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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9)]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덮치듯이 

12세기 송나라 회화이론 인물 포착법 … 현대사진의 ‘결정적인 순간’과 닮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사진 1] 인천 용유도 해변에서
사진은 시간을 다루는 매체입니다. 현실 속 시공간의 한 단면을 베어내는 순간의 미학입니다. 사진가의 미의식과 정서·철학·신념 등이 맞아떨어질 때 셔터를 누릅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이를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피사체가 움직이는 사람이나 동물일 때는 더 긴장하고, 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빛과 표정, 손과 발, 몸의 움직임을 추적합니다. 그리고 셔터 타임을 노립니다.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사냥이나 낚시와 닮았습니다. 끈질기게 추적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기회를 엿봅니다.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총을 쏘듯이 셔터를 누르고, 피사체를 낚아챕니다. 인물사진을 가장 많이 찍지만, 가장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회화의 한 장르인 크로키(croquis)도 순간의 미학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진과 통합니다. 크로키는 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파악하고 빠르게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부 묘사는 생략합니다. 선 위주로 어떤 대상의 중요한 성질이나 특징을 표현합니다. 크로키는 18~19세기에, ‘결정적인 순간’은 20세기에 등장한 미학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12세기 송나라 때 이 둘을 아우르는 회화이론이 등장합니다. 진조(陳造, 1133~ 1203)는 그의 저서 [강호장옹문집(江湖長翁文集)]에서 인물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엎어지거나 자빠지는 눈 깜짝할 순간, 응대하거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거나 마음에 들어 즐거워하는 순간, 조용하거나 급하거나 거만하거나 공경하는 순간에 착안해 곰곰이 생각하고 은밀히 파악해 일단 좋은 생각을 얻으면 재빨리 필묵을 움직여 마치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덮치듯이 그려내야 곧 기(氣)가 왕성하고 신(神)이 완전하게 된다.’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덮치듯이’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형(形)과 신(神)이 동시에 나타나는 절정의 순간입니다. 표정과 몸동작까지 세심하게 살피라고 합니다. 표정은 얼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손끝, 발끝, 몸의 움직임, 심지어 실루엣으로 표현된 뒷모습도 말을 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약 900년 전의 인물이 사진의 ‘결정적인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스냅사진의 교과서입니다.

시공간의 단면을 베어내는 순간의 미학


▎[사진 2]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이명욱(李明郁), 17C,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1]은 지난해 인천 용유도 해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멀리 엄마와 딸이 갯벌을 걷고 있습니다. 모처럼 넓은 바다에서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마냥 행복했나 봅니다. 아이들은 기분이 좋으면 발로 물을 차고 놉니다. 파인더로 모녀를 지켜 봤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아이가 발로 물을 찹니다. 발 끝에 아이의 표정을 담아봤습니다.

크로키는 선 위주의 추상적인 표현이 많고 빠르게 그린다는 점에서 산수화, 특히 ‘산수인물도’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산수인물도의 걸작인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2)’를 볼까요. 어부와 나뭇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작품의 소재는 중국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 나무를 하고, 고기를 잡고 사는 은사의 모습을 빗댄 것입니다.

어부와 나뭇꾼이 얘기를 합니다. 어부는 길다란 낚싯대를 어깨에 매고 있고, 나뭇꾼은 허리에 도끼를 차고 있습니다. 붓이 화폭 위에서 날아다닌 듯합니다. 필치가 빠르고 경쾌합니다. 발걸음도 활기찹니다. 옷 주름과 옷자락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표정이 생생해 말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배경으로 나오는 갈대숲과 인물의 배치,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구도가 잘 짜여 있습니다. 그림이지만 잘 찍은 스냅사진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송나라 때 시인이자 화가인 소동파(1037~ 1101)는 인물을 그릴 때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나도록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천연함을 얻고자 하면 마땅히 여러 사람들 속에서 그 행동거지를 은밀히 관찰해야 하는 법이다. 그 사람이 용모를 단정히 하고 꼿꼿이 앉아 있으니 어찌 다시 그 천연함을 볼 수 있겠는가.”

마치 ‘캔디드포토(candid photo)’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사진 찍히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게 멀리 망원렌즈를 이용하거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찍는 것을 말합니다. 나쁜 의미로 ‘몰카’라 부르기도 합니다. 종종 초상권 시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인물의 모습을 포착하려면 은밀하게 찍는 것이 좋습니다. 파인더에 눈을 고정하고 인물을 추적하다 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인간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습니다. 만약 들키더라도 웃는 모습으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대개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소동파는 또 인물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라고 말하면서 캐리커처와 비슷한 화론을 전개합니다. ‘무릇 사람은 그 특징이 담겨있는 곳이 각각 있으니, 어떤 사람은 눈썹과 눈에 있고 어떤 사람은 코와 입에 있다. 광대가 사람의 동작을 흉내내는 것이 그러하듯 몸 전체가 닮을 필요는 없다 그 특징이 담겨 있는 곳을 정확하게 파악하면 된다(소동파 전집 속집 전신기 권12)’.

캐리커처는 주로 인물의 특징을 익살스럽고 과장되게 표현하는 ‘풍자화’를 말합니다. 소동파는 광대를 이야기하면서 인물의 특징을 파악하라고 말합니다. 광대는 다른 사람을 흉내낼 때 특징적인 부분을 익살스럽고 과장되게 표현합니다.

산수인물도나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은 서양의 크로키와 캐리커처가 합쳐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간략하고 빠른 필치로 그리지만 표정이나 몸동작에서 그 인물의 특징적인 캐릭터가 잘 살아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물화에 대한 이론이 정립이 돼 있고 전통이 유지돼왔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1341호 (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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