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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나만의 삶’ 살려고 새로운 시작 

경기 침체로 대기업 성장 주춤 … 성공의 정의 다양해지고 실패에 관대해져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나, 회사 그만두려고.” 여기까지는 쉽다.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직장인은 많지 않다. 지금 당장 ‘대기업 직원’이라는 타이틀이 없어진다고 상상하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그들은 왜 고액 연봉, 사회적 지위, 복지와 다양한 혜택을 모두 버리고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그곳으로 옮겼을까. 새로운 삶은 과연 더 행복할까. 스타트업으로 옮기는 ‘대기업맨’은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경기 침체와 사회 인식 변화가 주된 이유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대기업들도 스타트업 육성에 나섰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오래 살아남는 자’가 아니라 ‘적응하는 자’가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

#1. 차세대 사용자 인증기술 ‘스톤패스’를 개발한 센스톤의 유창훈(43) 대표는 삼성중공업 조선사업부에 입사했다가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안정적이지만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게 이유다. 퇴사 후 공동구매 플랫폼 스타트업을 설립했지만 억대 빚을 지고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그는 지난해 11월 센스톤을 설립해 헌법재판소와 기술 계약을 하고 일본 진출을 준비 중이다.

#2. 맛집 추천 서비스 앱 ‘망고플레이트’의 김대웅(35·대표)·오준환(40)·유호석(35)·노명헌(37) 공동 창업자는 각자 네이버·삼성전자·카카오·애플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이 회사의 앱은 3년 만에 누적 다운로드 250만 건을 돌파했다. 스파크랩스 등으로부터 67억원을 투자 받았다. 김 대표는 “퇴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모바일 맛집 소개를 사업화하겠다는 목표만 생각했다”며 “직원이 30명을 넘자 대기업에서 익힌 조직 운영 능력이 빛을 발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갈아타는 인재들이 늘고 있다. 창의성과 스펙을 겸비한 이들을 매료시킨 것은 스타트업의 빠른 의사결정과 뛰어난 사업 실행력이다. 대기업과 정부가 함께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전국 17곳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3년 동안 이곳에서 나온 스타트업은 1063개에 달한다. 이들은 2596억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134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120명의 인력을 신규 채용했다.

창조경제혁신센터, 3년 새 1063개 스타트업 배출

스타트업 미디어 플래텀에 따르면 지난 8월 한 달에만 23개 스타트업에 1250억원이 몰렸다. 전년 대비 65% 증가한 액수다. 교육·교통·식품·유통·콘텐트 같은 생활과 밀접한 분야부터 인공지능(AI)·가상현실(VR)·전기자동차·핀테크·헬스케어·생체인식 같은 첨단기술까지 스타트업의 업종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포춘에 따르면 쿠팡과 옐로모바일은 각각 50억 달러(약 6조원), 1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 받아 세계 174개의 ‘유니콘(기업평가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외국 명문대나 대기업 출신은 물론 의사·변호사·회계사·컨설턴트 같은 전문직의 유입도 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창업뿐 아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핀테크 업체 핀다의 이혜민 대표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의 과장이 핀다로 이직을 희망해 놀란 동시에 뿌듯했다”며 “퇴사 결심을 못해도 스타트업계에 기웃거리는 직장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패러다임의 변화로 혁신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경기 침체로 대기업 성장이 더뎌지면서 생긴 현상”이라며 “성공의 정의가 다양해지고 과거보다 실패에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 역시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큰 조직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창업가들을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스티브 첸은 1999년에 입사한 전자결제기업 페이팔이 이베이에 인수되자 2005년 회사를 떠나 유튜브를 창업했다. 올 여름 세계를 강타한 ‘포켓몬고’ 개발사 나이언틱은 구글의 사내 벤처에서 출발했다. 한국의 대기업도 스타트업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LG전자·네이버·카카오 같은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사내 벤처를 속속 독립 시키고 있다.

대기업 출신의 창업가들은 시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미국 엔젤투자사 ‘퍼스트 라운드’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애플·구글·아마존 등 대기업 출신 창업팀의 성과가 그렇지 않은 팀의 성과보다 160% 높았다. 초기 투자 시 기업가치 산정에서도 50% 이상 높게 책정됐다. 실제 대기업 출신 스타트업 경영자·직원들은 기본적인 비즈니스 매너부터 의사소통, 조직 운영, 사업 전략 수립까지 대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SK텔레콤 출신의 이정수 플리토(집단지성 번역 시스템) 대표는 “창업 전 꼭 기업에서 일해볼 것을 권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대기업 출신 창업팀들 탁월한 성과

하지만 아직까지 창업가를 배출하는 대기업의 분야는 삼성전자·LG전자·삼성SDS·KT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과 금융회사에 한정돼 있다. 상대적으로 제조·유통 분야는 주체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실무에 밝은 대기업 출신들이 스타트업에서 기존 기업과 다른 제품·서비스를 선보이면 한국 자본주의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1351호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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