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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 (40) ·마지막회] 사회 전체가 변하는 것이 진정한 경제 성장 

 

조원경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
아서 루이스의 ‘루이스 전환점’ … 지속가능한 성장과 도시화에 대한 고민과 철학 있어야

▎중국 도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농민공들(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농민).
우리는 흔히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듣는다. 누군가는 사람 많고 공기 안 좋고 차 붐비고 생활물가 비싼 서울에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 허나, 이 말의 본 뜻은 성장 가능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말(馬)다운 말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말이 많고, 명마로 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제주에 가야만 하고, 같은 이치로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똑똑한 사람이 많은 서울에서 부대끼면서 견뎌내야만 한다는 얘기다.

자, 이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산업화 초기에는 노동력이 생산성이 낮은 농촌에서 도시 제조업 부문으로 이동하면서 급속한 산업발전이 이뤄진다. 그러나 값싼 노동력의 공급은 지속가능할까. 여기에 의문을 품은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의 전환점’으로 유명한 흑인 경제학자 윌리엄 아서 루이스다.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작은 섬 세인트루시아에서 이민자 가족으로 태어난 루이스는 “경제 성장은 1인당 소득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피부색으로 차별받던 그는 교육의 기회를 찾아 영국 런던에서 경제학을 공부한다.

평생 개발경제학 연구한 흑인 경제학자


▎윌리엄 아서 루이스 (1915~1991) :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이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948년에는 맨체스터 대학교, 1963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됐다. 자신이 제3세계 출신임을 잊지 않고 평생 개발도상국의 빈곤과 경제 문제를 연구했다.
운명은 자신이 경제학자가 되도록 정해 놓았다는 그는 자신의 출신을 망각하지 않고 개발경제학을 공부한다. 가난한 나라를 부자로 만드는 개발경제학을 공부하며, 그는 끝없는 가난에서 남아도는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끊임없이 값싼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무제한으로 공급되는 잉여노동력이 도시화와 경제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보았다. 그의 잉여노동모델은 개발도상국의 공업화 정책에 큰 영향을 줬다.

그의 주장에 맞게 한국은 도시화와 경제성장이 동시에 진행됐다.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경제 성장은 지속하지 않는 데 있다. 루이스는 언젠가는 도시로 일하러 올 농촌의 남아도는 잉여노동력이 없어지고, 임금은 상승하며, 성장률은 낮아지게 되는 시점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게 바로 ‘루이스 전환점’이다. 그는 이 시점에도 저임금 노동력에만 의존하는 국가는 후퇴의 길을 걷게 된다고 경고했다. 한국은 1980년대 말 이미 루이스의 전환점을 겪었고, 중국은 2010년 그 전환점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루이스 전환점’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임금 노동력만 고수하는 경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보자. 여전히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의존성은 높고, 산업의 라이프 사이클에 순응한 새로운 산업의 발굴과 지원은 부재하다. 미숙한 구조조정과 노동개혁 실패로 루이스 전환점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지도 의문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고급인력들은 고용시장에서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으로 헤맨다. 취업난에 따른 하향 지원으로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저임금에 대한 의존성은 여전히 높다. 더구나 국가경제를 견인하는 조선·철강·자동차 산업이 선·후진국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 상태로 위협받고 있다. 수출의 70% 이상을 신흥·개도국에 의존하는 수출 구조와 머잖아 인구 절벽과 소비절벽이 예상되는 현실은 한국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루이스는 진정한 경제 성장은 양적 성장이 아닌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함께 잘 살자는 그의 개발과 경제성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눈을 중국으로 돌려보자. 중국의 도시화는 루이스의 이론을 따른 것이었다. 경제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도시 거주자가 농촌 거주자 보다 1.5배에서 3배 정도 생활 수준이 높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유자적한 농촌에서 소소한 삶의 가치를 택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경제적 차원에서 도시가 강력한 성장엔진이 된다는 것이다. 인구가 밀집하면 나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규모의 경제, 노동의 전문화, 지식의 확산, 교역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 특히 기술의 발전과 함께 생산성 향상은 네크워크 효과로 강화된다. 도시의 인구 밀집이 더 많은 사회·경제적 상호작용을 제공하는 것이 도시화와 경제 성장의 근거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도시화율이 낮은 중국은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이동을 국가 전략으로 기획했다. 그동안 중국은 투자와 수출 주도로 경제 성장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 부문의 저축은 과잉 상태였고 내수는 부진했다. 국내총생산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턱없이 낮았다. 중국의 도시화 진전은 새로운 소비시장을 건설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내수 부족과 투자·수출 과잉의 대외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순기능을 할 것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가능하다. 산업화시대의 도시들은 제조업 생산으로 인해 번영했다. 오늘날의 번영하는 대도시들은 도시가 제공하는 우수한 서비스로 번영한다. 미술, 연극, 요리, 패션, 그리고 매력이 넘치는 남녀로 이루어진 결혼 시장으로서 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사람들이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이러한 소비 도시는 번영한다. 물론 논박은 여전하다. 일각에선 과거 브라질이나 멕시코도 경제성장 동력으로 도시화를 추진했지만 오히려 도시 빈곤층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도시로 흘러들어오는 인구를 뒷받침할 만한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다면 사회 불안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대답한다.

도시로 몰리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저개발 비도시 지역에 계속 머물러 살도록 그곳에 기업을 유치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게 진정 효과가 있을까요. 비싼 건축물을 그곳에 지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시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도시에 빈민이 많은 것은 도시가 빈민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루이스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람에 따라 빈곤하더라도 도시에서 빈곤한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루이스처럼 도시의 성장은 시골의 가난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주장을 지속한다. 리우데자네이루나 캘커타, 뭄바이 같은 대도시의 빈곤은 뉴욕이나 도쿄, 런던의 빈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브라질이나 인도 비도시 지역의 빈곤과 비교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농촌 지역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국경을 넘어 이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 아닌가요. 대도시의 빈곤이 제아무리 끔찍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같은 나라에 있는 농촌의 빈곤 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죠. 만약 가난한 사람들의 이주로 도시 인프라에 부하가 걸리더라도, 그들을 거절하는 것보다는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도 더 정당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그의 말을 들으니 왜 가난하면서도 도시에 살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다.

도시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 중에 [도시의 승리]라는 책을 통해 도시 예찬론을 편 학자가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는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를 초대해 본격적인 논거를 들어 보자. 또한 아서 루이스 사후의 도시화 문제를 고민해 보자.

“도시가 생산적인 이유는 한국 속담과 같아요. 튼튼한 인적 자본 때문이죠. 도시에서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은 대면 접촉을 하며, 그것을 통해 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더 자주 교환되어 혁신을 일으킵니다. 도시가 제공하는 다양한 교육 기회는 일반적인 생산성 향상의 기회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시들이 번영해 온 주된 이유입니다.”

그는 도시 공간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인간에 초점을 둔다. 인간의 수요가 있은 다음에야 건물과 인프라의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투자의 우선 순위 없이 화려한 건물과 멋진 도로, 대중교통 시설에 집착해 투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도시가 인적 자본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혁신의 기회가 더 많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 설계자는 어떻게 인적 자본을 축적하고 그것이 도시 속에서 혁신의 기회로 확산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글레이저 교수의 주장이다. 수요 예측 없이 늘어나는 건축물들을 바라보며 건설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해서 마구 짓는 것은 후손들에게 흉물을 전해줄 뿐이라고 생각된다. 쇠퇴하는 도시의 운영자들이 도시의 기운이 쇠퇴한 것을 극복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수요가 없는 건물을 짓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수요 없는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은 도시의 쇠퇴를 가속하는 방법이지요. 그러한 자원을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낫습니다. 도시가 제공하는 편의시설도 중요하겠지만, 세계 경제 속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들이 얼마나 도시에 있는지에 의해 도시의 번영이 좌우됩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에 몰두한 아서 루이스가 말한 사회 전체의 변화란 말이 생각난다. 글레이저는 번영하는 도시에서 큰 건축물이 올라가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지, 건축물을 올리는 사실이 수요를 만들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도시에 고도 제한을 걸고 오래된 건물을 규제에 의해 남겨 두는 것은 오직 부유한 이들만이 도시에서 거주할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핵심 도심에 고층 건물들을 허용하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은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 도심에 남아 있을 수 없어요.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에 쓰는 대가족 대신 주택 구입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핵가족이, 핵가족보다는 무자녀 가정, 독신자가 도시의 핵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는 도시 개발을 제한하는 것은 부동산 가격을 높이고 그곳에서 주택 구입 여력이 없는 이들을 몰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개발 제한이 오히려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도시의 외곽으로 점점 더 밀려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재건축 고도제한 문제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는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층 건물이 초래하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시의 운영자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허가 과정, 각종 규제나 개발 제한을 줄이고 이를 단순한 요금제로 대체해야 합니다. 고층 건물이 침해하는 일조권이나 조망권은 건설업자에게 세금으로 부담하게 해야죠. 개발이익은 환수하면 됩니다.”

“혁신은 모여 있어야 더 잘 나와”


▎[도시의 승리]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가 2011년 6월 방한해 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다툼의 여지가 있기에 그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오랜 경기 침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본은 건설 투자에 목을 매었다. 고령화 속에서도 유럽의 집값은 견고한데 일본이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 주택 수급의 문제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쇠퇴하는 도시의 운영자들은 쓸데없는 운영비만 드는 건물을 철거하고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해 적은 인구라도 보다 경쟁력 있는 사람들을 유치해야 한다. 이 대목은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 질 수 있겠다. 문제는 글레이저의 국토의 균형적 발전에 관한 이론이다. 혹시 그의 주장을 듣고 화를 내지는 마시라.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

“국토 균형 발전으로 더 생산적인 기회를 만들 수 있다면야 그런 아이디어에 나도 찬성하겠습니다. 하지만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해 세제 혜택을 저개발 지역에 줘 기업을 유치하고자 한다고 했을 때 부작용은 없을까요. 대체 어떤 목적을 위해 그러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기업들이 비생산적인 교외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을수록 혁신의 기회는 사라지는 반면 기업을 저개발 지역에 묶어두기 위한 비용은 정부가 부담하게 됩니다.”

그는 가난한 지역을 돕는 것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가난한 지역에 값비싼 미술관을 짓는 것은 그 지역의 토지 가격을 높여 가난한 사람들을 그 지역에서 오히려 몰아내는 것이다. 예술에 조예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술의 전당을 만들어 주는 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라는 주장을 한다. 가난한 지역 개발에 그런 돈을 쓰는 것보다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텅 빈 흉물로 변한 지방의 공설운동장을 보면 그의 말에 한편으로 수긍이 간다. 일본에는 차가 지나지 않는 터널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사회 전체의 혁신은 글레이저나 아서 루이스나 모두 추구하는 가치다.

“혁신은 모여 있어야 더 잘 나와요. 의미 있는 지식은 그렇게 쉽게 전파되는 게 아니거든요. 다양한 산업 분야의 여러 중소기업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도시를 생각해 보세요. 실리콘 밸리 같은 도시를 왜 만들죠. 모여 있어야 경쟁하고 효율이 생기죠. 흩어지면 비효율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수많은 도시의 인재가 세계 노동 시장에 편입될 가능성은 더욱 커 보인다. 특히 신흥국의 도시는 글로벌 기업의 다양한 비즈니스 테스트 베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도시는 번영하기도 하지만 쇠퇴도 한다. 과거 몇몇 도시들은 교통이 편리해 운송비용이 낮은 지역에서 번영했다. 한때 자동차로 번성했던 디트로이트를 보면 도시의 재기가 가능할지 자못 주목된다. 그래서 도시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시장조사, 우선순위 결정, 위험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도시화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인을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스마트 그린 도시 건설 나서야

도시의 가로수 길을 걸으며 바람직한 도시화의 방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본다. 인간을 생각하는 도시화, 자연을 생각하는 도시화, 도시와 도시가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도시화, 빚지지 않고 살아가는 도시화…. 이런 슬로건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떠나 ‘지속가능한 도시화’를 우리는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낭비적인 지방재정은 문제되지만 인구의 쓸데없는 집중으로 인한 문제들도 도외시할 수 없지 않겠나.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주장도 옳지만 지속가능한 도시는 성장과 복지의 조화, 국토의 균형 발전, 도시 난개발에 따른 문제점 해소를 떠올리게 한다. 그게 아서 루이스의 사회 전체적인 변화가 아닐까. 루이스를 생각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영웅은 ‘인간과 자연과 경제’의 세 가지 축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4차 혁명 시대에는 빈민촌이나 환경오염, 교통 혼잡 등의 ‘도시병’이 없는 녹색도시 건설의 노하우를 발전시켜야 한다. 도시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원절약, 환경보호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 에너지 절약을 강화하고 환경 파괴를 줄여 에너지 절약과 오염 감축에 유리한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정보화와 기술 발전을 활용해 스마트 그린 도시 건설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빌딩, 교통, 물류, 보안 같은 도시행정이나 교육, 복지 인프라에 사물인터넷(IoT)이 접목된 스마트시티는 폭발적인 수요가 기대되는 분야다. 선진국의 대도시 인구 증가와 신흥국의 급속한 도시화로 세계 스마트시티 시장은 연평균 두 자리 수로 성장할 전망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여전히 우리를 고심하게 한다. 밀집된 높은 콘크리트 건물과 도시의 아스팔트 도로보다도 더 친환경적인 것은 찾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교외에서 ‘자연과 함께’ 살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 중에는 환경 파괴도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1인당 더 적은 면적에서 더 적은 냉난방비와 오염 물질을 배출하면서 더 건강하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진정으로 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살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한다. 전원생활의 목가적인 낭만을 노래하고 가르치는 것은 환경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사실 아직은 급진적으로 들린다.

다만, 이 말만은 기억하고 싶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변용해 글을 마친다. ‘성공하는 도시들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실패하는 도시들의 모습은 모두 엇비슷하다.’

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이 있다.

1370호 (201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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