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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1) | 묘청과 김부식 그리고 인종] 참모 갈등 방치한 보스, 결과는 ‘파국’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인종, 묘청과 김부식 사이에서 오락가락 … 힘의 균형 도모하면서도 화합 이루도록 유도해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김부식 초상.
“만일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했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했을 것이니, 이 전역(戰域,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일찍이 단재 신채호가 우리 역사상 가장 통탄할 만한 사건으로 꼽았던 묘청의 서경(西京, 평양) 천도 운동 실패. [고려사]에 ‘묘청의 반란’으로 기록된 이 사건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신채호는 묘청으로 대표되는 세력과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세력의 대립을 각각 ‘낭가(郞家) 대 유가(儒家),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대결로 표현하고 묘청의 패배를 자주민족주의의 좌절로 바라보았다. 이에 비해 [고려사]를 비롯한 정사(正史)는 묘청 일파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임금인 인종을 현혹시켰고 뜻대로 되지 않자 역모를 일으킨 것으로 설명한다.

둘 중 어떤 견해가 옳은지는 현재에도 논란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번 글에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떤 입장에서든지 인종의 두 참모였던 묘청(妙淸, ?~1135)과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그리고 이들의 배후가 된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다. 또한 그 과정에서 리더인 인종이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점이 문제인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묘청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인종 6년(1128년)이다. 당시 고려 조정은 이자겸의 반란(1126년)과 척준경의 전횡(1127년)을 겪으면서 혼란에 빠져있었다. 북방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금나라가 고려를 압박하는 등 외부로부터의 위기도 계속됐다. 승려였던 묘청은 이와 같은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했는데, 개경의 기운이 쇠한 탓에 위기가 계속되는 것이니 왕기(王氣)가 강한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국가를 일신하자는 것이었다.

인종과 묘청, 서경 천도에 의기투합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묘청의 동상.
묘청의 주장은 서경 출신 귀족과 관리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서경을 중시하라는 유훈을 내렸을 정도로 고려에 있어 서경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국경 안보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 개경의 귀족들이 보기에는 그저 변방 도시일 따름이었다. 서경 사람들 역시 시골뜨기 취급을 받았다. 개경의 괄시에 반감이 있던 서경 출신들로서는 도읍을 옮기자는 묘청의 비전이 무척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서경 출신은 아니지만 기득권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도 묘청을 지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름 아닌 국왕 인종이다. 인종은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발호와 역모를 겪으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하들의 무기력한 대응을 보면서 개경 귀족들에게 실망하게 된다. 도읍을 옮기는 일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래서였다. 천도는 중앙권력의 무대를 아예 바꿔버림으로써 기존 세력을 억누르고 새로운 세력을 육성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묘청은 음양의 술법(천문지리와 점술을 연구해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것)과 풍수 이론을 내세우며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주장해 나갔는데 이러한 묘청의 주장에 빠져든 일부 신하들은 단체로 “묘청은 성인(聖人)이니 국가의 일을 일일이 그에게 자문한 후에 시행하소서. 묘청이 진언하고 간정하는 바를 모두 받아들인다면 곧 정치가 성공하고 나라를 길이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의를 올릴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거센 반발이 일어난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묘청이 삿된 술수를 내세운 사기꾼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는데 일찍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고, 이자겸의 패권에 홀로 맞서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묘청이 혹세무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유학자였던 그의 눈에 음양과 풍수의 설도 이단으로 비쳤을 것이다.

여기에 묘청의 비현실적인 주장이 기름을 붓게 되는데, 묘청은 서경에 궁궐을 세워 임금의 거처를 옮기고 고려가 황제국을 칭하기만 하면 자연히 천하를 아우르게 되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주변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설령 그 의도가 국가의 자주 의지를 천명하자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시 고려의 국력이나 국제정세상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말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묘청의 주장을 비판했지만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경에 새 궁궐을 짓도록 한다. 인종 7년(1129년) 궁궐이 완공되자 직접 행차하기도 했다.

그러자 김부식을 필두로 조정 신료들은 묘청을 강하게 공격했고 인종은 한 발 물러난다. 이 와중에 묘청은 무리수를 두었는데, 상서로운 징조를 조작하는 사기극을 벌이다가 들통이 나는가 하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이 닥친다며 지나치게 왕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장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종 13년(1135년) “개경 귀족들이 자신들의 고토(古土)만을 생각해 천도를 주저할 뿐 아니라 사업을 가로막고 방해한다”고 비난하며 왕명을 사칭해 군사를 일으켰다. 묘청은 중앙에서 부임한 서경의 관리들을 위시해 서경에 머무르고 있던 개경 출신들을 귀천(貴賤)과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모두 구금했는데, 거병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개경 세력과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립이 극심했음을 보여준다.

묘청이 정변을 일으키자 인종은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진압을 명령했다. 토벌군을 맞이한 서경 사람들은 이내 묘청의 목을 베어 바치며 항복했다. 하지만 토벌군이 위로하거나 달래지 않아 분노한 서경 사람들은 재차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햇수로 2년이 지나서야 겨우 평정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도 개경과 서경의 심각한 갈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인종 스스로 세력 균형 무너뜨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된 데에는 누구보다 인종의 책임이 컸다. 인종은 묘청과 김부식 두 사람 간의 견해 차이와 갈등을 조율해주지 않았다. 양측의 주장을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게 하거나 타당성 여부를 판정해준 적도 없다.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대립도 모른 척했다. 두 세력의 화합을 이끌어내고 의견차를 좁히도록 하는 어떠한 조치도 행한 적이 없다. 물론 갈등을 적절히 조장함으로써 서로 견제하게 하고 힘의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방치하면서 파국을 불러오게 된다.

또한 인종은 한 쪽에 전적으로 힘을 몰아주었다가 다시 순식간에 빼앗는 형태를 취했다. 초반에는 서경 세력의 말만 듣다가 어느 순간 개경 세력이 하자는 대로만 한 것이다. 인종 스스로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셈으로, 이런 구도 안에서 각 세력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의 전멸을 바랄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인종에게도 손해였는데, 묘청의 거병이 진압된 후 인종은 체포된 주요 인사들의 포박을 풀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노고를 위로하는 등 서경 세력의 붕괴를 막고자 했지만 개경 세력의 반발로 철회했다. 이후 인종은 개경 귀족을 견제할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77호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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