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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9) | 최충과 문종] 참모 파격 예우하면 충성 부하 저절로 생겨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문종, 최충 극진 대우하면서 자손에도 관직 수여 … 부하들의 롤모델 될 수 있는 참모 적극 키워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해동공자로 불린 고려시대 명재상 최충. / 사진:중앙포토
‘해동공자(海東孔子)’, 한반도의 공자라고 불린 이가 있다. 뛰어난 경륜으로 고려의 번영을 이끌었던 명재상 최충(崔沖, 984~1068)이다. 물론 이 호칭은 그가 모든 면에서 공자에 비견될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학문과 인품이 훌륭했다고는 하나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와 같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충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바 있는데, 그 규모가 3000명의 문도(門徒)를 거느린 공자에 필적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최충은 왜 직접 학교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매진했던 것일까. 성종 때 최승로가 ‘시무28조’를 통해 유교적 이상과 통치이념을 제시한 이래, 많은 유학자가 그것을 완수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임금(목종)이 시해되고 거란의 침입을 세 차례나 겪는 등 극심한 내우외환을 만나게 되면서 혼란은 계속됐다. 고려가 국가로서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가동하게 된 것은 건국한 지 100여 년이 지나서였다. 현종 이후 덕종과 정종, 문종 등 훌륭한 군주들이 연이어 보위를 이으면서 제도를 개선하고 국방을 강화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킨 것이다. 특히 문종은 형법과 조세제도, 지방통치체제를 완비하여 중앙집권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했고, 거듭된 여진의 침략을 모두 격퇴하는 등 군사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학문과 예술 등 문화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고려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최충을 처음 공자에 비유한 것도 바로 문종이다. 문종은 즉위와 함께 최충을 문하시중(수상)에 임명하고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문종 대에 확립된 법과 제도, 문종이 시행한 개혁은 대부분 최충의 손을 거치게 된다. 문종은 최충을 최상의 예로 대우했는데 그의 공을 예찬하고 포창(褒彰)하는 교서를 여러 차례 내렸으며 자손들에게도 관직을 주고 승진시켰다. 이는 최충이 훌륭한 신하여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왕에게 충성을 바치면 본인에게 영예가 갈 뿐만 아니라 집안과 자손까지 영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문종은 최충의 사례를 모범으로 제시하며 다른 신하들을 독려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문종, 중앙집권국가 기틀 확립


▎고려시대 [아집도 대련]의 일부.
이 점은 최충이 죽었을 때 내린 문종의 추모 교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종은 최충이 “재상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벼슬하는 자손들에게 경사(慶事)를 남겼다”고 표현했다. (이하 인용은 모두 [고려사] ‘최충열전’임) 최충이 높은 자리에 오른 덕택에 자손들도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뒤집어 보면 최충을 재상에 임명한 문종 자신의 공치사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충이 임금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 덕분에 이처럼 큰 영광을 누렸으니 최충의 자식들도, 그리고 다른 신하들도 이를 본받으라는 의미다. 한 연구에 따르면 문종은 신하들의 공을 우대하고 표창하는 교서를 자주 내렸는데 그들의 후손에 대한 우대도 포함했다. 이는 미래의 충군애국 가문과 신하 양성까지 고려한 조치라는 것이다(홍기표, [고려 문종의 국정운영]).

아무튼 최충은 문종을 충실히 보좌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이 과정에서 인재의 부족을 절감했던 것 같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급하고, 눈앞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느라 인재 육성의 우선순위는 뒤로 미뤄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시험 합격자의 질은 저하되고 관리로서의 소양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고 좋은 정책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차질 없이 운용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최충은 자신이 다듬은 제도들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그 취지를 온전히 구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원래는 국립대학 격이었던 국자감(國子監)이 인재의 인큐베이터와 공급처가 되어야 하겠지만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최충은 자신이라도 직접 나서서 인재를 육성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에 최충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키워내기 위해 70세가 되던 해인 문종 7년(1053) 은퇴를 청원했다. [예기]의 ‘곡례(曲禮)’ 편에 ‘대부는 칠십 세가 되면 일을 그만둔다’고 하였으니 예법에 따라 자신도 사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종은 사표수리를 거절하며 “시중 최충은 유학의 대가이며 덕이 높은 이 땅의 어른이다. 지금 비록 늙었음을 이유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나 차마 윤허할 수가 없다. 옛 법도를 살펴 계속 정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최충만한 신하가 없었던 점도 있었겠지만 문신의 영수로서 고려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던 최충의 권위와 협조가 여전히 유용했기 때문이다.

최충의 학교를 통해 신하 배출

하지만 최충은 거듭해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문종은 일선에서만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이때 문종은 최충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평소 경의 언행은 백성들이 따라 본받는 규범이 되어 왔는데 이제 백성들의 스승이 되었으니 지극히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지 않는다면 어찌 이름 붙이기 어려울 정도의 그 큰 덕을 표창할 수 있겠는가. 경을 최고의 품계로 올리고 최고의 반열에 앉힘으로써 영예를 드높이고자 한다 …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은 재상이 힘써해야 하는 것이니 경이 힘써주어야 할 바이다. 경은 천하를 다스리는 책략을 힘써 베풀어 국운을 융성하게 하고 왕실을 편안하게 하라.”

최충이 사람을 키워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 백성의 스승으로서 권위를 높일 수 있도록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것이고, 비록 일상적인 정무에서는 은퇴하도록 허락하지만 수석 재상으로서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달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종의 간곡한 당부 덕분에 최충은 이후에도 국가의 중대사를 자문하며 문종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계에서 퇴진한 최충은 처음에는 집에서 “젊은 선비들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쳤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학도들이 줄지어 모여들어 넘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교육을 위해 학업 단계별로 9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구재학당(九齋學堂)’이다. 최충의 학교를 두고 과거 급제를 위한 입시 위주의 교육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학교의 설립 목적 자체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의 양성에 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적절치 않다. 실제로 최충의 학교를 통해서 훌륭한 신하들이 배출되었고, 학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고려 사회 전반에 면학 분위기가 만들어진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최충은 이후 15년 동안 오로지 교육에만 매진하다가 문종 22년(1068)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는데, 죽기 직전까지도 강단을 지켰다고 한다. 문종 역시 최충의 학교에 대해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양질의 관리는 누구보다 임금인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종은 높은 예우를 토대로 참모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훌륭한 신하와 미래의 훌륭한 신하를 함께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75호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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