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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 (2) | 봉상왕과 창조리] 사람이 아닌 직위에 충성하라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왕 비위 방조했다면 참모들도 죄 있어 … 보스가 올바른 길 가도록 역할하는 게 진정한 참모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 / 사진:중앙포토
292년, 고구려 제 14대 임금 봉상왕(재위 292~300)이 보위에 오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봉상왕은 어려서부터 교만했고 의심과 시기심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까봐 항상 두려워했는데, 숙부인 안국공 달가가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자 음모를 꾸며 살해했고(292년 3월), 동생인 돌고도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죄로 자결토록 했다(293년 9월).

그런데 봉상왕이 고구려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꼽히기는 하지만 의외로 재위 중반까지는 별다른 과오를 보이지 않는다. 294년 창조리를 국상(國相)으로 발탁하고, 창조리의 추천을 받아 고노자를 중용해 모용외(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초대 임금)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인사 운영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296년 8월). 문제는 봉상왕이 임금의 권위를 높이겠다는 이유로 궁궐 증축에 나서면서 벌어졌다. 298년 10월, 왕은 “궁궐을 늘여 지었는데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고 한다.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대거 공사에 동원되면서 괴로움이 더해갔지만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300년 8월, 봉상왕은 또다시 궁궐을 증축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지진 등 천재지변이 계속되고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지만 대규모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봉상왕에게 간언하고 나선 사람이 7년째 국상으로 재임하고 있던 창조리다.

“재해가 거듭 일어나 곡식은 아예 여물지도 않고 있으니 백성들이 살아갈 길을 잃었습니다.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니고 노인과 어린아이의 시신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염려해야 할 것이며, 삼가 두려워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하셔야 할 시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대왕께서는 아직도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굶주린 백성들을 토목의 노역으로 고달프게 하시니, 임금은 백성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도리에 매우 어긋난다 하겠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웃 나라에는 강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 쳐들어온다면, 장차 이 나라 사직과 백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주시옵소서.”

7년간 국상 자리 지켜놓곤 왕을 폐위한 창조리

무릇 임금의 책무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각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에서 백성에게 부과하는 부역(負役)도 백성을 힘들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물며 당시는 연일 계속되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다. 이러한 때에 필요하지도 않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극단으로 내모는 것은 백성의 부모로서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짓이라는 것이다.

창조리의 말을 들은 봉상왕은 진노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인데, 궁궐이 장엄하고 화려해야 위엄을 세울 것이 아닌가?” 좋은 정치로 민심의 순응과 지지를 얻기보다는 외형적인 위세로서 백성의 복종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었다. 이어 봉상왕은 “지금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칭찬을 듣고자 함인가?” 라며 창조리의 진심을 의심한다. 창조리의 간언이 임금을 위한 충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임금과 대척점에 섬으로써 백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창조리는 즉각 부인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인자하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길 건의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이 신은 국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진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칭찬을 바라서이겠습니까.” 그러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다시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며 물리쳤다. 여차하면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한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창조리는 봉상왕이 끝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왕을 폐위시키기로 결심한다. 폐정을 종식하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교체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창조리는 신하들을 규합해 봉상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켰고 왕을 폐하여 연금시켰다. 그리고 봉상왕에게 죽임을 당한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옹립하였는데, 이 사람이 미천왕이다. 300년 9월, 봉상왕과 그의 두 아들은 자결했다.

이상의 이야기를 보면 폭정을 휘두른 임금에게 간언을 해도 듣지를 않자 재상이 총대를 메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부득이 임금을 축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리는 봉상왕의 잘못을 직언함으로써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했고, 봉상왕은 창조리의 충언에 귀 기울기는커녕 오히려 협박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선악이 분명해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창조리의 행동이 옳기만 한 것일까?

왕 옆에서 호가호위한 책임져야

나랏일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보스와 참모의 관계는 사적인 그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참모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것은 보스 개인이 아니라 그 직위다. 즉, 국상이라는 수석 참모로서 창조리가 보좌해야 할 대상은 봉상왕 개인이 아니라 봉상왕이 맡고 있는 고구려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따라서 봉상왕이 임금으로서 도리를 저버리고, 임금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면 그 충성은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 폭군을 징벌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 정당한 행동이라고 설파한 맹자의 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창조리의 경우 봉상왕이 재위한 9년 중 7년이나 국상의 지위를 누렸다.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 토목 공사 문제로 간언을 올린 것을 제외한다면, 7년 동안 목숨을 걸고 직언했다거나 임금의 조치에 반대해 사직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봉상왕의 잘못된 정치에 부화뇌동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를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바로잡지 못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반정이 성공한 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임금이 자결까지 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삼국사기]에 보면 창조리가 반정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서”라고 되어 있다. 순수성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컨대 봉상왕과 창조리의 관계는 보스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참모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참모라고 해서 보스를 무조건 추종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보스가 보스답지 못하고, 보스와 서로 뜻이 맞지 않는다면 보스의 곁을 떠나거나 심지어 대척점에 서게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이전에 참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스의 과오를 바로잡고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멋들어진 명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68호 (201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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