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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역전쟁의 역사] 통상갈등 악화되면 결국 패자만 생길 뿐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
보호무역→제국주의 대두, 세계 대전 발발...자유주의 vs 보호무역 영원한 시소게임

▎반(反)곡물법동맹의 시위 모습.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트럼프발 무역전쟁의 포성이 커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이어 관세폭탄 투하도 서슴지 않고 있다. 어떤 이는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에 우리나라가 괜히 유탄을 맞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국이 한국산 철강제품에 고율의 관세 부과를 유예하기로 한 것이 증거라는 것이다. 한·미 FTA 재협상도 우려보다 무난하게 타결된 것으로 보인다. 한·미 두 나라의 통상마찰이 정말 지나가다 애먼 일을 당한 데 불과하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복잡한 사정을 생각하면 과연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도대체 통상이 무엇이기에?

여러 음식을 차려 놓고 각자 먹고 싶은 대로 가져와 먹는 뷔페가 북유럽의 해양민족인 바이킹(Viking)의 풍습에서 나왔다고 하면 뜻밖의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흔히 바이킹이라고 하면 해적질이나 약탈을 떠올리곤 한다. 바이킹은 약탈한 전리품을 마을 한 가운데 놓고 각자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구성원 간에 분배를 둘러싼 차별과 다툼이 생겨 공동체의 결속을 해칠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말 바이킹은 해적질만으로 살았을까? 실은 바이킹도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추운 기후 탓에 농사가 잘 안 되면 다른 부족과 무역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물자가 풍부하지 않으니 무역을 해도 얻을 것이 부족하면 해적질을 했다. 이들에게는 무역과 해적질이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 경제활동이었다.

바이킹도 다른 부족과 무역에 나서기도

바이킹 같은 고대 민족만이 아니라 비교적 후대에 와서도 사정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영국을 유럽의 패권국가로 만든 계기는 엘리자베스 1세(1533~1633) 여왕 시절 영국 해군이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에스파냐 해군을 격멸시킨 사건이다. 영국과 에스파냐가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인 이유는 바로 식민지와의 무역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신대륙에 가장 먼저 진출한 에스파냐가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떠올랐다. 그러나 신흥세력인 영국이 에스파냐의 독점권에 도전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영국 해군의 최고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원래 해적선장이었다. 드레이크는 여왕에게 당시 영국의 1년 재정에 해당하는 30만 파운드가량의 선물을 바쳤고, 여왕은 그의 범죄를 사면해 주는 것은 물론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제독으로 임명했다. 드레이크 밑의 병사들도 실은 해적이었고, 그들 또한 해적선에서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계급을 부여받고 해군이 됐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16~18세기의 유럽 국가를 절대주의 또는 절대왕정이라고 부른다. 그 이전까지 여러 봉건영주들은 형식상 국왕의 신하였으나 자기 영지에서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대내외적인 봉건위기로 여러 귀족과 영주에게 분산돼 있던 권력이 국왕에게 몰리면서 국왕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집중되자 이를 절대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영국이나 루이 14세(1638~1715) 시절의 프랑스가 바로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절대주의 국가의 경제정책을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상업과 무역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상주의의 실제 내용은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절대왕정 입장에서 상업이나 무역은 단지 수단일 뿐이었고, 중상주의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는 데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국가의 부와 국왕의 권력이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절대왕정은 국가와 국왕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괘념치 않았다. 국왕들은 각종 면허와 특권을 독점해 국가와 왕실의 재정수입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해적질도 그런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들에게 다른 나라의 배를 공격하고 약탈할 면허장을 주기도 했다. 이 시대까지도 여전히 무역과 해적질은 똑같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국력을 강화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간주됐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영국만이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무역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체계적인 무역이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산업혁명을 전후한 시기 영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이른바 ‘곡물법(Corn Law) 논쟁’이었다. 당시 영국의 기득권 세력이던 지주들은 외국 곡물의 수입을 금지해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자 곡물 생산이 감소했다. 식료품 가격의 상승은 노동자에게 빈곤과 기아의 위협이었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급해야 할 자본가에게도 심각한 문제였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곡물법’을 폐지하고 값싼 외국 곡물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다. 지주들은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에 따라 ‘곡물법’을 둘러싼 논쟁은 거의 200년 동안 영국 사회를 심각한 갈등으로 몰아넣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체계적 무역이론 등장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신대륙에 먼저 진출해 식민지 무역을 독점하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멸시키고 영국을 유럽의 패권국가로 만들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1729~1790)를 비롯한 당시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곡물법’의 폐지와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경제학자 가운데서도 특히 ‘곡물법’ 폐지를 위해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는 데이빗 리카도(1772~1820)이다. 리카도는 오늘날에도 모든 경제학 교과서에 자유무역의 근거로 소개되는 비교우위 이론을 발표해 자유무역은 어느 한 나라만이 아니라 무역 당사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리카도의 자유무역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말로 유명한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1789~1946)다. 리스트는 리카도의 자유무역이론은 두 나라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선진국인 영국의 이익을 옹호할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후진국인 독일은 보호무역을 통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다리 걷어차기’란 영국이 자신들도 아직 후진국이던 때는 보호무역이라는 사다리를 통해 선진국으로 발전해 놓고, 이제는 다른 후진국이 선진국이 되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는 뜻이다.

대외적인 무역정책은 국내에서의 산업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자유무역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자본 축적을 추구하던 당시 영국의 산업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이와 달리 아직 후진국이던 독일에서는 국가의 보호 아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보호무역주의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리카도와 리스트 가운데 누가 옳을까? 과연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은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 실은 두 사람 모두 옳다고 말할 수고 있고, 두 사람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두 사람만이 아니라 정치가든 언론인이든 대부분의 사람은 무역을 어느 나라의 이익인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무역이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라면, 무역을 둘러싼 국가 사이의 분쟁은 설명되지만 한 국가 내에서 여러 집단이 대립하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곡물법 논쟁에서 리카도가 대변한 영국의 산업자본가는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당시에는 가장 선진적인 공업 국가였던 영국의 공산품을 더 많이 수출하고 대륙으로부터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는 데는 자유무역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주들은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농산물 수입을 규제해 높은 곡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리스트가 보호무역을 주장한 이유는 영국의 값싸고 상대적으로 품질 좋은 공산품 수입을 금지해 독일의 산업자본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대로 영국으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고 그 대가로 더 많은 농산물을 수출하고자 했던 지주들은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무역은 국내의 여러 계급과 집단이 대립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었다. 다만 영국에서는 산업자본가들이 자유무역을 주장한 반면에 독일에서는 산업자본가들이 보호무역을 주장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당시 두 나라의 발전 정도가 달랐던 데서 비롯됐다. 이 차이가 선진국은 자유무역을, 후진국은 보호무역을 주장한다고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리스트는 학자일 뿐 아니라 정치가·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평생을 독일의 보호무역을 위해 헌신했다. 이 때문에 보수세력의 미움을 받아 독일에서 추방되고 만다. 미국으로 건너간 리스트는 알렉산더 해밀튼을 만나게 된다. 해밀튼은 초대 재무장관으로서 미국의 은행과 금융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런 공로로 미국의 10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해밀튼은 리스트만큼이나 열렬한 보호무역주의자였다. 이 당시 미국의 동북부에서는 공업이, 남부에서는 면화 중심의 농업이 우세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산업자본가들은 보호무역을 주장한 반면, 지주들은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미국이 세계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자유무역 요구를 퍼붓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영국에 비해 미국의 공업 수준이 훨씬 후진적이었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결국 남북전쟁으로 폭발하고 만다. 물론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는 노예제도의 인정 여부와 여러 주가 연방으로부터 탈퇴할 권리를 가지는가 등의 문제가 작용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무역제도야 말로 남북전쟁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미 산업혁명을 완수한 영국과 달리 아직 산업혁명을 진행하고 있던 독일이나 미국의 처지에서는 산업자본가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일치하거나, 최소한 조금 더 많이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리스트나 해밀튼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든 독일에서든 지주들은 산업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됐지만, 그것이 역사의 거역할 수 없는 변화의 방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계급과 집단의 이익을 아우르는, 또는 그것을 초월하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무역이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반영할 뿐이라는 사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한·중 FTA 등을 둘러싼 우리나라에서의 갈등을 돌아보면 더 분명해진다. 자유무역이든 보호무역이든 무역이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그처럼 격렬하게 대립할 이유도 없을 터이다.

여러 유럽 나라가 산업혁명을 완수한 19세기 중반 이후 무역을 둘러싼 대립은 사뭇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독일의 공업 수준이 영국을 따라붙자 더 이상 독일과의 자유무역이 영국의 산업자본가에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1870년대의 대불황을 계기로 영국은 그때까지의 자유무역정책을 버리고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했다. 반대로 독일의 산업자본가도 넘치는 생산력을 해결하고자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 국가 간의 무역전쟁은 서로 상대국을 향해서가 아니라 제3의 시장을 놓고 벌어지게 됐다. 바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미개발 국가들이다. 1870년부터 1900년에 이르는 불과 30년 간 유럽 열강들은 인구 1억5000만 명에 달하는 규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10분의 1, 면적으로는 5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식민지 지배는 가장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971년 ‘닉슨쇼크’는 금태환제 중단이 핵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닉슨쇼크에는 적자를 줄이기 위해 수입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얼핏 식민지에 대한 열강의 침략은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국가 사이의 문제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의 본질은 무역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과 대립에 있다. 무역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지배란 바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보호무역주의를 의미한다. 보호무역이란 국경에 빗장을 걸고 자유로운 통상을 규제한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그들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프랑스는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무역을 할 수 없게 됐고, 영국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와 무역을 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산업화의 시기가 늦어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한 나라들, 바로 독일과 같은 경우이다. 독일은 당연히 선진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등에 식민지의 재분할을 요구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당연히 그러한 요구를 거부했다. 그 결과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다. 무역전쟁이 이제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다. 이 시기의 세계 경제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자유무역 질서가 세계 경제의 장기 호황을 가져왔는지 반대로 장기 호황이 자유무역 질서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는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여러 집단 사이에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유무역은 장기적으로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나 자유무역에 따른 이익은 꽤 오랜 시간과 더 많은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보호무역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나부터 먼저 이익을 얻겠다는 정책이다. 세계 경제가 호황일 때에는 자유무역주의가 지지를 받고 반대로 불황기에는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한다는 뜻이다. 1870년대의 대불황이 열강을 제국주의 국가로 만들었고 1930년대의 대공황이 2차 대전의 원인이 된 것처럼, 1970년대 초반 석유파동과 뒤이은 세계적 공황은 국제경제 질서를 다시 보호무역주의로 선회시킨다. 신자유주의와 동반한 신보호주의의 대두가 바로 그것이다. 과거 중상주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제 세계는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채 무한 범위의 무역전쟁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신보호주의가 대두하게 된 계기는 석유파동에 앞서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경제긴급조치다. 누적되는 국제수지 적자를 견디지 못한 미국이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의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환율 조정에 합의해 이 조치를 취소했지만, 이를 계기로 국제통화체제는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이행하게 된다. 전후 자유무역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 신보호주의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신보호주의 대두

요즘 세계 경제의 가장 중요한 화두, 아니 가장 심각한 근심거리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 부과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자 중국도 128개 품목의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30억 달러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대응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미·중 통상마찰의 한 가운데에 돼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미국산 돼지고기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국제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산 돼지고기의 두 번째 수입국이다. 이 일이 재미있다는 뜻은 지난 선거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10개 주 가운데 8곳에서 트럼프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휘두른 무역전쟁의 칼날이 트럼프의 목을 겨냥해 돌아온 셈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미국산 대두에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나섰지만, 그에 따라 사료와 식용유 가격이 상승하면 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세계가 미·중 무역전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당연히 세계 경제에 미칠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역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단기적으로는 국가의 이익이든 국왕의 이익이든 특정한 계급의 이익이든 보호무역이 누군가의 이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무역전쟁에 승자는 아무도 없고 패자만 있을 뿐이다. 두려운 일은 한 때나마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었던 세계가 다시 더 큰 교훈과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결과는 과거에 일어났던 것보다 더 처참한 비극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 곡물법 - 영국에서 외국 곡물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제한한 여러 법률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최초의 곡물법은 1660년에 제정돼 1804년까지 유지됐다. 곡물법은 1815년과 1828년에 개정됐다가 1849년에 최종 폐지됐다.

1428호 (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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