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0) | 이자연과 문종, 이자겸과 인종] 보스에 따라 엇갈리는 신하의 운명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이자연, 문종의 다스림 속 명신 평가…손자 이자겸은 인종의 방치 탓에 역신으로 악명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고려 문벌귀족의 생활을 그린 '아집도(雅集圖)'. 고려 후기 제작. / 사진:호암미술관 소장
비슷한 점이 많았으나 상반되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할아버지와 손자가 있다. 인주이씨(仁州李氏) 집안의 이자연(李子淵, 1003~1061년)과 이자겸(李資謙, 생년미상~1126년)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모두 머리가 좋았고 외척이라는 후광을 입었다. 자신과 가문의 영달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딸을 세 명이나 임금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명신(名臣)으로 평가받는 할아버지 이자연과 달리 손자 이자겸은 역신(逆臣)으로 불린다. 어떻게 된 일일까.

현종 15년 1025년, 과거에 급제한 이자연은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거듭했다. 본인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현종의 왕비이자 덕종과 정종의 모친인 원성왕후, 역시 현종의 왕비이자 문종의 모친인 원혜왕후가 그의 외사촌 누이였다. 하지만 이자연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선 그는 문종이 보위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다. 문종이 왕재(王才)를 가졌다고는 하나, 선왕인 정종이 자기 아들을 제쳐두고 이복동생인 그에게 자발적으로 왕위를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정계의 실력자였던 이자연이 문종을 지지하는 등 문종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내린 판단으로 보인다.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추측에 불과하지만 정종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죽음이 분명치 않은 것을 두고 문종 측에게 제거 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종의 셋째, 넷째 아들은 우대를 받았는데, 이는 문종의 정권이 안정되고 더 이상 문종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문종을 보위에 올린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에게 출가시키면서 권력의 정점을 찍는다. 임금의 장인으로 조정의 중심이 되었고 수상인 문하시중도 역임했다. 하지만 이자연은 권력에 취해 잡음을 일으키거나 도리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종을 충실히 보좌했고 왕실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그가 최충과 더불어 문종의 치세를 지탱한 양대 축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고려사] 이자연전’을 보면 그는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고 관리의 기강을 엄격히 하며,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인재를 발굴하고 선발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부역으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신(名臣)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자연, 문종 보필에 책임 다해

물론 이자연이 모든 면에서 본받을만한 신하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청렴이나 겸손이라는 단어가 주어지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딸을 세 명이나 임금에게 보냈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한 명이 아닌 세 명을 보냈다는 것은 왕비와 후궁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다른 외척의 부상을 막겠다는 의도다). 다만 신하로서의 선을 지키며 문종을 보필하는 일 만큼은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 군주를 위해 자신 역시 최선의 노력으로 보답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자연의 태도는 그의 보스가 다름 아닌 문종이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은 고려 왕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명군으로 신하를 관리하는 데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어리석지 않다면 이런 임금 밑에서 허투룬 짓을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마도 이자연은 그럴 생각조차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문종도 놓친 부분이 있었다. 이자연은 아들이 왕사(王師, 승려 중 최고 지위), 손자가 승통(僧統, 왕사의 다음 지위)이었을 정도로 불교 교단과 매우 밀접했다. 이자연의 아들 혜덕왕사 소현은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호불(好佛) 군주였던 문종의 방임으로 불교계에 대한 이자연 가문의 영향력은 매우 커져버렸다. 이어서 살펴 볼 이자겸이 불교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래서다.

이자연의 손자이자 순종의 처남이었던 이자겸은 덕분에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순종이 죽은 후 누이가 궁노비와 사통하다 발각되었고, 이자겸도 이 일에 연좌돼 해임 당한다.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예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인데, 이자겸이 인주이씨 가문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문신의 영수였던 최사추(崔思諏, 최충의 손자)의 사위여서다. 예종은 이자겸을 통해 두 유력가문의 힘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자겸은 예종의 재위기간 동안 고위직을 두루 거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예종 역시 뛰어난 임금인데다가 외척이 발호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예종이 죽음을 앞두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예종의 아들이자 이자겸의 외손자인 인종은 당시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예종의 동생들이 호시탐탐 옥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예종은 이자겸에게 인종을 부탁하는 유조(遺詔)를 내렸고, 그는 필사적으로 이들을 막아내 인종을 왕위에 올린다. 그리고 인종에게 반기를 들었던 왕족과 귀족, 관료들을 모두 숙청했다. 또한 이자겸은 다른 외척세력의 탄생을 차단하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인종의 입장에서는 외할아버지가 장인이 되고 이모가 부인이 된 셈으로, 이 일로 인해 그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이후 이자겸의 독재체제가 구축되고 불교계 역시 이자겸과 밀착되면서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자겸은 점점 오만해지고 타락해갔는데,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행동하며 참람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와 그의 일가가 부정부패를 일삼고 전횡을 휘두른 탓에 백성들의 원성도 하늘을 찔렀다. 문제는 인종이 이러한 이자겸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조부이자 빙장이며 1등공신인 이자겸을 제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견책하는 말 한마디 내리지 않고 방치하다 보니 사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도저히 참다못해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시도하기는 했지만 준비도 없이 일을 벌인 탓에 역효과만 났다. 인종의 측근들은 도륙되었고, 인종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 왕위를 선양하겠다며 이자겸에게 통사정을 해야 했다. 이자겸의 눈에 임금이 임금답게 비춰졌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자겸이 왕실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 주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자겸, 무소불위 권력 휘둘러

이자연과 이자겸의 사례는 비슷한 능력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보스를 만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올바른 생각과 언행이겠지만, 상대방으로 인해 끄집어 내지고 발현되는 나의 모습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보스를 선택할 때도 나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인가, 혹시라도 나의 단점을 악화시킬 사람은 아닌가, 내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뒷이야기 하나. 오만함이 지나쳐 결국 반란까지 일으키게 된 이자겸은 실각한 후에 전남 영광 법성포로 유배를 갔다. 여기서 그는 해풍에 말린 생선을 접했는데 그 맛이 좋다며 ‘자신은 결코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굴비(屈非)’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지만.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76호 (2017.03.20)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