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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2)] 붓이 먼저면 패하고 뜻이 먼저라야 이긴다 

경치 밖의 뜻(景外意), 경(景)을 넘는 정(情) 담아야... 대상과의 소통·교감 필수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겨울나무, 2012
필자는 일간지 사진기자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사건과 사고, 이슈의 주변에서 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나를 감추고 평균적인 미감으로 독자들에게, 데스크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그러기를 30년이 넘었습니다.

10여 년 전 사진부장으로 일하던 어느 날입니다. 휴가를 맞아 온전하게 나만의 사진을 찍어 보자고 길을 나섰습니다. 혼자서 사진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사진 속에 나는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참 실망했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습관은 무서웠습니다. 신문에 쓸 사진이 아닌데도 사진을 보는 누군가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회사의 동료나 데스크가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 뭐라고 평가할까 하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지금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동양화에서 추상성이 발단한 이유는


▎계산포무도
처음 카메라를 잡으면 누구나 예쁘고, 아름답고, 화려한 장면을 찍게 됩니다. 여성의 경우는 인테리어가 아주 잘된 카페의 정원이나 장식장을 비롯해 꽃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남자들은 산과 바다로 다니며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겨 찍게 됩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훈련이라고 보면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지나친 탐미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아름다운 것에만 눈길이 가고, 셔터를 누르게 됩니다. 미(美)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한 사진을 찍는가로 경쟁하게 됩니다. 풍경사진을 예로 들면 날씨에 따라 ‘도 아니면 모’가 되는 ‘운칠기삼’에 의존하게 됩니다. 머릿속에 어떤 장면을 예상하고 길을 나서지만 그 장면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빈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소재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좋은 사진의 핵심은 소재가 아니라 소재에서 느껴지는 직관에 있습니다.

동양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神)’입니다. 작품에 담긴 정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를 ‘표현과 재현’으로 해석하면 신은 표현의 영역입니다. 재현은 ‘형(形)’이 됩니다. 동양화에서는 이를 신사(神似)와 형사(形似)로 이야기합니다.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사실성보다 그림에 담긴 정신을 중시합니다. 산수화의 최고의 가치는 ‘전신(傳神-정신을 전한다)’에 있습니다.

송나라의 시인 소식은 “닮음의 정도로 그림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그 식견이 어린 아이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또 동시대 회화이론가 왕미는 산수를 그리는 것은 “성의 구역을 정하고 천하의 지역을 구획하며 산이나 구릉을 표시하고 하천의 흐름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림이 반드시 현실과 똑같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동양화는 선 위주로 간략하게 그리는 추상성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산수화의 사실성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진짜와 가짜, 사실성과 추상성, 실제 자연산수와 산수화의 관계 설정에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조선 초 문인으로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신숙주는 아름다운 산수화를 보면 ‘가(假)로서 진(眞)을 빼앗는다(因假奪眞)’고 말했습니다. 가는 그림을 말하고, 진은 실제 자연을 뜻합니다. 그림이 마치 실제를 보는 것처럼 닮았거나 더 낫다는 뜻입니다. 이는 화가에 대한 칭송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큰 기교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접어 들면서 ‘가와 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박지원은 “비슷한 것은 가짜”라며 진보적인 화론을 제시합니다. 아무리 잘 그렸다 하더라도 그림은 진짜는 아니며, ‘왜 그림이 실제와 똑같아야 하는가’ 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회화관을 드러냈습니다. 그림은 ‘진’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는 현대미술의 추상의 개념과도 닮았습니다.

‘그는 산수를 비슷하게 그린 산수화보다는 함축적 회화 언어로 인간이 내면을 표현하는 산수화가 더욱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어차피 그림은 가짜이기에 진짜처럼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림으로서의 정신과 기술을 담아야 하며, 따라서 간솔한 표현으로 대상이 무엇인지 또한 그리는 이의 정신적 내면이 무엇이지 전달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훌륭한 그림이라는 것이 박지원의 견해였다(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2011).’

이때부터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추상성이 강조됩니다. 닮음의 기술보다는 산수에서 느껴지는 정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문인화가 일대를 풍미하게 됩니다. 서른에 요절한 조선의 천재화가 고람 전기(1825∼1854)의 ‘계산포무도’는 이 시대의 회화관이 잘 녹아있는 걸작입니다. 붓질이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풍진 세상에 맞서는 화가의 서릿발 같은 기개가 느껴집니다. 이른바 ‘대교약졸(大巧若拙, 노자에 나오는 말로 ‘큰 기교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사해내는 사진에서 닮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지시대상이 분명한 사진에 마음을 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그대로 복사한다고 해서 찍은 이의 마음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진의 정신은 교감입니다. 셔터를 누르기에 앞서 대상과 소통하고, 이를 존재론적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좋은 풍경사진은 ‘경치 밖의 뜻(景外意)’이 있고 ‘경(景)’을 넘어 ‘정(情)’이 느껴져야 합니다.

‘붓이 먼저면 패하고, 뜻이 먼저라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풍경에 압도 당하면 ‘붓이 먼저’가 됩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대상을 보고 느껴지는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풍경에서 느껴지는 직관을 세심하게 마름질 하는 전략이 있어야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재빨리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간에 자신만의 느낌에 솔직하고, 충실하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만의 풍경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1347호 (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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