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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14) 나만의 색깔을 가졌는가?] 수컷 극락조의 깃털이 화려한 이유는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짝짓기 경쟁에서 선택받기 위한 노력의 산물...작은 아마존 독개구리의 붉은색은 경계의 표시

▎극락조 / 사진:ⓒgetty images bank
세상에 이렇게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새가 있다니! 유럽 각국이 신대륙 탐험에 나서기 시작하던 16세기, 유럽인들이 처음 본 새가 있었다. 저 먼 세상으로 나간 선원들이 가지고 온 새는 박제가 되었음에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날개와 다리가 없었다. 어찌 이런 새가 있을 수 있을까. 선원들은 자신들도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천국에서 살다가 죽으면 지상으로 떨어지는 새라고. 이른바 ‘천국의 새(Bird of paradise)’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우리에게는 극락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새다).

기독교 세상에 살던 유럽인들에게 그건 천국이 있다는 또 다른 증거였다. 화가들은 이 날개 없고 다리 없는 새를 앞다퉈 그렸고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도 마찬가지였다. 1640년경 그가 그린,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국의 새 습작 2점’에 나오는 새에는 다리가 없다. 어딘가에 용과 인어가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개인기까지 갈고 닦는 천국의 새


▎공작 수컷의 화려한 깃털은 치열한 짝짓기 경쟁에서 선택받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들이 살아있는 천국의 새를 본 건 그로부터 300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천국이 아닌 현실 세계, 그것도 유럽에서 1만6000km나 떨어진 태평양의 섬 뉴기니에 살고 있었다. 찰스 다윈과 같이 진화론을 발표한 주인공이자 이 새를 현지에서 처음으로 본 유럽인이었던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두 마리를 직접 영국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이 새들은 지금도 오직 이곳, 그들에게는 천국 같은 이곳에서만 산다.

그런데 뉴기니에는 아무리 봐도 천국의 새 같지 않은 극락조도 많다. 수수한 정도가 아니라 칙칙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먼 새들이다. 왜 어떤 새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데, 어떤 새는 그러지 않을까? 답은 간단하다. 수컷은 화려하고 암컷은 수수하기 때문이다. 박제된 수컷만 유럽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왜 암수 차이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걸까?

극락조를 유럽으로 가져온 월리스처럼 진화론을 발표한 다윈이 이 문제를 풀었다. 암컷은 보통 새끼를 가지고 낳고 길러야 하기에 여기에 들어가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건강한 수컷을 원한다. 수컷은 암컷의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는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암컷들이 다들 건강한 수컷을 고르려 하니 수컷들 사이엔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자신이 누구보다 건강하다는 걸 입증해야 하는 수컷들은 건강진단서를 떼다 줄 수도 없으니 방법은 하나다. 남자들이 은근히 뽐내는 울퉁불퉁한 근육 같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표 나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게 바로 다윈이 말한 성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게 공작의 커다란 꽁지와 극락조의 화려하고도 멋진 깃털이다.

얼핏 보면 비싸기만 하고 쓸모는 없어 보이는 치장이고 장식 같지만 이 과시엔 분명한 의미가 들어있다. ‘이렇게 쓸데없는 멋을 부릴 정도로 건강하고, 이런 불편한 걸 가지고 있어도 포식자들에게 잡히지 않는 능력을 가졌으니 나와 짝짓기를 하면 나처럼 멋지고 건강한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수컷들도 다들 노력하니 극락조 수컷들의 짝짓기 경쟁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치열하다. 1년 내내 몸을 가꾸는 건 기본이고 암컷에게 선보일 자기만의 개인기를 역시 1년 내내 연습한다. 짝짓기 철이 다가오면 숲 속 한 곳에 자신만의 공연을 위한 무대까지 마련한다.

1년 내내 정성을 들인 것이라 녀석들의 공연은 하나같이 감탄스럽다. 어떤 녀석은 목 부근 깃털에 푸른 삼각형을 만들어 암컷을 ‘커플 댄스’로 유도하고, 어떤 녀석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색깔과 모양, 그러니까 번쩍번쩍하는 녹색의 사각 가슴을 선보인다. 또 어떤 녀석은 두 날개를 펼쳐 모아 사람이 활짝 웃는 듯한 모양을 만든다.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개인기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곳엔 짝짓기 성공 철칙이 있다. 남과 같아서는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매년 기기묘묘한 공연을 봐온 암컷들은 웬만한 공연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재미없다 싶으면 휙 날아가 버린다. 현재 42종이나 되는 극락조 수컷들의 형형색색과 기기묘묘한 모양들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력의 산물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보통 다채로운 색깔로 표현되는 이런 능력 과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숲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원앙의 암컷 역시 ‘컬러풀’하고는 거리가 멀다. 반면 수컷은 그야말로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수탉의 빨간 벼슬과 숫사자의 짙은 갈기도 마찬가지다. 수탉의 빨간 벼슬과 숫사자의 짙은 갈색 갈기는 ‘내가 지금 최전성기’라는 색깔 알림판이다. 당연히 암탉과 암사자들도 이게 뭘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같은 값이면 (색깔 고운) 다홍치마’이듯 이들도 강렬한 색깔을 원한다. 반면에 침팬지들은 암컷이 자신의 몸 상태를 수컷에게 색깔로 알린다. 이제 짝짓기 할 준비가 되었다는 색깔 알림판은 크고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항문이다. 이렇듯 살아있는 생명체들에겐 자신들이 만들어온 고유한 색깔이 있고, 그 색깔에는 분명한 뜻이 있다.

그러면 요즘 전국 각지의 산에서 울긋불긋 불타 오르는 단풍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까? 단풍의 색깔은 지금까지 언급한 살아있는 생명체의 색깔과는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여름의 뜨거운 바람이 서늘하게 바뀌기 시작하면 나무는 긴 겨울을 준비한다. 특히 잎이 넓은 활엽수는 그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 그래서 잎을 버린다. 눈보라와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이기려면 대충, 적당히 버려서는 곤란하다.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엔 단출함이 필요하기에 이걸 넘어서는 건 다 버린다. 버려야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모든 영양분을 잎에 우선 공급하지만 가을엔 다르다. 뿌리에서 잎으로 가는 양분을 차단하고 잎에 있는 양분을 줄기와 뿌리로 옮긴다. 이 때문에 잎에 있던 엽록소가 줄어들면서 녹색이 사라지고 그동안 엽록소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색소가 나타난다. 오렌지색이나 붉은색 단풍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많다는 것이고 노란색은 카로티노이드 색소가, 갈색은 크산토필 색소가 많아서 나타나는 색이다. 단풍의 울긋불긋한 색은 만드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래서 가을은 바람으로 시작하고 색으로 완성된다.

색깔은 정보 알림이자 정체성의 표현

살아있는 세상에서 색깔은 정보다. 물론 정보에 담긴 의미는 제각기 다르다. 꿀벌은 노랗고 검은 몸 색깔을 통해 멀리서도 자신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자신들에게 다가오라는 게 아니다. 반대다. 다가오면 말 그대로 ‘벌떼처럼’ 달려들어 혼쭐을 낼 것이니 범접하지 말라는 것이다(눈에 잘 띄어야 하는 교통 표지판이 이 색깔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개구리를 주식으로 하는 뱀에게 색깔이 다른 개구리 두 마리를 보여준 실험이 있었다. 한 개구리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색깔의 평범한 개구리였고, 다른 녀석은 두드러지는 색깔의 개구리였다. 뱀은 어느 녀석을 먼저 공격했을까?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한 색깔의 개구리였다.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에서 색깔은 단순한 정보 알림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다. 생태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확실한 자기 능력이 있을수록 자기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특히 덩치가 작은 녀석들은 이 약점을 상쇄하기 위해 자기만의 능력을 개발한 후 이를 명확한 색깔로 세상에 알린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다. 확실한 자기 능력이 있다면 작은 덩치는 약점이 아니라는 걸 당당히 색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는 대신 강력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아마존 전통 부족들이 독화살을 만들 때 독을 채취하는 독개구리는 그야말로 엄지 만하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작지만 선명한 빨간색을 지녔기에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대체로 모른 체 한다. 그러는 게 신상에 좋다는 걸 한 번씩 경험한 덕분이다. ‘나는 독을 갖고 있으니 그냥 가는 게 좋아!’ 이런 ‘레드카드’를 무시하고 덥석 삼켰다가는 저 세상으로 쉽게 갈 수 있다는 걸 고통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자연에서 평범한 색깔은 언제든 누군가의 ‘밥’이 될 수 있다는 알림판이다.

유전자까지 바꾸는 변신에서 자기만의 색 나와


▎숫사자의 짙은 갈색 갈기는 ‘내가 지금 최전성기’라는 색깔 알림판이다. / 사진:ⓒgetty images bank
이런 만천하 공개 전략과는 반대로 어떻게든 자신을 숨기려는 녀석들에게도 자기만의 색이 필요하다. 상대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조스]에 등장해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한 백상아리는 등 쪽은 검은데 배 쪽은 하얗다. 먹잇감에 접근할 때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다. 먹잇감 관점에서 볼 때, 먹잇감의 윗쪽 그러니까 수면 가까이에서 접근할 때는 햇빛을 등 지고 접근해야 하는데 이럴 땐 흰색을 가지는 게 접근에 유리하고, 반대로 먹잇감 아래쪽에서 접근할 때는 심해에 가까운 색이어야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자신의 색을 만든 것이다. 펭귄과 혹등고래도 같은 전략을 쓴다. 하지만 카멜레온과 바다의 카멜레온이라고 할 수 있는 문어와 오징어에 비하면 이건 약과다. 이 녀석들은 피부 밑에 있는 수많은 색소를 통해 주변의 지형지물과 똑같은 색으로,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한다. 바위가 있는 곳에서는 바위와 비슷하게, 모래가 있는 곳에서는 모래와 비슷하게 주변 지형지물에 녹아 든다. 그렇게 숨은 그림처럼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먹이가 나타나면 전광석화처럼 덮친다.

자연에서 자신만의 색깔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한 게 아니다. 필수다. 어쩌다 보니 생기는 우연의 산물이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자신만의 생존전략을 개발하는 각고의 과정에서 나온다. 더 나은 삶을 살려는 노력이 자기만의 색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듯 생명체들은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힘 있는 존재가 되어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어오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무늬와 색을 갖고 있는 나비를 연구한 미국 코넬대의 로버트 리드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과 식물의 색을 연구한 일본 쓰쿠바대의 오노 미치유키 교수 연구진에 따르면 자기만의 색깔은 단순한 노력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유전자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겉모습만 바꾸거나 적당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얘기다. 뿌리와 같은 유전자까지 바꾸는 변신에서 자신만의 색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색은 자기 자신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이런 원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떤가, 나만의 색깔을 가졌는가? 어떤 색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박스기사] 색과 지위의 관계, 빨간색은 나의 힘?


▎유럽에서는 빨간색은 오래 전부터 ‘최고’를 뜻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서 나폴레옹 역시 빨간 망토를 걸치고 있다.
가톨릭에서 빨간색 망토는 고위직을 의미한다. 교황과 추기경들의 빨간 망토가 대표적이다. 유럽에서는 빨간색은 오래 전부터 ‘최고’를 뜻했다. 한때 학생들의 책받침이나 웬만한 이발소 달력에 단골로 등장했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자크-루이 다비드의 작품)에서 나폴레옹 역시 빨간 망토를 걸치고 있고, 황제에 오르는 대관식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카이사르도 빨간색 망토를 걸쳤다고 한다.

왜 빨간색일까? 일단 빨간색 옷은 구하기가 어려웠다. 식물성 염료는 흔했지만 물이 금방 빠져버렸다. 물론 좋은 염료가 있긴 했다. 지중해에 서식하는 ‘푸르푸라(purpura)’라는 소라의 내장에 있는 푸르스름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끓일 때 나는 고약한 냄새를 견디기만 하면 보기 좋은 자주색 물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영어의 보라색(purple)에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정작 비법은 사라졌다. 문제는 이 물감 1g을 얻기 위해서는 1만개의 소라가 필요하다는 것. 당연히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고, 황제와 추기경의 옷일 수밖에 없었다. 흉내 낼 수 없게 아예 법으로 막았다. 오죽했으면 1524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독일 농민들이 ‘빨간 망토를 입게 해달라’고 요구했겠는가.

더구나 빨간색은 눈에 아주 잘 띈다. 인류에게는 빨간색을 잘 보도록 진화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빨간색은 맛있는 열매이기도 했고 영양가 높은 어린 잎을 알려주는 알림판이었다. 이런 이유로 빨간색은 자연스럽게 권력자들이 애용하는 색이 되었다. 영화제에서 많이 보는 ‘레드 카펫’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다는 ‘빨간 길’은 유럽 왕실에서 외국 귀빈을 극진하게 환영한다는 표시로 사용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런 효과 때문인지 현대의 리더들도 빨간색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현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에게 아쉽게 고배를 들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2015년 출마를 선언할 때 짙은 푸른색 재킷에 빨간 상의를 받쳐 입어 눈길을 끌었다. 첫 대선 도전 선언 때도 빨간 재킷을 입었다. 빨간색은 두드러져 보이는데다 덩치를 크게 보이게 해주기 때문에 덩치 큰 트럼프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트럼프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을 때마다 빨간 넥타이를 한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407호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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