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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건강 기원하며 약재 갈던 백자 유발 

조선 시대 상류층에서 귀한 약재 취급 때 사용... 유봉과 한쌍 이뤄 

윤영석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

▎표면에 쇳가루를 개어서 모녀(母女)라는 글을 써넣은 백자 유발(乳鉢).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이에요, 아주 귀한 거니까 놓치지 마세요.” 진료에 바쁜 와중에 인사동의 고미술 가게 중에서 좋은 골동품을 취급하기로 소문이 난 L사장이 오동나무상자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뭔데 그리 흥분하세요?” “유발(乳鉢)이에요. 백자 유발.”

골동품을 모으기 시작한 지도 5, 6년이 지났건만 저는 그때까지도 유발과 약연을 잘 구분할 줄 몰랐습니다. 유발은 약재를 빻고 찧기 위한 그릇을 말합니다. 약연은 단단한 약재를 갈아내는 의약기이고요. 요즘 쓰고 있는 유발은 모양이 거의 다 똑같지만 예전에는 청자나 백자, 돌, 유리, 옥 같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청자나 백자 유발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약재를 가루로 내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잎이나 뿌리, 열매처럼 물기가 생기는 약재를 갈아내기 위해서도 썼습니다. 유발은 유방(乳房)처럼 생긴 사발(沙鉢)이라 해서 한 자씩 떼어내어서 유유발(乳鉢)이라 했습니다. 유발 안쪽에서 약재를 갈아내는 공이는 막대기(棒)처럼 생겨서 유봉(乳棒)이라고 이름 붙였고요.

중국·일본 유발과 남다른 우아한 곡선미

사진에서 보는 유발에는 아쉽게도 유봉이 유실되어서 없습니다. 그러나 유발 자체가 매우 특이하고 아름답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유발에서 볼 수 없는 곡선미와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청자 유발은 만나보기가 어렵고 백자 유발도 흔치 않은데 춘원당 유발에는 표면에 쇳가루를 개어서 모녀(母女)라는 글을 썼습니다. 유발에는 원래 아무 글씨를 쓰지 않는데, 질이 단단하고 두껍게 만든 백자에 모녀라고만 철화문 글을 썼으니 예사롭지가 않기는 합니다. 아마 모녀의 건강을 기원하거나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자 유발은 조선 시대 상류층에서 약재를 가루로 내기 위해 만든 겁니다. 그래서 유발의 안쪽과 유봉 끝에는 유약을 안 바르고 표면을 거칠게 해서 잘 갈리게 했습니다. 지체 높은 집에서 썼던 유발은 일반적으로 귀한 약을 가루로 낼 때에만 썼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우황청심원이나 공진단(供辰丹) 같은 약을 이런 유발에 갈아내었던 겁니다. 우황청심원이나 공진단을 귀하게 치는 이유는 사향(麝香)이란 약재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향낭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채취한 것인데, 한 마리에서 많아야 30g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막힌 곳을 뚫어주고 체한 것을 풀어주기 때문에 중풍이나 심장질환, 순환기 질환에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급히 보하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작용도 합니다. 사향노루는 티벳 지역에서 주로 번식하는데 야생동물 보호협약에 의해 포획이 규제되어 있고 개체 수도 점점 줄어 진품 사향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향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처방이 공진단(供辰丹)입니다. 공진단은 중국 원나라 때 사람인 위역림(危亦林)이 왕실에 진상하기 위해 처방한 것인데 그 약효가 워낙 뛰어나서 1000년 가까이 보약 겸 구급약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공진단은 품부허약(稟賦虛弱)을 치료하는 데에는 최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약하게 태어난 사람이 복용하면 강건해질 수 있고 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진단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약은 아니었습니다. 들어가는 약재가 워낙 비싸고 귀하다 보니 일부 한의원에서만 조금씩 만들어서 허약자나 수험생에게 투약했던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최고의 사랑]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한의사의 어머니가 공진단을 자주 거론한 이후에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공진단에는 사향·녹용·당귀·산수유가 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 침향(沈香)이란 약재가 들어가면 효과가 더욱 좋아집니다. 사향은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강심작용이 뛰어납니다. 녹용(鹿茸)은 원기 부족과 피로감을 없애주는 데에 효과가 좋고 당귀(當歸)는 보혈작용과 순환을 돕는 약재입니다. 여기에 진액을 보하고 이를 온 몸으로 골고루 보내주는 산수유(山茱萸)가 있어 면역력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진단의 효과를 배가해주는 약재는 침향(枕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향은 인도네시아나 중국 남부에서 자라는 침향나무에서 분비된 수지가 모여 있는 수간목(樹幹木)을 말하는 겁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아주 소량을 태워서 향으로도 쓰기도 하는데 냄새만 맡아도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기운의 순환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나쁜 기운을 없애고 명치끝이 아픈 것을 치료한다. 정신을 맑게 하고 성기능을 좋게 하며 토하고 설사할 때 쓴다’라고 하여 정신적인 치료를 강조 했습니다.

공진단은 일일이 손으로 만듭니다. 기계로 다량으로 만들면 사향이나 침향 등의 고가 약재가 기계에 묻는 등 약재 손실이 많기 때문에 손으로 반죽하고 비벼서 동그랗게 만든 다음 하나씩 금박을 입힙니다. 금박을 입히는 이유는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사향이나 침향의 냄새가 날아가지 않게 하고 순금이 가지고 있는 강심작용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 한지와 솜으로 덧싸고 플라스틱 곽에 넣은 후 밀랍이나 파라핀으로 밀봉하면 포장이 끝나는 겁니다.

공진단은 노화 방지와 면역력 강화에 효과

공진단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다 쓸 수 있는 약재이긴 하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기운이 충실한 사람이 먹으면 별 효과를 느끼지 못합니다. 공진단은 노화 방지와 면역력 강화에 가장 큰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로하신 분들이나 허약자들이 먼 여행을 떠날 때 지니고 있다가 탈진했을 때 드시면 바로 좋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페인 등의 각성제와 달리 습관성도 없고 기운을 올려주면서도 집중력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좋습니다. 특히 시험 당일에는 필수적으로 먹어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처럼 기억력을 증진시켜주기 때문에 치매 예방이나 치료에도 복용합니다. 공진단이 고가이기 때문에 복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생맥탕(生脈湯)도 좋습니다. 생맥탕은 여름에 먹을 수 있는 보약입니다.

윤영석 -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7대째 가업을 계승해 춘원당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학 관련 유물 4500여점을 모아 춘원당한방박물관도 세웠다. 저서로는 [갑상선 질환, 이렇게 고친다] [축농증·비염이 골치라고요?] 등이 있다.

1343호 (20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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