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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 발전에도 건재한 문구시장 왜?] 아날로그적 감성 충전 도구로 인기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손 글씨 재미·힐링 수단으로 변신...프리미엄·캐릭터 제품으로 해외 공략 필요

지난해 12월부터 3월 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마리 로랑생전. 관람로 중간의 한 참여 행사가 관람객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프랑스 시인이자 로랑생의 연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名詩) ‘미라보 다리’를 직접 손으로 따라 써보는 코너였다. 당시 천재 여류 화가로 명성을 날리던 로랑생은 파블로 피카소의 소개로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아폴리네르는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로랑생에게 빠졌고, 로랑생을 따라 미라보 다리 인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아폴리네르는 절도 혐의로 감옥에 갇혔고 시간이 지나 둘은 결국 이별했다. 미라보 다리는 아폴리네르가 로랑생과의 이별 후 그녀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관람객들이 로랑생의 삶과 아폴리네르의 감정을 간접 체험해 힐링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다. 키보드 자판을 튕겨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겨냥한 이벤트다.

디지털 기기는 편리하고 유용하다. 노트와 필기구를 챙길 필요 없이 클릭만으로 문서 작업을 할 수 있다. 백스페이스 버튼은 지우개 역할을 대신한다. 최근 학교에서도 노트북과태블릿을 이용한 교육이 늘고 있다. 캔버스와 스케치북, 물감 대신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리고, 눈금이 켜켜이 쳐진 공책 대신 엑셀로 문서를 만든다. 디지털 기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문방구(文房具)의 종말은 멀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문방구산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며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문구시장 규모는 4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2000년대 초 추산치 3조원보다 1조원가량 증가했다. 문구산업은 판촉물 판매와 반제품 수입 등이 얽혀 있고, 기업별 데이터 기준이 달라 명확한 통계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2000년대 초부터 PC와 스마트폰 등 스마트 다바이스의 보급이 급격히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문구시장은 의외의 성장세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일반 공책이나 볼펜보다는 많은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콘셉트 있는 특수 제품 판매가 늘어나서다. 문구 시장이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컬러링북·다이어리북에 꽂힌 20~40대


▎그림그리기 만다라. 색연필로 만다라를 색칠하는 컬러링북.
실제 최근 문구 시장을 살펴보면 20~40대를 중심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거나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제품 판매가 늘고 있다. 가장 주목 받는 제품은 컬러링북(색칠공부)이다. 세밀한 밑그림에 색을 칠하면서 잡념이 사라지고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어른을 위한 책이다. 2013년 영국의 그림작가 조해너 배스포드가 어른을 위한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을 출간하며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2014년 국내에도 컬러링북 열풍이 불기 시작하며, 매년 두 자릿수 판매 신장을 일구고 있다. 나무·꽃·정원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컬러링북이 전체 컬러링북 판매량의 70~80%를 차지한다. 도시·패션·만다라 등의 인기도 높다. 물론 색연필 판매도 덩달아 늘었다. 파스텔톤 등 다양한 색감을 연출할 수 있는 기능성 색연필도 다수 출시되고 있다. 출판 업계 관계자는 “현대인들의 힐링 욕구를 풀어주는 책과 함께 다양한 색감을 내거나 캐릭터성을 가미한 색연필 판매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컬러링북과 비슷한 콘셉트의 스티커북과 엽서북·퍼즐 등의 판매도 꾸준하다. 지난해 10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무민(Moomin) 캐릭터 상품전이 ‘완판’되는 등 캐릭터 상품의 인기도 오르고 있다. 무민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트롤(Troll)을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이 동화적으로 탄생시킨 캐릭터다.

다이어리북도 인기다. 스마트폰 확산으로 요즘 일정 관리는 스마트폰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이 다채롭고, 일기처럼 매일 있었던 일을 기록하거나 날마다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등 다양한 콘셉트의 다이어리북이 등장하고 있다. 2016~17년 판매량 1위를 기록한 다이어리북 ‘나는 오늘 실존주의자인가, 초현실주의자인가?’의 경우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면’ ‘머리를 감지 않고 며칠을 버틸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 365개를 5년에 걸쳐 답하게 구성돼 있다. 유명인이나 고전문학을 토대로 만든 제품도 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출간된 다이어리북은 총 32종이다. 전년의 30종, 2015년 8종에 비해 대폭 늘었다. 지난해 11~12월 두 달 간 2만권 이상 팔렸다. 일상의 기록을 적으며 글쓰기의 매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다양한 색상의 펜과 스티커, 마스킹테이프 등으로 일상을 꾸미면서 파생상품의 인기도 오르고 있다. 문구 업계에서는 교육·사무용 제품의 판매 둔화에도 이런 분위기를 타고 현재 교육용 문구류의 경우도 바닥에 썼다 지우기 편리한 워셔블마카펜 등 아이디어 제품은 판매가 순조롭다. 여기에 1인 가구의 증가 등으로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주방·인테리어 소품으로 문구류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아이디에 제품의 소규모 창업이 늘어나고, 기존의 대형 문구사들은 매출 부진에 시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장인 김유미(41)씨는 “매일 손글씨로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정리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며 “주변에 디자인이 새롭거나 아이디어 넘치는 문구류를 구입해 집을 꾸미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최근 일부 대형 문구사들은 신규 사업으로 홈인테리어 솔루션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1인가구 늘면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문구류 인기


▎예술의전당 마리 로랑생전에 마련된 ‘미라보 다리’ 필사 체험 코너.
한국·일본 등에서 문구류의 이런 역할 변화와 프리미엄 제품의 판매 증가, 여기에 신흥국의 가파른 경제 성장으로 세계적으로 문구시장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인 ‘글로벌 인더스트리 애널리스트(GIA)’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글로벌 문구산업 규모가 2024년 2340억 달러(약 250조 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해 정보통신(IT) 보안 시장 규모 전망치 1950억 달러보다 390억 달러 많은 규모다. 드론시장 전망치 115억 달러의 20배 수준의 규모다. 보고서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경제 수준이 높아져 1·2차 교육 기관이 늘어나는 한편, 숙련 인력 수요 증가를 원인으로 꼽았다. 아시아·태평양 시장은 2023년까지 매년 6.1%의 시장 성장이 전망된다. 가장 규모가 크고 성장이 더딘 미주·유럽 시장의 경우 꾸준한 수요 속에 새로운 디자인과 모델, 신재료를 사용한 문구가 등장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친환경 문구류의 등장도 시장 성장의 배경으로 분석했다.

실제 국내 문구 업체의 수출 실적도 크게 늘었다.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국내 문구 업체의 2002년 수출은 4억9771만 달러에서 2016년 5억3749만 달러로 증가했다. 접착제와 필기구가 수출 증가를 견인했다. 다만 PC와 스마트폰 보급 증가 등 시대 변화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문구류 수입은 2002년 2억7247만 달러에서 2016년 5억 4133만 달러로 2배 가까이로 늘었다. 이 가운데 카본지·복사지 수입이 7543만 달러로 품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 20년 새 디지털 기기의 확산으로 노트보다는 A4용지의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한국의 카본지·복사지 수출은 21만 달러에 불과했다. 시장조사업체인 트랜스페어런시는 보고서에서 “세계적으로 교육받는 인구 증가와 창업의 증가,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 상승 등 문구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며 “다만 디지털화로 노트 등 제품의 수요는 감소하고 디지털 인쇄물은 늘어나는 등 시장의 변화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출산율 감소와 중국·베트남산 공세가 이어지면서 문구 산업의 고급화와 신사업 진출, 해외시장 개척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다이소 등 대형 유통망을 통해 저가 제품이 대량 유통되면서 제조·판매사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점은 최근 문구 산업의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하다. 문구용품 소매 업체 수는 2007년 1만9617개에서 2015년 1만1735개로 줄어들었다. 1년에 1000개씩 사라진 셈이다. 고급 문구류도 주로 서점과 인테리어샵 등의 새 채널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대한 실효성을 높여 영세업자들을 보호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글로벌 문구산업 2024년 250조원 규모 예상


특히 다양한 색상을 연출하거나 캐릭터가 있는 콘셉트 제품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지만 국내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독일 기업들에 열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기업인 펜텔과 제브라 등이 최근 내놓은 심이 부러지지 않는 샤프 등 신기술을 접목한 제품들은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에 국내 기업들도 프리미엄 제품 확대와 캐릭터성을 가미한 특성화 상품 개발을 통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등지로 수출 확대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보고서에서 “중국 다자녀 정책 시행으로 문구 시장의 잠재력이 크며, 학생들은 한류 영향으로 한국 제품에 대한 인식이 좋다”며 “디자인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어 소비자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창의적 디자인과 캐릭터 제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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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호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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