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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31) 인조와 이원익]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던 老臣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정파 다른데도 극진히 대우...인간적·정치적 버팀목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일본 덴리(天理)대학이 소장 중인 이원익의 영정.
“경이 벼슬을 버리고 떠나자 인심이 흩어져 국운이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으니, 경의 거취에 나라의 안위가 달려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경이 조정에 있지 않으면 단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 부디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속히 복귀하라.” 1626년(인조 4년) 2월 9일, 인조는 연로한 나이를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시골로 내려간 이원익(1547~1634)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뜻을 간곡히 전달했다. 며칠 후, 이원익이 마음을 돌려 상경한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경기 감사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말과 가마꾼을 준비해 기다리도록 하고, 의관(醫官)을 보내 영상(영의정)이 올라오는 길을 수행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최상의 예우를 갖춘 것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서 두 사람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재를 소중하게 여기고 원로를 존중하라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의 왕들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신하나 존경받는 선비들을 높이 받들어야 했다. 인재를 초빙하는 것이 곧 군주의 자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인재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즉, 이원익에게 보여준 인조의 태도 역시 통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독선적이고 권위의식 강했던 인조가…

그런데 인조의 말과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례적인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인조 4년, 이원익이 나이와 질병을 이유로 조정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거듭 밝히자 인조는 “경이 병에 들었다니 밤낮으로 걱정스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움직일 수 없더라도 집안에 누워있으면서 나라 다스리는 일을 생각해주길 바란다”(9월 29일). “나는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듯 경을 바라본다. 경이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난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라는 말인가?”(12월 7일)라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정묘호란의 전후 수습이 어느 정도 끝난 인조 7년에도 이원익이 사직상소를 제출하고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자 “아무리 늙고 병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를 한번 만나주지도 못할 정도인가?”(3월 8일), “여러 차례 관원을 보냈으나 경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내가 실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3월 10일), “내가 경을 바라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하다”(4월 23일), “경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마음으로 의지할 바를 얻게 될 것이고 나라에도 광영이 될 것이다”(인조 9년 4월 4일)는 말을 쏟아낸다. 임금이 신하에게 이 정도로 마음을 내어보인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인조는 이원익이 조정에서 완전히 퇴진한 후에도 그에 대한 정성을 멈추지 않았다. 녹봉으로 받은 곡식을 사양하자 강제로 실어 보냈고(인조 9년 4월 14일), 그의 집이 낡아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형편이라는 보고에 즉각 새로 집을 지어 하사했다(같은 해 12월 4일). 그리고 이원익이 눈을 감을 때까지 자주 승지와 의관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

대체 이원익이 인조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그리한 것일까. 독선적인 성품에다 의심이 많고, 왕의 권위를 내세우길 좋아했던 인조가 왜 이원익에게 만큼은 자신을 굽혀가며 각별하게 대우한 것일까. 재위 기간 내내 다른 신하에게는 결코 이런 태도를 보여준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원로를 대접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기도 힘들다.

인조가 이원익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직후 그를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부터다. 이미 선조 때에 두 차례, 광해군 때에 한 차례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은 당시 나이 77세로, 나라 안에 그의 경륜을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가 영의정에 제수되자 “조야(朝野)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고 그가 도성으로 들어온 날에는 도성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할” 정도로 그는 민심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인조 1년 3월 16일), 서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김장생이 “이원익은 국가의 안위와 관계가 있으니 조정에 있어야 마땅하다”(인조 2년 10월 15일)고 평가할 만큼 두터운 신망은 당파를 초월했다.

하지만 인조의 조정에서 이원익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매우 많아 기력이 쇠잔했던 데다가 반정(反正)으로 출범한 서인 정권에서 남인인 그의 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은 자신들의 경험 부족을 보완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줄 ‘얼굴마담’이 필요했던 것이고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이원익이었을 따름이지, 그에게 수상으로서의 실권을 줄 생각은 없었다. 이원익도 이것을 알면서 조정에 출사한 것인데, 나라를 위해서는 하루빨리 새 정권을 안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가진 신뢰자본이 그 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이원익은 선조나 광해군 대와 달리 정치 현안, 정책 과제에 대해 침묵하고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정에 있는 동안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계책을 별로 내놓은 것이 없었다”(인조 3년 2월 21일), “별로 이루어 놓은 대업이 없었기 때문에 예전에 비하여 명성이 조금 감손되었다”(같은 해 6월 14일)는 평가가 따른다. 하지만 동시에 실록은 그가 물러나려 할 때마다 “일국의 원로로서 조야의 신망을 깊이 받았으므로” “모두가 그를 믿었으므로” “그의 퇴진을 걱정하고 실망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한 일은 없었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어주는 것만으로 신뢰를 주었던 것이다.

정치 현안, 정책 과제에 별다른 의견 내지는 않아

더욱이 이원익은 평소에는 잠자코 있다가도 나라에 위험이 닥치면 분연히 앞장섰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이 늙고 병들었으나 어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며 이괄의 본거지인 평안도로 가서 난을 진압하겠다고 자원했고(인조 2년 1월 24일),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여든이 넘은 나이로 전시 군사지휘와 민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의 책임을 맡았다(인조 5년 1월 17일).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도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저 없이 상경해 임금을 알현했다. (인조 9년 4월 4일, 10년 8월 30일, 10월 30일 등 다수)

이러한 이원익의 행동은 인조에게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우선 걸음을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노쇠한 나라의 최고 원로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즉각 들어와 힘이 되어주니 그 충성심이 더 없이 고마웠으리라(인조 9년 6월 18일). 또한 “이원익이 국경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어제 한양에 들어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좌의정 김류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조정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라의 중심을 잡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인조 9년 4월 1일). 이원익과 같은 신하가 나라와 임금에게 지극한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신하들의 충성심을 환기시키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이원익에게 보낸 인조의 극진한 정성은 바로 이와 같은 노신(老臣)의 헌신에 대한 보답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의 의지처가 되고 나라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점에서 국가 원로로서 이원익의 역할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 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07호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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