도 ‘성품이 강직하다’ 인정

남구만은 1687년(숙종13) 영의정에 오르는데, 이후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갔다가 1694년(숙종20) 갑술환국을 통해 서인이 재 집권하면서 다시 영의정에 보임되었다. 재상으로 있는 동안 그는 안민(安民)정책, 즉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백성에게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는 일에 주력했다. 오늘 소개하는 사직상소에도 이러한 그의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이하 인용은 모두 숙종13년 3월15일자 실록기사가 출처임).

‘조그만 선(善)도 하나 이룬 것 없이 그저 무거운 죄만 지은 신이, 이제는 일어나기 힘든 병까지 앓고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사직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지체하시니 참으로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간절한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속히 신을 면직시켜 주시옵소서…(중략)…비록 이렇게 직임을 벗을 수 있길 청하고 있습니다만, 신이 어찌 감히 단 일각인들 책임을 방기하고 조정을 잊을 수 있겠나이까. 하여 조정이 당면한 문제에 관해 말씀을 올리고자 하옵니다.’ 병이 깊어 몸을 가누기 힘든 순간에도 나랏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남구만은 은점(銀店) 문제를 거론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전국 각지에 위치한 은점을 통해 은을 채굴하고 제련하여 그 수익을 국가 재정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일일이 통제하기가 번거로워 각 지점에 감독관을 선임하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는데, 워낙 큰 이권이 걸려있는 일이다 보니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은을 채굴하는 인부가 되면 군역에서 면제를 받기 때문에 뇌물을 써서 ‘군역을 기피한 무뢰배들이 산골짝에 들어가서 은을 캔다는 명목으로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남의 아내를 겁탈하는 등’의 피해도 많았다. 문제가 이와 같다면 무분별하게 세워진 은점을 구조조정하고 은점 운영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중앙정부에서는 오로지 채굴량을 늘리는 데에만 급급했다. 은광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이 그 이유였는데, 화폐 역할을 하는 은의 채굴이 늘어날수록 국부(國富)도 늘어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남구만이 보기에 조정의 이러한 태도는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더 많은 은을 얻겠다며 은점을 무분별하게 확대하다 보니 무덤이 파헤쳐지고 산에 살던 백성들은 자신의 터전을 잃어버렸으며 재목(材木)과 숲이 베어져 민둥산으로 변했다. 백성을 인부로 모집하는 과정에서 강압이 행사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의 정책이 물질적인 이익 추구에만 매달리고, 백성을 위해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남구만은 “당나라 태종 때에 시어사인 권만기가 상언하기를 ‘선주(宣州)와 요주(饒州) 두 주에 은이 많이 나오니, 이것을 캐면 해마다 수백만 냥의 은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태종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날로 권만기를 퇴출하여 집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익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물론 당 태종은 현실의 공리를 부정한 황제가 아니다.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은 국가 운영에 있어서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다만 정치의 목적 자체가 이익창출에 맞춰져서는 안되고, 또 그러다 보면 백성의 삶보다는 국부 증진에만 치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움직임에 아예 쐐기를 박았던 것이다.

남구만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은을 캐는 일이 과연 백성을 위한 것입니까?…(중략)…지금 조정이 걱정해야 할 것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이지 은화(銀貨)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한 이때에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여러 도에 사람을 파견하는 이유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을 캐기 위해서라면, 그 폐단이야 굳이 논할 가치도 없으며 무엇보다 백성들의 절망이 너무나 클 것입니다.’ 당장 백성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은 보유량을 늘리는 것이 과연 시급한 일일까? 백성의 안위보다 국가 재정을 먼저 신경 쓰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임금의 현실인식은 매우 안이해

그런데도 임금의 인식은 매우 안이했다. ‘전하께서는 만약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가 있을 경우 그때 다시 혁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교하셨다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은 더욱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 상의해서 모든 것이 십분 옳고 마땅하다고 판단되더라도 그것이 과연 마지막까지 처음 계산했던 것과 같게 될지는 기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일이 종말에 어찌 성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완벽해 보이는 일도 진행 과정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하물며 처음부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조정의 명령은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의 기강도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는 정령(政令)과 조처가 금방 시행하다가 또 이내 금방 그만두어서입니다. 정하여 굳게 지키고 오래 지속한 적이 없으니,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 우리나라의 정령은 3일 만에 바뀐다)’이라는 속담은 비록 예전부터 있어왔으나 오늘처럼 심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 일이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것이고 걱정할 바가 전혀 없다고 확신하신다면, 신의 말은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니 채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조금이라도 폐단이 있을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부디 신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마옵소서.’

요컨대 남구만은 은점 문제를 통해 정책의 3가지 주안점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정책은 그 존재 의미에 맞게 백성에게 우선순위가 맞춰져야 한다. 둘째, 정책의 집행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부작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금물이다. 셋째, 한번 확정된 정책은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정책을 신뢰하고, 국가를 믿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당연한 기본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요즘, 남구만의 사직상소가 전해주는 교훈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39호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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