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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비 오는 날'의 ‘후회회피’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후회하고 싶지 않은 심리... 장기적으로 ‘하지 않은 것’에 더욱 상심

빗소리는 이중적이다. 처마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만들기도, 서글프게 만들기도 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비가 오면 지붕이 새는 집이 적지 않았다. 양동이나 세숫대야를 받쳐놓고 지내는 밤은 길었다. 요즘은 비 새는 집이 많지 않다지만 취직 못한 청년, 명예퇴직을 당한 중년, 가족이나 친구와 사별하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비 오는 날, 마음속 천장에서는 비가 마구 샌다.

비를 보며 우울함을 생각한 대표적인 작가가 손창섭이다. 그는 ‘한국 문학사상 가장 우울한 상황을 자신의 작품 속에 구축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대표작이 [비 오는 날]이다. 손창섭은 우울하고 어둡고, 곤궁하고, 헐벗은 인물들로 작품을 채웠다. 1970년대 일본인 처를 따라 돌연 일본으로 간 후 소식이 끊겼다. 2010년 6월 사망한 그의 부음은 두 달이 지난 후 한국에 알려졌다.

장애 가진 친구 여동생 결국 외면

[비 오는 날]의 무대는 한국전쟁 직후의 부산이다. 주요 인물은 원구·동욱·동옥이다. 원구와 동욱은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친구다. 동욱과 동옥은 남매다. 둘은 1·4후퇴 때 어머니만 북에 남겨두고 함께 부산으로 피난 왔다. 원구는 소학교 시절 동욱의 집에 자주 들렀다. 동옥은 그때 원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다섯 살 꼬마 숙녀였다. 동욱은 동생 동옥이 그려준 초상화를 미군 부대에 팔아 밥벌이를 한다.

장마가 40여 일이나 계속 되던 날, 원구는 처음으로 동욱집을 찾아간다. 외진 곳에 있는 낡은 목조건물이다. 원구를 대하는 동욱의 여동생 동옥의 태도가 이상하다. 말없이 조소적이고 우울한 미소를 짓는 그녀는 알고 보니 장애가 있다. 마음을 닫았던 동옥은 원구가 계속 찾아가자 서서히 말문을 연다.

손창섭이 그리는 비 오는 날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질척거리고, 진득진득하다. 우산을 받쳐도 비가 후려쳐 흙탕물이 튀고 정강이는 다 버린다. 침침한 방안은 줄줄 새는 빗물로 엉망이다. ‘촐랑촐랑 쪼르륵 촐랑’ 경쾌한 빗소리마저 ‘바께쓰’에 물이 늘어날수록 우울한 음향으로 변해간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오랜만에 원구는 동욱을 찾아간다. 하지만 동욱은 실종됐고, 동옥은 그 집을 떠났다. 동욱은 아마도 군에 잡혀갔을 터지만, 동옥은 어디로 떠났는 지 알 수가 없다. 새 집주인은 “얼굴이 고만큼 밴밴하고서야 어디가 몸을 판들 굶어죽기야 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원구는 “이 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라고 격분하지만 말없이 돌아선다. 오히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라는 흥분된 소리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오한을 느낀다.

원구는 왜 자신을 자책할까. 후회 때문이다. 친구 동욱은 원구에게 자신의 동생인 동옥과 결혼해줄 것을 부탁한다. 술자리에서는 “내가 자네(원구)라면 주저 없이 동옥이와 결혼할 테야”라고 혼잣말처럼 말하고, 잠꼬대를 빙자해서는 “커다란 적선으로 생각하고, 동옥과 결혼할 용기는 없을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원구는 쉬이 답을 해주지 않는다. 불구의 친구 누이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그런 여성을 아내로 맞고 싶은 생각도 없었을 테다. 답을 망설이던 사이 동옥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다. 자신이 합리적 이성으로 내린 결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후회를 하고 싶지 않은 심리를 ‘후회회피(regret aversion)’라고 부른다. 원래는 심리학적 용어지만 요즘은 행동경제학에서도 많이 쓴다. 누구나 후회를 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후회를 달고 산다. 수많은 선택 중에서 매번 최선의 판단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현재 혹은 미래에 후회를 꺼리는 심리는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선택을 함에 따라 포기하게 되는 비용(기회비용)은 경제학의 중요한 판단 요소다.

흥미로운 것은 후회회피 심리는 단기적일 때와 장기적일 때,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는 ‘실패한 행동’을 더 강하게 후회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기며 마음 아파한다. 마크 트웨인은 “20년 지나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더 후회하게 된다”고 말했다.

주식 A종목을 갖고 있는 ㄱ씨가 있다. 그는 지난해 그 주식을 팔아서 B주식을 사려 했다가 그만 뒀다. 귀찮기도 하고, 바꿔탄다고 수익이 더 생긴다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A 주식 가격이 급락했다. 만약 그때 팔았으면 1500만원의 이익을 낼 수 있었다. ㄴ씨도 A종목을 갖고 있다. 그는 지난해 B주식을 팔아서 A종목을 샀다. 하지만 B 주식은 그 후로 가격이 급등했다. 만약 B주식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면 1500만원 이익을 낼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후회를 할까. 아마도 ㄴ씨가 더 후회를 할 것이다. 팔지 않았더라면 벌 수 있었던 돈이기 때문이다. “어휴 바보같이 왜 그 짓을 해서”라고 머리를 쥐어박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ㄱ의 후회가 더 커진다고 한다. ‘그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심리가 더 크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최근 몇 달 사이에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런 저런 선택을 했는데, 그걸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답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바꿨다. 그러면 “그때 그 일을 했어야 했는데 안 한 게 후회된다”는 답이 많다고 한다. 마테오 모텔리니의 저서 [경제는 감정으로 움직인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결정 유보도 후회 부르는 또 다른 선택

원구는 동욱의 요청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 상태였다. 동옥과 결혼하겠다는 얘기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하겠다는 얘기도 못했다. 원구는 자주 동욱의 집에 들러 동옥을 보는 것으로 마음 속 타협을 봤다. 원구가 술과 통조림을 사들고 동욱집을 찾아간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원구의 ‘유보’는 결과적으로 동옥이 실종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확실한 판단이 들지 않을 때 우리는 후회를 피하기 위해 결정을 미루거나 회피한다. 결정을 미루면 후회가 생기지 않을까? 아니다. 결정 유보도 또 다른 선택이다. 즉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 된다. 예컨대 선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들이 나왔다. 나는 투표를 ‘회피’했지만 당선자는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 당선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내가 투표하지 않은 행위는 그의 당선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가 됐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라는 양심의 소리에 원구가 앓고 난 사람처럼 허적거리는 것은 ‘선택의 회피’에 대한 후회 때문이다. 그녀와의 결혼을 선택했더라면 그녀의 마지막이 그리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구는 비가 오는 날마다 동욱과 동옥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무게에 힘들어 한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이렇게 크다.

1357호 (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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