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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4)] 도리에 어긋난 어명은 따를 수 없다 

 

김준태 역사칼럼니스트
이남규의 영흥부사 사직소... 일제 강압에 굴복한 고종의 중전 폐서인 칙명에 울분

조선왕조에 황혼이 깃들던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 ‘정미7조약’을 강행,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킨다. 그리고 각 지방의 항일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는 등 충청도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도 제거대상에 오른다. 9월 26일 밤, 100여 기의 일본군이 그가 은거하고 있던 충남 예산 평원정(平遠亭)에 들이닥친 것이다.

일본군 회유에 맞서다 순국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그를 포박하려 하자 이남규는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선비를 죽일지언정 욕보일 수 없다.” 당당히 따라 나선 그를 두고 일본군은 계속 회유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죽이려면 죽일 것이지 무슨 말이 많은가?” 순간, 수많은 칼날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아들과 노복이 놀라 막아섰지만 속절없이 함께 쓰러졌을 따름이다. 훗날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받기도 한 항일애국지사 이남규는 그렇게 순국했다. 조선의 명문가 한산 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기호남인의 학맥을 이은 이남규는 관직생활 내내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맞선 인물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이 한양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그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지금 일본에서 도성 안으로 군사를 들여왔는데 외무부의 신하가 힘써 막았으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중략)… 신은 아무래도 여기에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천 리의 강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저들을 두려워하여 잔뜩 움츠러들어 고개를 숙이고는 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감히 뭐라고 한마디도 못 한단 말입니까? 외무부에서 이치와 의리를 가지고 따져 저들을 물러가게 하소서. 만약 이치와 신의, 성실로써 대했는데도 저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이지 이웃이 아닙니다. 적을 이웃으로 삼아 속으로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만 괜찮은 척한다면, 그러고도 끝내 무사한 경우는 있은 적이 없습니다.’

일본이 무단으로 군대를 들여와 주둔시키는 것은 조선의 주권과 안보를 크게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철군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일본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敵)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이남규는 이를 방치할 경우 국가에 큰 화가 닥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소장 오오시마 요시마사(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고조부)는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출범시킨다. 이에 대해 이남규는 ‘저들이 맹약을 저버린 죄를 천하에 공포하고 동맹국에 알리는 동시에, 공식서한을 보내시어 저들 나라의 집정자를 꾸짖음으로써 명분 없는 저들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무례를 죄주게 하소서’라고 상소했다. 그는 일본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는다면 ‘관항(關港)을 닫고 조약을 폐기하며 각 국과 힘을 합쳐 토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열국의 국제정세와 조선의 국력을 감안할 때 실현가능성에는 의문이 있지만, 당시 조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처럼 일본의 눈엣가시였던 이남규는 친일정권에 의해 영흥 부사로 좌천됐다. 그런데 이듬해 명성황후가 일본에게 비참히 시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고, 일본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고종은 중전을 폐서인하는 교지까지 내렸다(고종32.8.22). 그러자 이남규는 분개하며 상소를 올린다. 신하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면직하고 처벌해달라는 뜻과 함께 ‘지금 이 나라는 더할 수 없는 변고와 모욕을 당했으니 군신 상하가 떨쳐 일어나 도적을 토멸하고 수치를 갚아야’한다고 진언했다.

이남규는 ‘수치를 잊고 모욕을 참으면서 안일을 도모하여 구차하게 이어 간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침체되어 비록 다시 진작시키려 하여도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진언했다. 고종이 ‘세상에는 끝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끝내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멸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 멸망을 재촉하니 그 존립이 구차한 것이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더욱 그 죽음을 재촉하니 그 삶이 구차한 것이다. 원수가 항아리 옆에 있는 쥐와 같다 하여 돌 던지기를 꺼려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엎질러진 둥지의 새알과 같다 하여 지레 패할 것이라 단념하지 말라. 마음과 힘을 합쳐서 적들을 무찔러서 국모의 수치를 갚고 종사의 모욕을 씻자’는 교서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남규는 ‘분통함을 삭이고 아픔을 씹고 있는 (고종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왕후에게 죄를 돌려서 폐서인으로 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며 고종의 칙령을 따를 수 없다고 거부했다. ‘(8월 22일 내린) 칙명은 신하된 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참고 백성들에게 공포하라는 것입니까? 이제 신이 목숨을 바칠 때인 것 같습니다. 이 조칙을 선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니 의리로 보아 신은 죽어야 마땅하며, 이 조칙을 선포하지 않는 것은 어명을 거스르는 것이니 죄로 보아 죽어야 마땅합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명을 어기고 죄를 받아 죽을지언정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여 의리를 배반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대저 조정이 수령을 임명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명령이 선포되고 행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과 같은 신하가 있어 명령이 시행되지 않게 하였으니, 참으로 그 죄는 죽음으로도 만분의 일도 속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어찌 하루인들 얼굴을 들고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위한 충성이 최우선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며 수령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무리 어명이라 할지라도 도리에 어긋난 명령은 따를 수 없으니 차라리 파직하고 죄를 물어달라는 것이다. 윗사람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만이 나라를 위한 충성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상 이남규의 주장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비분강개하고 통쾌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일본의 죄상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동맹국과 힘을 합쳐 일본을 토벌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동맹국들이 조선의 편을 들어 군사적 대응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조선이 일본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이 일본의 위세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임금조차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남규의 용기 있는 발언은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선비정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기개와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36년 간의 투쟁을 거쳐 광복의 빛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57호 (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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