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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8) | 현종과 강감찬] 보스도 참모도, 홀로 빛날 수는 없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고려 현종 볼품없는 강감찬 발탁해 중책 맡겨 … 훌륭한 보스·참모는 상호작용의 결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강감찬 장군 동상.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이 역을 지나치지만 낙성대가 어떤 곳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문 편이다. ‘별이 떨어진 집터((落星垈)’라는 뜻의 이곳은 거란과의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의 출생지다. 큰 별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 훗날 송나라의 사신도 강감찬을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않은지가 오래되었는데 이제 보니 여기에 와 계시는구려”라고 했다고 한다. 북두칠성의 하나인 문곡성은 학문을 관장하는 별로, 강감찬은 그 별의 기운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탄생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낙성대라는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다. 우리는 강감찬을 무인(武人)이라고 생각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도 뛰어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물론 그가 상원수(上元帥)로서 총사령관을 맡았으니 ‘장군’이라는 호칭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곡성에 비유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어디까지나 문신(文臣)이었다. 문과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고 뛰어난 학문을 가진 사람만 임명된다는 한림학사와 국자좨주를 거쳤다. 이부와 예부 등 내정과 교육, 외교를 담당하는 부처에 주로 재직했다. 이런 강감찬이 우리 역사의 삼대 대첩에 포함될 정도의 큰 무공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 출신

우선 문신이 최고 지휘관을 맡은 일 자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고려건 조선이건 문신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군령권은 문신에게 주어져 왔다. 전쟁의 국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효과적인 전략 전술을 입안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지략이 뛰어난 문신을 선호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군사업무를 알지 못하고 전장의 특성을 겪어보지 못한 문신이 지휘를 맡는다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 문신에게 전쟁을 책임지게 하고 승리를 기대하려면 평소에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종이 강감찬을 서경유수에 임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서경(평양)은 고려 북방의 요충지로 해당 고을의 수령인 서경유수는 국경 방위군 중 주요 병력을 직접 지휘한다. 즉위한 직후에 거란의 침입(1010년, 2차 침입)을 겪었던 현종은 거란의 움직임이 다시 심상치 않자 강감찬을 파견해 현장을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범하자(3차 침입) 현종은 강감찬에게 전권을 주고 적을 격퇴하도록 했는데, 서경에서의 경험이 소중한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흥화진에서 일격을 가한 강감찬은 귀주(평안북도 구성)에서 거란군을 몰살시키다시피 했는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종은 강감찬의 어떠한 점을 보고 그를 발탁해 중임을 맡긴 것일까.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했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체격과 용모가 작고 초라했고 입고다니는 옷은 때가 끼고 해져 있어 주위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다. 강감찬을 무조건 못마땅하게 여겨 참소하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현종 역시 자칫 선입견 속에서 강감찬이란 인물을 사장시켜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빛나는 자질과 능력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강감찬이 처음 현종의 주목을 받은 것은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이 일어나면서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고려군 총사령관인 강조가 포로로 잡히는 등 거란군의 기세가 막강하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항복할 것을 주청했다고 한다. 강감찬 만이 단호하게 반대하며 응전할 계책을 올렸는데, 이때부터 현종은 강감찬을 눈여겨봤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현종이 “경술년(1010년)에 오랑캐의 전란(戰亂)이 있어서 적들이 한강 기슭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다.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강감찬은 국정 전반에 관한 다양한 건의를 올려 실행시켰는데, 특히 국방 문제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보였다. 이 점을 높이 산 현종은 강감찬에게 차례로 요직을 맡기며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부여했고 강감찬도 그 기대에 부응한다.

현종은 주위의 공격과 질시로부터도 강감찬을 철저히 보호했다. 볼품없이 생겨 깔보았던 강감찬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 사람도 늘어났을 법하다. 때문에 강감찬을 모함하고 탄핵하는 상소들이 이어졌지만 그에 대한 현종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1012년 감찰어사 이인택이 강감찬을 탄핵하자 오히려 이인택을 파직할 정도였다.

임금과 신하가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 관계

이처럼 현종의 깊은 지우를 받은 덕분에 강감찬은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고,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내는 것으로 보답했다. 귀주대첩 후에도 강감찬은 국가를 위해 불철주야 헌신하였는데, “조정에 나와 큰 일에 임할 때마다 위대한 계책을 내어 굳건하게 나라의 주석이 되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강감찬은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했지만 현종이 궤장을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강감찬에게는 고려의 최고명예직이자 임금의 수석고문인 태위(太尉)·태부(太傅)·태사(太師)의 직이 차례로 더해졌고, 1030년에는 수상인 문하시중까지 맡았다. 그리고 1032년(덕종 원년), 그의 주군인 현종이 승하한 직후 그 역시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강감찬과 현종의 사례는 임금과 신하가 보여줄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임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아니 천시받기까지 하던 신하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보호하며 키워주었다. 신하를 훈련시키고 최적의 임무를 맡김으로써 최상의 성과를 이끌어냈다. 신하도 이러한 임금의 지원과 격려의 토대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부족함이 있었다면 귀주대첩이라는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승리도, ‘낙성대’라는 이름도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임금과 신하, 보스와 참모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혼자만의 힘으로, 혼자 빛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훌륭한 보스를 모셔야 하고 훌륭한 참모를 곁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훌륭함’이라는 것, 이것은 상호작용의 결과다. 참모의 뛰어난 재능을 진정으로 뛰어나게 만들어주는 것. 임금의 탁월한 안목을 진정으로 탁월하게 만들어주는 것. 스스로 증명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노력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74호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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