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경준의 디지털 인문학] 빌 게이츠 딸과 부시맨 아들이 결혼한다면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경영연구원장

파리에게 고도의 지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본능으로 반응하는 파리조차도 생존과 번식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 도전과 응전의 행동패턴을 고도로 진화시켰다. 금파리의 세계에서 암컷은 짝짓기하는 동안 수컷을 잡아먹는다. 수컷은 사랑은 하고 싶으나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싶지는 않다.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은 벗어나고 싶다. 즉 타나토스 없는 에로스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수컷은 한 가지 책략을 찾아냈다. 수파리는 먹을 것을 ‘선물’로 가져온다. 암컷은 배가 고플 때 수컷이 가져온 먹이를 먹고 수컷은 위험에서 벗어난다. 그보다 진화된 파리는 수컷이 곤충 고기를 투명한 고치로 포장해 와서 더 오랫동안 사랑을 즐길 수 있다. 또 어떤 파리종은 선물 개봉시간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가져오는 포장물은 두껍고 부피가 크지만 사실은 비어있다. 암컷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이미 수컷은 용무를 끝낸 후다. 대비책으로 암컷들은 고치가 비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흔들어 본다. 수컷은 꾀를 내어 암컷이 흔들 것을 예상하고 고깃덩어리로 착각하게 하려고 자기 배설물을 적당히 담아서 선물꾸러미를 만들기도 한다. -선물,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리 수컷은 암컷을 만나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 하지만 귀중한 난자를 제공하는 대가를 기대하는 암컷에게 수컷은 자신의 몸을 바치거나 선물인 먹이를 주어야 한다. 수컷 입장에서 한 마리 암컷과 나누는 1회의 사랑보다 다수의 암컷과 나누는 수 차례의 사랑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하기에 먹이를 주고 목숨을 건지려 하지만 먹이는 수컷에게도 귀중한 자원이다. 사랑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수컷은 선물을 주거나 아니면 속임수를 써서 사랑을 하되 죽음은 면하려는 행동으로 발전하고 암컷은 속지 않으려고 대응한다.

인간 세계에서도 남녀 간의 선물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정자는 사실상 무한하고 난자는 유한하다. 또한 남녀가 자신의 유전자를 반씩 섞어서 낳은 자식을 키우기 위한 육체적·정신적 부담은 여자에게 훨씬 크다. 따라서 여자는 본능적으로 난자를 제공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선물, 즉 물질적 혜택이나 정신적 헌신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잠재된 심리는 파리처럼 노골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문화적 요소와 결부돼 훨씬 세련되게 나타난다. 적절한 언어와 몸짓을 통한 의사소통, 사회적으로 용인된 접근방식에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선물과 언약이 수반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여자는 남자의 물질적 능력, 정신적 헌신을 평가하는 과정을 거쳐 마음을 열고 사랑에 이른다.

파리와 인간의 거리는 침팬지와 인간의 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멀다. 그러나 비록 행동의 단면이지만 생명체로서 가장 기본적인 번식을 둘러싼 문제에서 놀라우리만큼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은 문화도 결국 반복되는 본능이 양식화되고 세련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문화인류학적 접근의 핵심이다. 또한 뇌 연구의 발전과 함께 급격히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진화심리학에서는 행복감과 같은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적 기제도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최적화한 결과물로 본다.

진화론의 성과를 통해 인간은 생물계의 일원이며, 유전자 분석이 발달하면서 외양과 행동의 많은 부분이 유전적 특징에 따른다고 밝혀지고 있다. 세련된 문화적 양식과 무의식적인 행동의 기저에도 생물적 본능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음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할수록 후천적으로 접하는 문화에 따라 개별적 특성이 더욱 커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입맛과 같은 개인적 취향에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 옳고 그름의 개념,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등 사회적 성향까지 태어날 당시의 유전적 요인보다 후천적인 사회·문화적 요인으로부터 더욱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 빌 게이츠와 부시맨을 생각해 보자. 빌 게이츠는 IT 혁명의 선도자, 세계적인 부자이자 자선사업가이고, 부시맨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원시부족이다. 지구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21세기라는 동일한 시간대에 살고 있는 같은 호모 사피엔스지만 이들의 격차는 크다. 게다가 이 격차는 생물학적·육체적 능력이 아니라 문화적·지적 능력에서 나온다. 걷고 뛰고 달리고 헤엄치는 육체적 능력은 부시맨이 빌 게이츠를 앞설 것이다. 부시맨의 생존은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추적하며 무기를 던져 잡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부시맨은 어릴 때부터 이런 능력을 극대화하게끔 양육됐다. 이와 달리 빌 게이츠의 성장기는 현대사회의 핵심 경쟁력인 사고하고 추상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교육이 중심이었다. 빌 게이츠가 불과 20여년의 성장기를 거치면서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기본적 동력은 개인적 능력도 있지만,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문명이 축적해온 성과를 단기간에 직·간접 교육을 통해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와 부시맨은 생물학적 DNA가 동일한 호모 사피엔스이기에 빌 게이츠의 아들과 부시맨의 딸을 결혼시킨다면 2세의 생산에 전혀 지장이 없다. 나아가 빌 게이츠의 갓난아이를 부시맨의 가정에 입양시켜 키운다면 생물학적으로는 빌 게이츠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지만 문화와 행동양식은 부시맨을 닮을 것이다. 반대로 부시맨의 갓난아이가 빌 게이츠의 가정에 입양돼 성장한다면 미국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익숙한 미국 시민이 될 것이다. 빌 게이츠의 아이와 부시맨의 아이가 결혼하거나 입양된다는 비현실적인 비유는 인류문명이 축적해온 사회· 문화적 성과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로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물학적 유전자 이외에도 문화적 유전자 ‘밈(Meme)’의 개념으로 이러한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DNA가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듯이 문화적 축적도 개인과 세대로 이어지며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 걸쳐 이러한 특성을 강하게 가진 종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하다. 인간은 언어·문화·세계관·종교가 다르면 외계인이 보기에 다른 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행동양식과 지적 역량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인간의 문명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물학적·육체적 능력보다는 문화적·지적 역량의 중요성이 커진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기업에서 전통적인 토지·노동·자본과 같은 유형자산보다 기술·특허·브랜드와 같은 무형자산이 중요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필자는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1세기 글로벌 기업과 산업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융합형 경영전문가로 평가받는다.

1398호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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