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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의 바둑경영] 사드 보복에도 중국을 적극 공략할 이유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시장 규모 크고 비즈니스 아이디어 다양 … 사고방식·접근법 유연해
사람은 드 보복의 여파로 중국 시장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졌다. 베트남이나 인도와 같은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국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할 필요가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인 데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의 매력: 중국이 거대 강국이 되면서 중국에서 비즈니스하기가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 중국의 기술력이 발전하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한국 기업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 시장은 우리에게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시장 규모가 우리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어떤 출판인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서는 인기 있는 책이나 잡지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2~3만 부 나간다. 이것은 한국에서 1000부 정도 팔린 것과 같다.” 사실 한국에서는 1000부도 안 나가는 책이 수두룩하다. 1만부 정도 나간다면 성공적이라고 본다. 3만부라면 히트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출판에서 이런 히트상품을 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에서는 히트상품급이 중국에서는 기본 부수인 셈이다.

시장 사이즈를 실감나게 비교하기 위해 바둑의 예를 하나 들어본다. 중국에는 요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바둑학원이 꽤 많다. 이런 학원의 원생 수는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50명 정도인 곳이 많다. 원생이 100명이면 꽤 잘 되는 곳으로 친다. 중국에서는 어느 정도일까. 얼마 전 방학 동안 사범으로 일한 중국 학생이 있었던 곳은 원생이 500명 정도라고 한다. 한국의 10배 규모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 정도면 작은 규모라고 한다. 단순하게 얘기해서 중국 시장은 한국보다 최소한 ‘0’이 하나 더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시장의 매력은 사이즈만이 아니다. 비즈니스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도 많다. 한국에서는 제약이 많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망설이게 되지만, 중국은 비즈니스에서 새로운 생각과 적극적인 접근을 한다. 한 예로 중국 봉황고성의 노면 바둑판을 들 수 있다. 땅바닥에 운동장처럼 바둑판을 만들어 놓고 소림사 무동들이 인간 바둑돌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곳을 바둑관광지로 만들려는 생각에 따라 사람이 바둑돌 역할을 하는 상품을 개발한 것이다.

바둑기술에서도 중국에서는 ‘절예’라고 하는 인공지능 바둑을 개발해 알파고에 버금가는 수준이 됐다. 이 인공지능 바둑이 최고수 커제 9단을 비롯한 프로기사들의 사범 역할을 한다. 얼마 전 커제는 자존심을 접고 절예에게 두 점을 놓고 두었다. 결과는 커제의 패배였다. 커제는 인공지능 바둑으로부터 자신이 둔 수에 대한 복기를 받는다. 한국보다는 비즈니스에 대한 사고방식이나 접근법에서 중국은 유연한 면이 있다.

신라의 두 인물: 그렇다면 중국 시장 또는 중국 무대에 진출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행정이나 바둑에서 중국에 진출해 성공한 케이스를 소개해 본다. 하나는 신라시대의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12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고시에 합격하고 중국에서 벼슬을 했다. 그는 행정가로서 업적을 많이 쌓아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는데, 그가 쓴 여러 가지 글 중에서 ‘토황소격문’이 유명하다. 시진핑 주석도 한국과의 관계를 얘기할 때 최치원을 언급했을 정도다.

최치원은 바둑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신라 조정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해인사 부근으로 은거했다.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니 은둔생활로 생각했을 것이다. 해인사 부근에는 최치원이 두었다는 돌바둑판이 남겨져 있다. 진감선사라는 승려와 바둑을 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치원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기대조(棋待詔)를 한 박구(朴球)도 있다. 기대조란 황제의 바둑담당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한 바둑고수를 말한다. 왕적신·유중보 등 유명한 바둑고수들이 기대조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기대조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라의 박구다. 바둑이 성행했던 중국에 가서 고수들을 제치고 황제의 바둑사범을 했으니 박구의 재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박구가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올 때 장교라는 중국의 유명한 시인이 석별의 정을 읊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에는 ‘신라로 돌아가는 기대조 박구를 전송하는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내용은 ‘바다 동쪽 신라에 그대의 적수 누가 있을까. 당나라 대궐에 새로운 묘수 전파하고서 귀국하는 뱃전에서 옛 기보 펼쳐보네’와 같이 되어 있다. 이 시는 박구가 바둑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후 박구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박구가 활동하던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바둑이론이나 기술을 개발했다. 경영에도 응용되는 바둑십계명 ‘위기십결’도 중국에서 나왔다. 또한 중국에서는 사활묘수를 연구하여 [현현기경]과 같은 책을 출간했다. 기대조 박구도 이런 연구에 일조했을 것이다. 옛날 중국에서 개발된 바둑 묘수풀이를 하나 보기로 하자.

[1도] 오른쪽 모양을 보면 매우 단순하다. 흑에게 갇힌 백돌 세 점을 살려보라는 문제인데 얼핏 보면 살 길이 묘연해 뵌다. 아래쪽처럼 백1에 껴붙이고 9에 두어 살자고 하는 것이 삶의 요령이다. [2도] 모양에서 흑1로 잡으러 가면 백2에 껴붙여 촉촉수로 흑이 잡힌다. 단순하지만 묘미가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개발된 사활묘수에는 이것보다 더 기묘한 것이 굉장히 많다.

박구가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다면 이런 멋진 묘수가 보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근세까지 바둑기술에 관한 문헌이나 기보가 발견되지 않는다. 어쩌면 한반도에서는 이런 기술을 선보일 여건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중국에서는 알파고와 비슷한 ‘절예’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프로바둑 연구에도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별 관심이 없다.

최치원과 박구의 사례는 오늘날의 비즈니스에도 시사점을 준다. 먼 옛날 중국을 오가는 일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도 중국으로 진출해 당당히 벼슬을 하며 역할을 한 것이다. 요즘처럼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수 있는 시대에는 중국으로 가는 길이 훨씬 편하고 쉽다. 중국에서 최치원과 박구처럼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하며 성공을 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을 알고 접근하라: 중국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중국인의 특성과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실패하기 쉽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온 한 변호사는 중국인이 여러 면에서 한국인과 다르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물건 가격에 대한 관점이다. 우리는 한 곳에서 3만원 하는 상품을 다른 곳에서 6만원이나 10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고객을 속였다고 흥분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5만원을 불렀다가 5000원에 팔기도 한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휴가철 바캉스 시즌에는 비싼 가격에도 숙박시설을 이용한다. 하지만 보통 때는 동일한 상품 가격에 차이가 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또 하나는 중국인의 ‘도광양회’라는 사고방식이다. 힘이 없을 때는 참고 기다린다는 것으로 불량배의 가랑이 밑으로 건너간 대장군 한신의 경우가 좋은 예다. 한국인은 대부분 체면의식이 강해서 이런 수모를 참지 못한다. 참으며 때를 기다린다는 면에서 많은 중국인은 우리보다 고수다. 이와 같은 중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하고 접근해야 성공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 정수현...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1426호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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