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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현대사회 부조리 겨냥한 무언의 메시지 

투명인간 된 중국의 행위예술가 … ‘도시에 숨다’ 연작 시리즈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누구나 한번쯤은 투명인간(Invisible man)을 꿈꿔 봤을 것이다. 이미 100년도 더 전에 H. G. 웰스가 투명인간에 대한 소설(1897년)을 썼고, 그 후로도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던 것이 투명인간이다. 사연도 다양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애초에 투명하게 태어난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특수한 투명소재(망토나 모자)를 우연히 얻거나 유전자를 투명하게 만드는 기술을 발명해서 투명인간이 된다. 그나 저나 사람들은 왜 그렇게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 걸까? 놀래 키려고? 골려주려고? 훔치려고? 아님 훔쳐 보려고?

중국에 투명인간이 산다. 리우볼린(Liu Bolin)이라는 이름의 행위예술(Performance arts)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어느 날 리우볼린은 예술적 기법을 동원해 투명인간이 될 결심을 한다. 그는 왜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고, 그가 세상을 향해 외치려 했던 무언(無言)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일까?

중국 정부의 강압에 맞서 투명인간이 되다


▎1~2. 점선 안에 리우볼린이 서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 3. 리우볼린이 강연 중 TED 무대 속으로 사라진 모습.
리우볼린의 어릴 적 꿈은 조각가였고, 중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예술가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난 2005년 그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중국 공안이 갑자기 땅이 필요하다면서 베이징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쓰워쟈춘(Suo Jia Cun, 索家村)에 있던 그의 작업실을 강제로 철거해 버린 것이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땅이 필요했던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찌 되었던 리우볼린은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된다. 그는 중국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에 저항하기 위해, 더 나아가 중국 예술가들의 열악한 처지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불합리한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자신의 신념이나 정체성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될수록 눈에 띄면 안 되고 아무 말도 해서도 안 된다. 투명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무리 내 누군가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왕따시키는 것을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하지 않는가).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대단히 독창적이다. 자신의 몸과 옷에 주위 사물과 같은 색상과 문양을 칠해 주위 배경에 완전히 일치시킨 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다. 배경 속으로 사라진다고 해야 할까, 아님 녹아 든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진 속에서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 보면 그저 재미있고 희한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곧 왜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배경과 하나가 됨으로써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리우볼린이 만든 첫 번째 작품은 자신의 폐쇄된 작업실을 배경으로 정부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쯤 무너진 작업실 사진이 썰렁하고 안쓰럽기만 한데, 그 한가운데 그가 있는 듯 없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다. 이 작품을 만든 후에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중국 내에는 자신처럼 스스로의 처지를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는 본격적으로 그런 사연이 있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그 배경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도시에 숨다(Hiding in the City)’ 연작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벽화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멋진 자연경관이 되기도 한다. 감쪽같이 도서관의 책과 책장이 되기도 하고, 온갖 청량음료들로 채워진 수퍼마켓 선반과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의 의도는 물질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의 이면에서 갈수록 소외되는 인간의 모습을 담는 것이다. 소외된 자는 말이 없다. 그저 사라져갈 뿐이다. 하지만 최소한 누군가는 희미해지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기록해 줘야 하는 건 아닐까. 리우볼린이 그 역할을 자청한 듯싶다. 그의 작품은 계속되었고, 인터넷은 물론 해외 언론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저는 투명해 짐으로써 우리 문명과 그 발달 사이의 모순적이고, 때로는 상쇄적인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 의문을 던집니다.” TED 무대에선 그가 하는 말이다.

그의 작품 몇 개를 살펴 보자. ‘퇴근’이라는 작품에서는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텅 빈 공장 벽 앞에 말없이 서 있다. 중국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삶의 터전을 상실한 2000만 명이 넘는 실직자들의 운명을 대변한다. 공장 벽에 걸린 ‘중국 공산당은 대의를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문화혁명 슬로건이 허망하기만 하다.

‘라면’이라는 작품도 있다. 2012년 8월, 중국 수퍼마켓에서 파는 모든 유명 컵라면 용기에서 몸에 해로운 형광 물질이 발견됐다고 한다. 암을 유발할 수도 있는 치명적 물질이었다. 그는 중국 내 식품안전의 실태를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컵라면을 대량으로 사서 실제 수퍼마켓 진열대처럼 스튜디오를 꾸몄다. 작품 제작을 위해 단순한 배경이라면 3~4시간 정도 서 있으면 되는데, 이 작품은 라면 포장지들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3~4일 간 준비해야 했다고 한다.

2015년 유엔 설립 70주년을 맞아 제작한 ‘더 퓨처(The Future)’에서 그는 세계 193개 유엔 가입국의 다채로운 국기 앞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다. 청정에너지, 빈곤, 지구온난화 등 유엔의 글로벌 어젠다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작품에 담았다고 한다. ‘스튜디오’라고 이름 붙인 작품은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제작했는데, 당일의 헤드라인 뉴스 사진 두 점을 배경으로 했다. 하나는 중동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시위대의 데모 현장 사진이었다. 국가나 사회를 막론하고 모두 나름의 모순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단다.

‘베니스’라는 작품은 이탈리아 베니스를 무대로 한다. 지구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하고, 그러면 몇 십 년 안에 르네상스의 주 무대였던 베니스가 사라질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제작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9·11 테러나 뉴욕 월가의 반(反) 자본주의 시위처럼 현대사회의 이슈가 있는 곳이라면 그는 어디든 달려간다. 물론 투명인간의 모습으로 말이다.

위장예술이 말하는 침묵의 무게

리우볼린의 작품은 배경 속에 모델을 숨기기 때문에 ‘위장 예술(Invisible Art)’이라고 불린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그는 한곳에 꼼짝없이 서서 최대 10시간이 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CNN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처럼 “감춤으로써 오히려 문제점이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배경 속에 감춰진 사회의 문제점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문제의식을 더욱 키울 수 있게 해 준다.

리우볼린은 자신의 작품 속으로 사라지면서 현대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적 이슈에 대해 말없이 질문을 던진다. 핏대를 세우지도 삿대질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슬픈 듯 담담한 질문들이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존재감 아닐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세상에는 온갖 말이 봇물처럼 넘쳐 난다.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다. 할 말은 해야겠지만, ‘안 해도 될’ 말과 ‘안 해야 할’ 말은 이제 좀 사라졌으면 싶다. 웅변은 은(銀)이요, 침묵은 금(金)이다. 예전 휴대폰 광고 카피에서처럼 입이라는 스피커는 ‘잠시 꺼두셔도’ 좋겠다. 그래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 리우볼린의 작품은 손과 발이 퇴화하고 입만 진화하는 세상에서 절제와 침묵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 준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1339호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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