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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17)] 감정 조절 못한 현종의 수양 부족 꼬집어 

깊은 병중에 올린 송준길의 사직상소...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兩宋)’으로 불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1623년 충청도 연산. 남인을 대표하는 학자인 우복 정경세가 서인의 정신적 지주 사계 김장생을 찾아 왔다. 평소 흠모하던 사계에게 막내딸의 사윗감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용건을 들은 김장생은 지금 바로 옆 방 서실에 가보라고 답했다. 청년 셋이 글을 읽고 있을 테니 그중에서 골라보라는 것이었다. 정경세가 서실의 방문을 여니 한 청년은 벌떡 일어나 다가와 절을 했고, 한 청년은 가볍게 예를 표시한 후 계속 책을 읽었으며, 다른 한 청년은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경세는 과연 누구를 사위로 삼았을까?

정답은 두 번째 청년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와 절을 하는 것은 지나친 예의이고,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른이 왔는데 본체만체하는 것은 예의가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정경세는 중도를 지킨 두 번째 청년이 가장 흡족했던 것이다. 이 두 번째 청년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兩宋)’이라고 불리며 17세기 조선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직언하다 궁지에 몰린 윤경교 옹호

송준길은 효종 대에 이르러 대사헌·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종 대에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러다 예송논쟁에 휘말려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에 은거하는데 1672년(현종13)에도 다시 현종의 부름을 받지만 병을 이유로 사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을 정도로, 실제로 그의 병은 매우 깊은 상태였다. 하지만 송준길은 병든 몸을 무릅쓰고 장문의 사직상소를 올린다. 상소를 빌려 임금에게 간언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이하 인용은 모두 [동춘당집]이 출처임). ‘근자에 신은 노쇠함이 심해지고 온갖 병이 중첩되고 있나이다. 그중에서도 기침이 계속되고 숨이 가빠 올라 정신은 흐리고 생각이 어지러운 증세가 가장 괴롭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신은 오늘 전하께 작별인사를 아뢰고자 붓을 들어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고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이 기회에 품고 있던 간절한 생각을 진달하고자 하오니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선하다’는 증자(曾子)의 말을 생각하시어,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펴 주시옵소서.’

송준길은 그러면서 윤경교 사건을 거론했다. 윤경교의 일이란, 헌납 벼슬을 하던 윤경교가 ‘전하께서는 유약하시어 어물어물하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고,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을 수상에게만 묻고 오로지 그가 말한 대로만 따르고 계십니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安位)·이해(利害)와 관련된 일들은 대충대충 넘기시면서 대신과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정사만 행하고 계시니 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화를 어떻게 구제하겠나이까?’(현종12.12.5)라고 상소를 올린 데에 대하여 현종이 크게 진노하며 문책한 사건을 말한다.

여기서 ‘수상’과 ‘대신’은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을 지칭하는 것으로, 현종은 이 상소를 임금에 대한 무례한 발언일 뿐 아니라, 서인이 남인 재상을 제거하려 드는 당쟁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강한 분노를 표시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임금답지 못한 언사를 쏟아내게 된다. 송준길은 이 점을 지적했다. ‘신이 듣건대, 윤경교의 일로 전하의 노여움이 너무도 격렬하고 목소리가 크게 높으셨다 하니 그로 인해 명령이 온당함을 잃고 거조가 전도된 것은 필찰로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의 말씀 중에도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은 한두 마디가 아니시니, ‘흉악하고 교활하다’느니, ‘금수와 같다’느니, ‘귀신과 같은 심보이다’느니 하신 말씀은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장사숙은 한낱 선비였으되 그가 욕설로 노복을 꾸짖자, 이천(伊川) 선생께서는 ‘어찌 동심인성(動心忍性, 인의예지의 마음을 발동시켜 감정의 흐트러짐을 억제함)하지 않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그러한 언성과 기색을 직언하는 신하에게 쓰셔야 되겠습니까?’

현종은 윤경교에게, 그리고 윤경교의 처벌을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다. 임금으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문제였지만, 신하들의 간언을 감정적으로 억누르려 한다는 오명까지 받게 됐다. 순간의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결과였다. 송준길은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인 정이천(程伊川)의 경계를 인용하며 현종의 수양 부족을 꼬집었다.

흔히 화가 나면 판단도 흐려지게 된다. 노여운 마음에서 말을 하고 행동하다 보면 쉽게 거칠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기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라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정이천은 “노여움은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람에게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살피지 못해 욕심이 동하고 정이 치우쳐 올바름을 잃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화가 나더라도 그 감정을 직시하고 살펴서 잘못 표출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마음의 수신이 필요한데, 송준길은 “임금의 마음에 천리가 순수하지 못하면 선을 행하되 부족함이 있고 인욕을 다 제거하지 못하면 악을 없애되 그 뿌리를 뽑지 못합니다. 그리 되면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도 공사(公私)·사정(邪正)·시비(是非)·득실(得失)이 마음속에서 전쟁을 벌이니, 현명한 신하를 예우하면서도 간사한 무리를 심복으로 삼고, 공정한 논의를 듣기 좋아하면서도 때론 이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한, 모함하고 이간질하는 말을 미워하면서도 아첨하는 말을 충직한 말로 여기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백성의 탄식과 원망을 듣지 못하게 되며, 등용한 사람이 모두 부적격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적격자도 아니며, 행하는 일이 모두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도리에 맞는 것도 아닌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분노가 스스로를 그르치는 일 없어야

아무리 선한 뜻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마음 안에 치우친 감정과 사욕이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도리에 맞게 발현할 수가 없다. 감정에 흔들려서 안 하느니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좋은 의도로 꺼낸 말이지만 감정이 더해져 상처를 주고,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지만 마음이 잘못 작용하여 변질되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송준길이 현종으로 하여금 분노가 스스로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간곡히 당부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임금이 한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자신 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이 짐작컨대, 아마도 전하께서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일을 후회하며 고치려는 생각을 하고 계실 것이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상의 이번 분부 중 이치에 맞지 않았던 것에 대해 뉘우치시고 깨달은 뜻을 보여 국인(國人)들에게 사과하소서.’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41호 (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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