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최순실 사태로 돌아본 은행 굴욕사] 대형 게이트마다 조연으로 연루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KEB하나은행, 최순실 딸 정유라에 특혜 대출 의혹... 한보그룹 특혜 대출, DJ정부 대북 송금 등 흑역사

▎KEB하나은행은 지난해 12월 당시 19세였던 정유라씨에게 24만 유로(약 3억원)를 특혜 대출해준 의혹을 받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선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비리 의혹의 스케일이 방대하고 등장인물의 면면이 화려하다. 매일 새롭게 제기되는 의혹은 또 얼마나 많은지,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그 의혹 무더기의 말석에 ‘은행’이 자리잡고 있다. 최순실씨와 그의 딸인 정유라씨 등 최씨 관련자들에게 특혜 대출과 각종 금융편의를 제공했다는 게 은행들에 대해 제기된 의혹이다.

가장 큰 의심을 받고 있는 곳은 KEB하나은행이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12월 당시 19세였던 정씨에게 24만 유로(약 3억원)를 대출해줬다. 은행은 정씨 등 명의의 강원도 평창 땅을 담보로 잡고, 정씨에게 신용장(LC, letter of credit)을 발급해줬다. 정씨는 이 신용장을 갖고 하나은행 독일법인에서 유로화로 대출을 받았다. 은행이 일종의 외화지급보증서를 발급해준 것이다. 보통 무역 거래에서 쓰이는 LC가 개인대출에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19세 개인에게 거액 외화지급보증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1998년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씨는 당시 한보그룹 특혜대출 의혹 사건에서 파생된 각종 의혹에 연루돼 기소됐다.
더욱 미심쩍은 대목은 해당 거래를 처리했던 하나은행 독일법인장이 귀국 직후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는 점이다. 당시 독일법인장이었던 이모씨는 올해 1월 귀국한 후 삼성타운 지점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한 달 만인 2월에 임원급인 글로벌 담당 2본부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2본부장이란 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미심쩍다. 하나은행의 글로벌영업본부는 원래 1개 부서였다. 그런데 하나은행은 지난 2월 정기 인사철이 아닌데도 글로벌영업본부를 1본부와 2본부로 나눴고 이씨를 2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고속승진 배경에 최씨 등의 입김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법한 정황이다.

이에 대해 하나은행은 펄쩍 뛰고 있다. 먼저 정씨에 대한 대출은 특혜 대출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외화지급보증서는 개인도 충분히 발급받을 수 있다는 게 은행 주장이다. 그러면서 외화지급보증서를 발급받은 하나은행 고객 6975명 중 개인고객이 11.5%인 802명이라는 사실까지 스스로 공개했다. 하나은행 측은 “정씨가 대출 자격요건을 갖췄기 때문에 대출이 진행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씨의 승진도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라는 게 은행 측의 설명이다. 은행 측은 “이씨는 해외 근무 경력이 풍부하고 우수한 영업실적 및 뛰어난 업무 추진력을 갖췄기 때문에 적정한 임원 선임 절차를 거쳐 임원으로 선임된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영업본부를 2개로 나눈 것도 글로벌 사업부문 강화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KB국민은행도 유탄을 맞았다. 최씨의 언니 최순득씨에게 강남구 신사동의 건물을 담보로 5억원의 대출을 해줬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물론 아직까지 두 은행 모두 명백한 불법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어지간한 대형 게이트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던 은행의 전력을 감안할 때 이번에도 은행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실제 은행이 공범으로 등장했던 대형 비리 사건은 한 두 건이 아니다. 은행 자체가 대형 게이트의 시발점이 된 적도 있었다. 당장 한보그룹 특혜 대출 의혹 사건이 떠오른다. 한보그룹이 1990년부터 당진제철소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5조 원의 불법·부실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정·관계와 금융계의 비리와 부실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사건이다. 주먹구구식 계획으로 사업비가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났지만 장기간의 사업 추진 과정에서 누구 하나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은행들은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상세한 검토도 없이 외압에 따라 대출을 해줬다. 금융감독기관도 동일인 여신한도를 넘어선, 한보철강에 대한 은행의 편법 지원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은행들은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추가로 돈을 빌려줘야 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수사 결과 이 중 일부가 정치인에게 넘어간 사실이 확인됐다. 정치인과 은행장 등 10여 명이 줄줄이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외연을 계속 넓혀나간 끝에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의 구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근영 전 산업은행 총재가 2003년 서울 대치동 대북송금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이 전 총재는 남북정상회담 직전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불법 대출해 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당시 이 중 2235억원이 북한에 전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 사진:뉴시스·중앙포토
김대중 정부에서는 한빛은행(현 우리은행) 불법대출 사건이 터졌다. 한빛은행이 아크월드라는 중소기업에 1000억원이 넘는 거액을 대출해줬고, 이 배후에 당시 핵심 실세였던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있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대출을 위해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박 장관이 신보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신보 지점장이 “박 장관의 압력 전화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결국 박 장관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검찰에 출석하기 전에 장관직을 내놓아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북송금 사건 때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초상집이 됐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전에 북한에 거액을 송금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었다. 실제 조사 결과 현대 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은 돈 4000억원 중 2235억원을 북한으로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권의 요구에 따라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불법 대출한 이근영 당시 산은 총재는 결국 구속기소돼 유죄 선고를 받았다.

다소 성격은 다르지만 경기은행 퇴출 저지 로비 사건도 은행이 연루된 대표적인 대형 비리 사건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퇴출을 막기 위해 서이석 경기은행장이 임창열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1억원을 건넨 사건이었다.

은행들은 왜 이렇게 대형 비리 사건에서 많이 언급될까. 먼저 은행들이 정치 권력에 약한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금융당국을 비롯한 정부와 정부를 뒤흔드는 정치인들은 은행 입장에선 갑 중의 갑이다. 이들이 만드는 정책 하나하나에 은행의 흥망이 좌우될 수 있어서다. 특히 은행 고위 관계자들의 경우 정권과의 관계가 자신의 인사와도 직결된다. 국책은행이나 정부가 대주주인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시중은행 중에서도 대주주가 불투명한 은행은 여지없이 정치 권력에 휘둘리곤 한다. 전 하나은행 독일법인장의 고속승진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속성상 정치 권력에 휘둘리기 쉬워

두 번째 이유는 역시 돈이다. 대형 비리 사건은 결국 돈 때문에 벌어진다. 은행은 돈이 모여있는 저장고다. 돈을 싸게 빌리는 것, 다시 말해 특혜대출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이권이다. 정치 권력과 은행의 굴종, 여기에 은행원의 도덕적 해이가 겹치면 언제라도 대형 비리로 연결될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은행들도 안심하기는 이른 상황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씨의 대출 과정에 대해 “개인이 신용장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건 맞지만 일개 지점이 19세 학생에게 억대의 신용장을 선뜻 발급해줬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이미 A은행장이 최씨의 줄을 잡고 승승장구했다거나 B은행장이 최씨의 몰락과 함께 ‘토사구팽’ 위기에 몰렸다는 등의 별의 별 소문이 다 돌고 있다. 단순히 소문으로만 그칠지, 아니면 이 사건 역시 먼 훗날 은행 잔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1360호 (2016.11.2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