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비전 제시자 vs 비전 팔이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 교수

지난 6월 22일 영국 국민들은 자신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을 중대한 사안을 놓고 투표를 했다. 결과는 유럽연합(EU)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잔류를 원하는 표도 만만치 않았지만 엄중한 다수결 원칙에 따라 영국은 곧 EU 회원국들과 탈퇴 협상을 벌이게 된다.

영국에서는 이번 EU 탈퇴를 ‘브렉시트(Brexit)’뿐만 아니라 ‘브렉소더스(Brexodus)’라고 명명하고 있다. 브리튼과 엑소더스의 합성어다. 우리말 구약성경에 창세기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또는 ‘탈출기’라고 번역돼 실린 이 편의 영어 제목이 바로 엑소더스다. 여기에는 장정만 60여 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조상 대대로 430년을 산 땅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간다는 ‘비전’과 ‘실현 가능성’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브렉소더스는 아마도 탈퇴를 주장하는 측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 영국의 탈퇴가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과 같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쓴 표현이리라.

그런데 세계의 경제학자와 주요 언론, 그리고 정치인은 거의 예외 없이 영국 국민의 이런 결정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영국이 탈퇴 이후 교역 규모 감소 등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도 국민투표 이후 파운드 가치는 폭락했고, 영국의 국가신용등급도 강등됐다. 더구나 런던에 유럽시장 본부를 둔 여러 글로벌 기업이 본부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이러다가 궁극에는 ‘브렉소더스’가 아니라 세계의 주요 기업과 자본이 영국에서 탈출하는 ‘글렉소더스(글로벌+엑소더스)’ 현상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벌써 영국에서는 ‘재투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이 뻔히 올 줄 알면서도 탈퇴에 찬성표를 던진 영국 국민들의 상당수는 이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제시한 ‘비전’과 ‘실현 가능성’을 믿었을 것이다. ‘약간의’ 그리고 ‘단기간’의 혼란과 고통 후 가나안 땅이 자기 것이 된다고 말이다. 문제는 선거 직후 이들 정치인의 상당수가 그 ‘비전’을 수정하거나 아예 부정하고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을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은 ‘비저너리(visionary)’, 즉 비전 제시자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비전을 팔아먹은 ‘비전 팔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 재계에서도 이런 ‘비전 팔이’들의 폐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그들 중 상당수는 기업 밖에 있는 인사들이며 뛰어난 화술과 선동기법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체계적인 경영수업을 받거나 관련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이런 재능을 활용해 최고경영진의 마음을 의외로 쉽게 사로 잡는다. 그리고 곧 ‘어마어마’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비전을 제시해 결국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히거나 심지어는 존폐의 위기까지 몰고 간다. 얼마 전 한 신문의 사설에서는 이들을 러시아의 요승 ‘라스쁘틴’이라고 지칭한 적이 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의 상당수는 이들의 사술에 넘어간 탓이 적지 않다. 역시 정치권이든 재계든 진짜가 가짜를 항상 이겨야 제대로 돌아가는 법인 것 같다.

1342호 (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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