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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골프장 변천사]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국내 최초 18홀 개장 

 

남화영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편집장
영친왕이 자금 대고 1930년 완공 … 현재는 서울에 골프장 한 곳도 없어

▎1920년대 효창원에서 골프하던 모습.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을 타임머신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군데군데 골프장이 나온다.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 18홀 코스가 들어섰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친환경적인 코스도 시도되기도 했다. 90여 년의 서울 골프장 변천사를 들여다 본다.

초창기는 일제 문화정치의 산물


▎65년 군자리 서울CC에서 골프하는 사람들.
한반도에서 최초의 골프 코스는 1897년 원산의 영국인 조계(租界 :치외법권 지역)에 조성된 6홀 코스였다. 그 뒤로 원산과 황해도 인근 구미포에는 언더우드 등 외국 선교사들이 만든 골프장 세 곳이 존재했으나,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무단정치를 시작하면서 사라졌다.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돌아섰다. 골프는 이 무렵 서울에 처음 들어왔다. ‘클럽’의 일본식 표현인 ‘구락부(俱樂部)’에서 벌이는 일본인, 친일파, 외교사절이 어울리는 사치스런 풍류로 골프가 시작한 것이다.

이용도 측면에서 보자면 골프는 제국주의 국가의 대표적인 식민지 지배의 수단이면서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역(용산, 청량리)을 중심으로 코스가 조성됐다. 또한 조선 왕릉(효창원, 의릉, 유릉)의 수림을 해치면서 효창원이나 청량리, 군자리 등 왕실 소유의 능원에 코스가 들어섰다. 사회·역사적 의미로 평가하면 골프는 조선의 전통 문화를 없애고 근대 문물을 입히는 통치 일환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921년 효창원(오늘날 효창공원)에 9홀 골프장이 만들어졌다. 설계가는 영국인 H. E. 던트였다. 6홀을 만든 뒤에 3개 홀을 추가해 1921년 9홀(2123m) 규모로 개장했다. 하지만 코스 밖으로 날아간 아웃오브바운즈(OB) 볼로 인해 골퍼와 행인 간에 다툼도 잦았다. 4년 뒤 청량리로 골프장이 이전하면서 효창원은 공원으로 바뀐다. 총독부는 24년 6월에 공중화장실을 만들고 공원을 공개했다.

3년 뒤인 1924년 만주철도와 조선호텔에서 돈을 댄 16홀의 청량리 코스가 제1회 일본아마추어 선수권 우승자인 이노우에에 의해 만들어진다. 부지가 좁아서 16번 홀까지 마친 뒤에 1~2번 홀을 한 번 더 도는 변칙 18홀 시스템이었다. 현재 성북구 석관 2동에 있는 의릉(懿陵)과 한국종합예술학교 부지가 예전 청량리 골프장이었다. 이후 골프 인구가 꾸준히 늘자 코스의 필요성이 증가했고, 영친왕이 결국 자금을 대어 군자동의 유릉 즉, 현재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경성골프구락부(GC)가 착공 1년만인 1930년에 한국의 최초 18홀 코스(파69 5527m)로 개장했다. 하지만 한 세월을 영원히 누릴 것 같던 이곳도 일제 말기에 폐장되어 군인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서울 각지에 생겨난 골프장들


해방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군자리 코스 안에 들어와 살던 빈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골프장을 복원했다. 한국의 최초 프로골퍼인 연덕춘을 시켜 부랴부랴 골프장을 복원했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년여 뒤인 1954년 군자리 코스를 재개장하면서 본래 모습을 되찾았고 이름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바꾸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에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왜 그렇게 골프장 건설을 서둘렀을까. 그것도 해외 구호자금을 담당하던 이순용 외자청장을 골프장 대표로 임명해가면서까지 말이다. 당시 이 대통령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고위 장교들이 주말이면 일본으로 골프 휴가를 떠나는 것을 염려했다. 북한이 언제 다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주한 미군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골프장 재건을 서둘렀던 것이다. 1970년대까지 생겨난 서울 안의 코스는 서울CC, 태릉CC, 관악CC, 용산의 미8군 코스, 뚝섬의 마사골프장이었다.

시대 구분을 하자면 한국의 골프 1세대는 한국전쟁 뒤 군자리 서울CC가 재건된 1954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다. 전국에 골퍼라고 해봤자 500명 미만이었다. 당시 골퍼는 5개의 서울 내외 골프장을 하루 생활권에 두었다. 서울에 위치했던 곳은 서울CC와 현재 서울대학교 자리의 관악CC, 서울 근교는 고양시의 한양CC, 뉴코리아CC, 군포의 안양CC가 있었다.

6~8대 대한골프협회(KGA) 회장을 지냈고, 초대 한국골프장경영협회 회장과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장을 역임한 허정구 삼양 회장은 아침 일찍 9홀을 돌고 출근하거나 퇴근 후에 9홀을 돌았다고 한다. 우승섭 전 KGA 경기위원장은 “안양과 서울CC 두 곳에서 하루 36홀 친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70년대 초 유신헌법이 발효되고 새마을운동으로 산업화가 본격화하던 시기에 서울 시내에 위치했던 서울CC와 관악CC는 서울 외곽으로 내쫓긴다. 당시 국가 요직의 극소수 엘리트가 골프장에서 모이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못마땅해 했다는 설도 있다.

서울CC는 국내 최초의 아마추어 대회, 프로골프 대회가 시작되었으나 유신헌법으로 살벌하던 제3 공화국 시절인 1972년에 경기도 고양의 한양CC로 옮겨가게 되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64년 개장한 한양CC는 이때부터 서울CC와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운영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CC 회원들이 이용할 때 깃발에는 애초 구락부 형태로 시작된 설립연도(1930년)를 지금도 쓰고 있다.

한편, 미군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서울CC 외에 미8군 용산 코스에서 라운드를 즐겼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1년 6월, 33년 만에 폐쇄되면서 송파의 남성대 골프장 옆으로 이전해 성남CC가 되었다. 이전한 자리에는 이듬해 11월 용산가족공원이 들어섰다. 과천 서울 경마공원은 현재 주로(走路) 내에 가족공원이 조성되어 있지만, 1988년까지 36년간 운영되던 뚝섬 경마장 시절에는 그 안에 7홀 규모의 뚝섬 골프장이 있었고, 과천으로 경마장이 이전한 뒤에도 1994년까지 골프장은 그대로 유지됐다. 경마장과 골프장이 함께 있는 형태는 골프 발상지인 영국의 초창기 골프장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린피 1만원, 캐디피 5000원으로 저렴해 인기가 높았다. 개장 당시 44타석 연습장과 파5, 4, 3홀을 두고 부대시설로 2층 규모의 클럽 하우스를 운영했다. 1981년에는 골프 전용 잔디로 교체하면서 완전한 퍼블릭 코스로 변모했다. 당시 뚝섬의 마사골프장은 한강을 낀 도심에 위치해 골퍼에게 인기가 높았다. 1981년 송파에 들어선 남성대골프장은 위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2011년 여주 그랜드CC로 옮겨가게 됐다.

스크린 골프, 서울 도심 점령


▎1. 현재 서울대는 예전엔 관악CC 골프장 자리였다. / 2. 군자리코스 대공원 항공 컷. 1972년 골프장으로 바뀌던 당시의 서울CC. / 3. 난지도는 저렴한 대중 골프장으로 인기 높았으나 지금은 하늘 공원이 됐다. / 4. 난지도는 한강을 내려다보는 서울 도심 골프장이었다. / 5. 뚝섬 코스는 1994년 없어지고 공원으로 바뀌었다. / 6. 남성대는 타이거 라이언 코스로 나뉜 곳이었다. / 7. 남성대 골프장은 라운드 중에 서울 도심이 보이는 코스였다.
국내 골퍼들이 급증한 계기는 1998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이었다. 외환위기 와중에 거둔 쾌거였던 그 사건은 박인비, 이보미, 최나연 등 오늘날 수많은 세리 키즈를 양산했다. TV 방송 정규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 나오는 애국가에까지 박세리 우승 장면이 나올 정도였다. 골프를 모르는 어린아이도 골프라는 운동이 뭔지 알게 됐다.

서울에서 골프장은 현대화와 함께 점차 도심 외곽으로 밀려났으나 2000년대 이후 IT 붐을 타고 스크린 골프와 드라이빙 레인지가 도심을 다시 점령해나갔다. 골프장 대신 소규모 연습장이 마치 닭장처럼 들어섰다. 2001년 301m를 자랑하는 쌍둥이 연습장이 송파 남성대 골프장 옆에 들어섰다. 옆으로는 퍼블릭 9홀이 들어섰다. 쓰레기 소각장이던 난지도에 9홀 골프장을 지어 한동안 운영되기도 했다. 지금은 하늘공원 자리이지만 당시 9홀 라운드에 2만~3만원이면 칠 수 있어 난지도 골프장에는 새벽부터 골퍼들이 줄서서 라운드하는 진풍경도 나왔다. 하지만 그린피 금액과 체육시설 규정을 놓고 체육진흥공단과 서울시가 몇 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가다가 끝내 2008년 6월 말 난지도 골프장은 없어지고 시민을 위한 하늘공원으로 돌아갔다.

뚝섬, 영등포에는 파3 골프장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김포공항 인근 메이필드호텔에서도 부속 시설로 파3 코스를 조성했다. 자투리땅만 있으면 연습장이 들어섰다. 영등포의 포시 파3 코스는 늦은 밤까지 불야성을 이뤘다. 목동의 골퍼에게는 여름밤에 포시 파3에서 라운드하는 게 색다른 묘미였다.

해방 이후 72년간 서울에서 골프는 급속하게 보급되었고 전국적으로 530여 개 골프장이 들어섰지만, 하지만 지금은 서울 시내에 골프장이 한 곳도 남지 않게 되었다. 태릉CC만이 아직 유일하게 군 소속 체력 단련장으로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대신 스크린 골프가 서울시내에만도 1000여 곳을 웃돈다. 골프용품을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도 회식 후 2차로 스크린 골프방을 가기도 한다. 군자리 코스가 보존되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골프가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저력을 설명하는 명소가 되었을지 모른다.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 9홀 대중골프장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또한 친환경 골프장 개발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서울 안에서도 여러 골프장이 생겼다가 당시의 정치와 경제 논리에 따라 한순간에 사라졌던 사례는 아쉽다. 골프가 단순한 레저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한국을 홍보하는 스포츠 콘텐트가 된다면, 같은 논리로 골프장이 단순한 오락시설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문화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81호 (201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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