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기업이 성장의 주역임을 진실로 믿는다면 

 

황인학 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7월 27일과 28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기업인들과 청와대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참석 기업은 삼성·현대차·SK 등 자산을 기준으로 재계 순위 1위부터 15위까지였다. 이 중에 상생협력 우수 중견기업으로 추천받은 오뚜기가 참석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과 기업인의 간담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행사다. 대통령은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 기업인들은 언제나 이에 호응하는 경영계획을 전달하는 일이 어느덧 관례가 됐다.

관행이라 해도 이번 간담회에 초청받은 기업인들의 긴장감은 남달랐을 것이다. 문재인 대선 캠프의 공약 중에는 우리나라 산업조직을 대표하는 재벌 구조와 행태를 문제 삼는 내용이 특별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당수 대기업들은 지난 정권의 원칙에서 벗어난 미르 재단, K-스포츠 재단 사업에 돈을 내고 협조한 사실이 정경유착의 악습인 양 여론의 낙인까지 받은 터였다. 이러 저런 이유로 대기업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불공정·불평등의 원인이자,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더불어민주당의 플랫폼과 정책 공약이 있었다.

상황이 그런 만큼 참석 대기업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새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 어떤 경영계획을 전달할지를 놓고 어지간히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 보도를 보면, 간담회 분위기가 과거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저성장을 탈출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기업이라고 강조했다. 또 우리 기업은 기를 살려주고 신바람을 불어 넣으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며 참석한 기업인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기업인들은 일자리 창출(고용),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인다. 첫째, 왜 민간기업의 대표가 이사회가 아니고 주주총회도 아닌 정부와 대통령에게 투자와 고용 등의 경영계획을 발표해야 하는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구태의연하게 반복되고 있는데, 이 또한 적폐 청산 대상이 아닌지 재고해야 할 것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정부와 기업 사이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의 비근한 사례에서 보듯이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에게 돌아간다.

둘째, 기업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주역임을 시사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백 번 옳고 교과서적이다. 그렇다면 대기업, 특히 재벌을 적폐 청산의 개혁 대상으로 몰아가던 대선 당시의 인식이 바뀐 것인가? 이제부터는 기업의 역할과 기대에 대한 대통령의 격려를 믿고, 새 정부의 규제 리스크에 대한 걱정 없이 기업 본연의 경제활동에 매진해도 될까? 더 나아가 기업의 기를 살리고 신바람을 일으키는 정책 환경의 조성을 기대해도 되는가?

정치는 여반장(如反掌) 기술이 현란하게 구사되는 시장이다. 시간에 걸친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따라서 정책은 언제나 바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미 7월에 발표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기본 계획(국정기획자문위원회)’과 ‘새 정부의 경제정책방향(관계부처 합동)’을 보면 이번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하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앞으로 5년 동안 법인세와 준조세 부담은 늘고, 시장 거래비용이 증가하며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규제 압력에 시달리게 될 전망이다.

정책 기조의 변화 및 규제 강화에 따른 리스크 외에 우리나라 기업환경에 먹구름으로 작용하는 또 다른 변수는 기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태도이다. 정책과 제도는 목적과 수단이 옳든 그르든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다. 그리고 정치적 선택은 그것이 민의(民意)가 되었든 중우(衆愚)가 되었든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정책 선택과 규제 수요는 사회적 인식과 판단에서 파생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 국민의 반기업 정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여기서 반기업 정서는 기업인과 기업 활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핵심 원리인 경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국제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의 반기업 정서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2001년도 액센추어 보고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15년이 흘 렀지만 올 초 에 나온 에델만 신뢰지수(Edelman Trust Barometer)를 보면, 한국의 반기업 정서는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 고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대기업이 처한 상황은 정반대이다. 규제 및 정책의 공식적 제도 환경, 반기업 정서로 대변되는 비공식적 제도 환경의 양면에서 한국 대기업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알다시피 한반도는 북한의 핵폭탄 위협 등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지역이다. 기업인 간담회 둘째 날에도 북한은 올 들어 13번째 미사일(ICBM 화성-14형) 실험을 해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고 해도 우리 기업은 태생적으로 해외 기업보다 불리한 환경인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다른 모든 조건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규제와 가치관, 공식·비공식 제도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더 열악한 게 현실이다.

이렇게 정책과 인식의 측면에서 대기업의 설 자리를 좁혀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높은 법인세율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글로벌 기업이 캐나다로, 유럽으로 본사를 옮겼듯이 여기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올까. 우리나라 기업들은 창업 당시부터 기업보국(企業報國)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기업은 국경의 테두리에 갇힌 인질이 아니다. 매출과 이익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하고, 외국인 주식 지분율이 높은 글로벌 기업일수록 악화되는 제도 변화 추세에 대응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을 것이다.

기업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주역임을 진실로 믿는다면 지금의 열악한 제도 환경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고, 필요한 규제는 품질을 높이는 것만이 제도 개선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공식 제도로 분류되는 반기업 정서가 더 큰 문제이다. 반기업 정서야말로 생산적인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고, 과도한 규제 팽창을 조장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반기업 정서의 원인을 보면 기업(인)이 자초한 부분이 있고, 경제적 문맹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다. 여기서 경제적 문맹은 경제학적 개념 및 통계의 오·남용, 기업의 본질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무지와 오해, 가격 결정과 경쟁원리에 대한 몰이해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 중에서 기업(인)이 원인을 제공한 반기업 정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대기업일수록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준법경영을 넘어 기업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믿음을 주는 신뢰경영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문맹은 정부 차원의 문제 해결 노력이 긴요하다. 우리 주변을 보면, 경제 비전문가는 물론이고 정치인과 공무원, 심지어 기업인 중에도 경제적 문맹이 심각한 상황이다.

1398호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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