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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선악 판단: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바둑에서도 선악 판단이 어려울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신상품에 해당하는 새로운 정석이 나왔을 때 프로기사들 간에도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좋은 수로 보였는데 계속 사용하다 보니 문제점이 발견돼 좋지 않다고 결론이 나는 일도 있다. 또한 어떤 장면의 수를 결정하려고 할 때 두 가지 시나리오를 놓고 어느 것이 좋은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A쪽을 택하면 놓치는 점이 있고 B쪽을 택할 경우 그것은 막을 수 있지만 다른 손실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많은 의사결정에서는 이런 선악 판단에 따른 갈등 문제가 있다.그런데 일반적으로 실력이 낮은 하수의 바둑에서는 선악 판단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수들은 누가 봐도 악수라고 쉽게 단정할 수를 흔하게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 있게 호수니 악수니 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고수들의 바둑에서는 빤한 악수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이다.그런데 어떤 수의 가치가 계산상으로 나올 때는 선악 판단의 문제를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다. [1도]와 같은 모양에서 흑1에 두는 수와 흑2에 두는 수 중 어느 것이 더 좋을까를 고려한다고 하자. 크기를 계산해 보면 흑1은 17집, 흑2는 23집으로 평가된다. 둘 다 엄청나게 큰 수다. 일반 바둑팬들은 이런 계산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겠지만, 프로들에겐 식은 죽 먹기다. 이런 경우 계산에 의해 흑2가 더 좋다고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하지만 모든 장면이 수치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활동을 경제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가령 해외의 빈곤 아동을 위해 지원하는 활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욕을 먹을 수 있다.[2도]와 같은 장면에서 흑1에 두는 수는 어떨까. 흑A나 B의 큰 곳에 비해 흑1은 상당히 좁아 보인다. 그래서 일반인의 눈에는 흑1이 좋지 않은 수로 보일 수 있다. 포석에서는 큰 곳을 점령하는 것이 기술의 키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흑1이 몇 집의 가치인지를 계산하기는 어렵다.고수들은 흑1이 나쁜 수가 아니라고 본다. 그 이유는 흑1이 다음 C의 침입을 보는 일석이조의 수이기 때문이다. 흑1로 귀쪽에 확실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다음 백진에의 침입수까지 볼 수 있다면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이니 좋은 수라고 보는 것이다. [3도]에서 흑1에 만일 백2와 같이 둔다면 당장 흑3에 침입할 수 있다. 이렇게 침입하면 백집은 쉽게 파괴가 된다. 이런 수를 보고 있기 때문에 흑1은 단순히 실리를 벌어들이는 수가 아니다. 이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백2로 지킬 수도 있다.이 장면의 흑1처럼 일석이조의 역할을 하는 수는 바둑에서 대부분 호수(好手)로 간주된다. 그러니까 계산이 어려운 수를 판단할 때 어떤 수가 만일 두 가지 역할을 한다면 좋은 수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매우 드물지만 세 가지 역할을 하는 수도 있다. 그런 수는 호수를 넘어 묘수라고까지 일컬어질 수 있다.
※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