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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3) | 신라삼최(新羅三崔)] 좋은 땅에서 아름다운 꽃이 핀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보스를 잘못 만난 최치원의 좌절 … 어떤 보스를 택하느냐에 따라 참모의 운명 갈려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신문왕에서 경덕왕에 이르는 신라 중대(中代)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사치와 향락에 젖어든 지배층은 부패하고 무능했으며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의 모순과 문제들을 감당해낼 능력이 없었다. 경제적 부가 귀족과 사찰에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때일수록 중앙정부가 제 역할을 해야 하지만 각 지방에서 기세를 올리는 호족들에게 밀려 점점 무력화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 9세기 말 신라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향하는 유학생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절망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였을까. 신라의 젊은이들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발전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국가를 개혁할 지혜를 얻기 위해, 입신양명을 위해, 각자의 포부를 품고 너도 나도 바다를 건넜다. 문성왕 2년(840년), 당나라 황제가 체류 기한이 지난 신라 유학생 105명을 강제 귀국시켰다는 기록을 볼 때(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11), 전체 유학생의 수 역시 무척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 유학생 중에는 빈공과(賓貢科,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당나라의 관직에 진출하는 이들도 나온다. 신라가 낳은 세 명의 최씨, ‘신라삼최(新羅三崔)’라 불렸던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가 대표적이다. 같은 경주 최씨 집안이자 6두품인 세 사람은 각각 868년, 885년, 890년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했다. 특히 최치원은 뛰어난 글솜씨와 능력으로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농민 반란군의 수령 황소가 그가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보고 두려움에 놀라 쓰러졌다는 야사가 전해져 올 정도다. 아무튼 이들 세 사람은 당나라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조야에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대로 계속 당나라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도 큰 부귀와 명예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귀국을 선택한다. 조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신라의 현실은 이들이 떠나올 때보다 더욱 암담해져 있었다.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골품제 사회 속에서 6두품 지식인이 겪게 되는 좌절 역시 여전했다. 따라서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과 싸우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보스를 선택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가 이번 호에서 다룰 이야기이다.

신라삼최(新羅三崔)의 엇갈린 운명

우선,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해 한림학사 겸 병부 시랑이 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당나라에서 배우고 얻은 바를 신라 조정에서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의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았고” 지방관을 전전해야 했다. 진성여왕에게 당면한 과제와 해결 방안을 담은 시무 10조를 건의해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894년) 그뿐이었다. 뒤를 이은 효공왕에게도 개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왕들은 최치원의 고심이 담긴 제언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이기만 하면 매번 비난을 받으니 최치원은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해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산기슭과 강, 바닷가를 자유롭게 노니며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누각을 지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책을 베개 삼아 풍월을 읊으며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다음으로 최승우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재상으로 활동한다. 그가 견훤에게 어떻게 발탁되었는지, 견훤이 몰락하면서 그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전해진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최승우는 신라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찾은 듯 하다. 하루속히 전쟁과 혼란을 종식하고 백성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고, 따라서 강력한 군사력이 있던 견훤을 선택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최승우는 후백제와 고려 간의 외교를 총괄하는 등 견훤을 위해 헌신했는데, 아들들의 반란으로 견훤이 실각했을 때 죽음을 맞았거나 관가를 떠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끝으로 최언위는 귀국 후에 신라의 관리로 활동하다가 왕건이 즉위하자 그 휘하로 들어갔다. ‘당시의 이름난 가문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기록과 태자사(太子師), 한림원 태학사 등을 역임한 그의 이력으로 봤을 때 주로 교육·외교 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최응과 최지몽 등 다른 참모들에 비해 지명도는 약했지만 왕건의 깊은 신임을 받으며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작성하는 등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쳤다.

이처럼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세 사람은 출발은 같았지만 종착점은 서로 달랐다. 출신 성분, 당나라 유학, 빈공과 급제, 뛰어난 학문과 명성, 그리고 귀국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같은 행보를 걸었다. 단지 보스로 선택한 사람이 달랐는데, 이것이 세 사람의 정치적 운명을 바꿔버린 것이다.

최치원은 한국 역사가 낳은 대표적인 천재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그가 모신 주군인 진성여왕과 효공왕은 혼군(昏君)으로서 그를 담아내 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했다. 최치원의 능력을 활용하거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는커녕 절망감만 더해주었을 뿐이다. 이러한 최치원의 좌절을 골품제나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두 임금 모두 최치원의 제언을 실천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결국 최치원은 세상과의 연을 끊고 은거하게 되는데, 최치원 개인으로서나 공동체 전체로서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비해 최승우와 최언위는 각각 견훤과 왕건의 지우(知遇)를 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는다. 참모의 성패는 보스의 성패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견훤의 패배를 막지 못한 최승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보스와의 관계만큼은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최언위의 경우는 두 사람보다 한 수 아래의 인물로 평가받지만, 좋은 보스를 선택했고, 또한 그 보스가 성공한 덕분에 명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세 사람의 사례는 어떤 보스를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적합한 땅이 없으면 뿌리 내리지 못하는 법이고, 아무리 강건한 천리마라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짐수레나 끌다가 생을 마쳐야 한다. 보스의 성패까지 예측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나를 알아주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사람, 나의 포부와 능력을 담아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스로 모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설령 실패할지라도 아쉬움 따위는 남지 않을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69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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