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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30) 광해군과 박승종] 침묵하고 자리만 지킨 죄의 무게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광해군 실정에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아 … 인조반정 때 아들과 자결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왕이 폐위되면 그를 보좌한 신하들은 어떻게 될까. 함께 몰락하거나 아니면 더 참혹한 종말을 맞게 된다. 왕을 잘못 보좌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저지른 폭정에 동참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다. 불의에 침묵한 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 구차하게 자리를 지킨 죄가 있다. 폐위가 권력투쟁의 결과라면 왕을 지키지 못한 죄도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신하로서, 참모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왕과 함께 패배자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왕과 함께 패배자로 사라져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 영의정을 지냈던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은 정적인 서인들이 쓴 실록에서도 “재주와 도량이 있는 자로 일컬어졌고 맡은 자리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피아를 막론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인조 1년 3월 14일). 그는 특히 병조판서로서 임진왜란 이후 문란해진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박승종은 무장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는데, 무신(武臣)으로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었던 이서(李曙)가 반정 직후 박승종의 시신을 나서서 수습하겠다고 청원할 정도였다(인조 1년 3월 16일).

물론 박승종은 이이첨·유희분과 더불어 ‘삼창(三昌, 세 사람이 각각 밀창부원군, 광창부원군, 문창부원군이었던 데서 생겨난 명칭)’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광해군의 핵심 측근이자 광해군의 정치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셋이 광해군의 심복이 되어 일을 꾸민 자들인데 역모와 관련된 옥사는 모두 이이첨이 꾸며낸 것이며 유희분은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아 죄를 경감시켜주는 일을 맡았으며 박승종은 궁궐을 지었다”(광해 12년 10월 17일)는 평가에서 보듯이 박승종의 죄는 다른 두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비롯하여 경덕궁(경희궁)과 인경궁을 축조하는 등 토목사업을 지나치게 남발해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이끌고 백성들에게도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는데 박승종이 바로 그 일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승종이 먼저 주장한 것도 아니고 그는 그저 임금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잘못을 간하지 않고 불의에 동참한 과오가 있을지언정 역모를 조작하고 부정청탁을 일삼은 것과 동일 선상에 놓일 수준은 아닌 것이다.

박승종은 광해군의 대표적인 과오로 지적되는 ‘폐모(廢母)’ 문제에서도 이이첨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유폐했을 때 침묵하긴 했지만(박승종의 둘째 아들 박자응은 폐모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조정의 논의에 불참했다), 이이첨의 부하 백대형이 인목대비를 살해하기 위해 서궁에 침입하자 직접 호위해 막아내는 등 대비의 안전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박승종은 서인들을 역모로 엮어 일망타진하려던 집권세력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고(광해 5년 6월 17일), 귀양간 사람이 은자(銀子)를 내면 방면해주는 제도를 제안하기도 했다(광해 13년 6월 18일). 이는 일차적으로 부족해진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이 제도의 시행을 계기로 은자를 면제해주고 이원익을 석방하도록 하는 등 유배를 간 원로대신들을 도운 바 있다. 박승종은 국가적으로 위태로운 시기라며 “덕망 있는 원로 신하를 기용하고 올곧고 능력 있는 선비들을 모두 불러들이시어 조정에서 부지런히 견고한 계책을 내도록 하라”는 상소를 올린 적도 있는데(광해 15년 1월 2일), 이 역시 여러 차례 옥사와 정쟁으로 삭탈관직 당하고 귀양을 떠난 신하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승종의 문제점은 여기서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의 상소에 대해서도 광해군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라고 묻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이이첨이 정적을 탄압하고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를 못마땅해 했으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국왕 직속의 사법기관인 의금부의 수장으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심문과 재판을 총괄하는 판의금 부사를 오래도록 역임했는데 계속 사직을 청원하며 거의 대부분을 출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그의 결근으로 업무가 지연되고 있다며 출근을 재촉했지만 병이 들었다거나 아버지가 아프다는 이유를 들며 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마음에 병이 들어 미치광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핑계를 댄 적까지 있다(광해 8년 8월 21일). 그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는 증언들을 볼 때, 그는 옥사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고 따라서 여기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간언을 올리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이겠지만, 그는 아무런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책임회피로 읽혀지는 부분이다.

목숨 건 각오에 걸맞은 결기는 없어

이후 박승종은 우의정·좌의정·영의정(광해 11년 3월 13일)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왕실과 사돈(박승종의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이라는 지위로 인해 유사시 군권을 통수하는 도체찰사에도 보임됐다. 그러자 박승종은 이번에는 아버지의 상을 치러야 한다며 출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기복출사(起復出仕,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왕명에 의해 상을 중지하고 관직에 나오도록 하는 것)를 명령했지만 나가지 않았고 녹봉도 고스란히 돌려보내며 받지 않았다(광해 12년 6월 24일). 그러다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는 등 대내외적 위기가 이어지자 수상의 책임을 방기할 수 없다며 광해군의 치세 마지막에 가서야 집무를 보는데 이 시기에도 왕에게 간언을 올리거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록에 따르면 박승종은 재상이 되어 항상 오리알 크기의 비상을 가지고 다니며 “불행한 시대를 만나 아침저녁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라 말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그렇게 목숨을 건 각오를 했다면 그만한 결기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자포자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박승종은 큰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하며 유언을 남겼다. “승종이 임금을 바른말로 간하지 못하여 오늘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중략]…죽음으로서 신명과 사람들에게 사죄하고자 한다.”(광해 15년 3월 14일). 이 때 박승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유언처럼 자신이 침묵하지 않고 간언을 올렸더라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상황이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을까?

박승종에게도 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간신으로 치부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모셨던 주군 광해군이 실패했기 때문이고, 그가 그 실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같이 광해군의 영의정이었지만 왕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극간하다 고난을 겪은 이원익·이덕형은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침묵하고 자리만 지킨 죄, 눈을 감고 외면한 죄, 임금을 모시는 신하에게는 그 죄의 무게 역시 매우 크다는 것을 박승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 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04호 (201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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