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News

[프란치스코 교황의 ‘레알폴리틱’] 한반도에서도 현실적 종교 정치인 역할 할까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국과의 수교 문제에 관여하고 추기경 성추문에도 휘말려...문재인 대통령 제안에 방북 의사 밝혀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미지가 올해 들어 사뭇 변하고 있다. 교황은 정의와 평등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신자는 물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려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중국과의 관계 개선, 성추문 관련 오락가락 발언 등으로 이미지가 변하고 있다. 성자의 분위기라기보다 ‘레알폴리틱(Realpolitik)’ 전략을 구사하는 ‘현실적인 종교 정치인’의 이미지다.

성자보다 정치인 분위기 풍겨


▎신도들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는 프란체스코 교황. / 사진:연합뉴스
레알폴리틱은 ‘현실정치’를 뜻하는 독일어로, 이데올로기나 이상·윤리는 물론 감정·형식·관례 등을 가급적 배제하고 이해득실만 따져 권력이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국가 간 외교에서는 철저하게 국익을 추구하는 태도와 행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가 프로이센 외무장관(1862~1890년)과 총리(1873~1890년), 그리고 독일제국의 총리(1871~1890년)로 일하면서 독일 통일(1871년)과 그 유지라는 국가 이익을 지키기 위해 펼쳤던 치열하고도 치밀했던 정치와 외교 전략이 대표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레알폴리틱 정치인으로 변화하는 조짐을 보여왔다. 2016년 2월 중국에 손짓을 한 것이 그 시초로 평가된다. 당시 교황은 중국 최대의 명절이라는 춘제(春節·설날)을 맞아 시진핑 국가주석과 모든 중국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했다. 바티칸이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바티칸은 현재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17개국 가운데 하나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한 수교국이다. 바티칸은 일찍이 신해혁명으로 1912년 중국에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와 1922년 수교하고 베이징에 대표부를 설치했다. 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는 중국 교구를 설치하면서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에 주중화민국 바티칸 대사관의 문을 열었다.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이다. 하지만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배해 1949년 대만으로 밀려났다. 난징의 바티칸 대사관은 같은 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남아 1951년 9월까지 중국 대륙에 머물렀지만 중국 공산당에 의해 추방돼 홍콩을 거쳐 이듬해 대만으로 옮겼다.


▎2016년 10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국 장쑤성 쑤저우 교구의 쉬훙건 주교를 접견하고 중국 교인들과 기념 촬영했다. 중국 정부가 임명한 주교와 교황이 함께한 이례적인 만남이었다. / 사진:연합뉴스
1967년엔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가톨릭 중국 주교단’을 결성했고 1998년엔 ‘가톨릭 대만지구 주교단’으로 개칭했다. 바티칸이 중국에 1922년과 1946년에 각각 설치한 외교공관과 중국 교구는 물론 바티칸이 인정하는 중국 가톨릭의 정통성은 현재 대만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 주석과 모든 중국인에게 인사를 보낸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은 물론 중국공산당 총서기 및 국방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 정치 집단이다.

뿐만 아니라 바티칸은 외교적으로도 대만만 승인하고 있다. 바티칸이 만일 중국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면 중국이 강요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 단교해야 한다. 오랫동안 바티칸의 중국 내 외교 정체성을 유지했던 주대만 대사관도 당연히 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종교 자유를 인정하고 상당수 공식 신자가 있는 대만이라는 민주국가를 포기하고 이익을 위해 중국을 선택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더구나 중국과 바티칸은 가톨릭 사제와 주교에 대한 임면권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왔다. 이는 양국이 수교를 하지 못하는 핵심 문제다. 바티칸은 전통적으로 모든 교구 조직과 사제를 휘하에 두고 직접 통솔하고 있다. 이는 교황의 고유 권한이며 바티칸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종교를 정부 통제 하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이와 함께 과거 청나라 말기 여러 가지 종교와 관련한 내란으로 나라가 피폐해져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게 됐다는 역사적 교훈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물론 종교보다 봉건 지배체제의 문제 등 다양한 요인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현재 중국에 남은 가톨릭의 주교 임명은 바티칸이 아닌 중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 불교의 성직자도 정부가 임명하고 있다. 윤회 사상을 중시하는 티베트 불교는 고위 성직자가 세상을 떠나면 몇 년 후 전국을 뒤져 어린이 중에서 해당 성직자가 환생한 인물을 찾아내 그 자리를 잇게 하는 전통이 있다. 환생 인물 확인 작업은 생전의 해당 성직자와 교류가 있거나 잘 아는 종교적인 인물이 맡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 불교의 핵심 성직자는 인도로 망명한 상태다. 중국은 국내에 남았다가 세상을 떠나든, 인도로 망명해서 삶을 마치든 상관하지 않고 티베트 불교의 핵심 성직자가 환생한 인물을 정부 주도로 찾고 있다. 환생 인물 확인과 성직자 계승은 종교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중국은 이들 정부 주도로 하고 있다. 만일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중국의 티벳 불교 신자 중 한 어린이를 환생한 인물로 지명해 중국 정부가 교육시켜 뒤를 잇게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티베트 불교를 다시 중국 정부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시대를 열 수 있다. 만일 인도로 떠난 망명객들이 이에 반발해 환생 인물을 별도로 지명하면 달라이 라마라가 환생한 인물이 동시에 2명이 존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종교적 신비는 깨지고, 단합 대신 분열의 시대가 열리며, 권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그런 혼란을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 정부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티베트 불교 망명 정부를 무력화할 수 있으니 정치적으로도 이익이다.

중국 정부는 가톨릭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 바티칸이 중국의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부가 인정한 주교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바티칸은 중국 정부가 임명한 주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바티칸은 중국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를 휘하에 둘 수 있도록 해야 중국 정부와 공식 수교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왔다. 중국도 중국 내 가톨릭 주교는 정부가 임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아 양측이 계속 평행선을 달려왔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월 17일 “중국이 교황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대신 바티칸은 중국이 임명한 주교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양국 간 이견을 해결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두 나라가 이견을 해소하면서 정식으로 수교가 이뤄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에는 정부가 임명한 7명의 가톨릭 주교가 있는데 이들은 현재 교황의 임명이나 허가, 또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조치를 두고 거대한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중국이라는 나라를 지배하는 무신론자 공산당 앞에 가톨릭의 수장이 고개를 숙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교황은 종교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던 가톨릭 공동체의 의지와 신념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일부의 비난에 시달릴 수도 있다.

인구 증가 속도보다 복음화 속도 더뎌


▎2017년 8월 교황청 서열 3위인 조지 펠 추기경이 아동 성범죄 혐의로 호주 경찰에 기소된 지 1주일 만에 교황 측근 프란체스코 코코팔메리오의 비서가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됐다. 추문에 휘말린 암울한 교황청 분위기를 반영하듯 바티칸 성베드로 바실리카 성당 위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사실 바티칸이 발간한 ‘2015 교회 통계연감’에 따르면 세계 가톨릭 신자 숫자는 12억8500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17.7%다. 21세기 들어 신자 수는 매년 1% 정도 늘고 있지만 인구 중 가톨릭 신자 수를 가리키는 복음화율은 오히려 감소세다. 인구 증가 속도보다 복음화 속도가 더디다는 이야기다. 대륙별로 보면 아메리카 대륙이 63.7%, 유럽이 39.9%인 반면 아시아 대륙은 3.2%에 불과하다. 아시아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신자 중에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냉담자가 적지 않다. 특히 유럽에선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가 적어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 가톨릭의 고민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앞으로 신자가 급속하게 늘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곳으로 인식된다. 현재 중국 본토의 가톨릭 신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00만 명 정도로 알려졌다. 13억 인구의 1%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가톨릭 수장인 교황을 인정하고 바티칸과 수교할 경우 신자는 빠른 속도로 늘 가능성이 크다.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물질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영성적으로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만의 가톨릭 인구는 전체의 1.3%인 30만 명선이다. 기독교 전체로는 3.9%다.

교황은 올해 들어 사제 성추문 의혹으로도 곤욕을 치렀다. 7월 28일에는 성추문 의혹을 받아온 미국의 고위 성직자 시어도어 매캐릭 추기경의 사표를 수리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도와 속죄 속에서 생활하라고 명령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물론 미국 사회에서도 권위를 인정받고 신망이 높았던 매캐릭 추기경은 미성년자와 성인 신학생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미국 가톨릭 교회는 의혹을 조사한 후 그가 50년 전 11세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의혹이 신빙성이 높다는 조사 결과를 6월 말 발표했다. 바티칸은 이 보고가 나온 직후 그를 가톨릭의 모든 공적 직무에서 배제했다. 매캐릭 추기경은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2001~2006년 워싱턴 대주교를 지내다 공식적으로는 은퇴했다. 추기경은 가톨릭의 교황 다음 가는 가톨릭의 최고위이다. 따라서 매캐릭 추기경은 미국 가톨릭 사제 중 최고위 인물로 미국에서는 물론 국제사회에도 명성이 높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톨릭 인사라는 이야기다. 최근에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인권보호 활동 등을 해왔다. 그런 거물을 교회재판이 미처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 추기경직 사퇴를 수락하고 속죄 명령을 내린 것은 그만큼 사정이 급박했다는 이야기다.

과거 2013년 신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은 키스 오브라이언 추기경의 경우 교황청 조사단이 조사를 마치고 2년 후에야 사임을 수락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번의 경우 교황이 단호한 단죄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사태가 더욱 큰 불길에 휩싸일 것을 우려할 정도였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신학생 시절 매캐릭 추기경과 한 침대에서 자도록 강요받았다는 폭로가 잇따랐다. 매캐릭 추기경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그에 대한 존경심은 물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중의 신뢰마저 손상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추락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을 뿐 아니라 교황에게도 뼈아픈 정치적인 타격이었다.

이런 가운데 허핑턴 포스트는 지난 8월 바티칸 고위층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매캐릭 추기경의 성폭력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의 주장을 보도했다. 가톨릭 보수주의자인 비가노 대주교는 바티칸 주미 대사 등을 거친 고위 성직자로 바티칸 사정에도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바티칸 고위층이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2005~2013년) 시절인 2000년부터 매캐릭의 성추문을 인지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매캐릭이 신학대학생을 침대에 끌어들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추기경에 임명했다는 이야기다. 베네딕토 16세는 2009~2010년 무렵 매캐릭에게 평생 속죄와 기도하며 살라고 명령하면서도 공적 임무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3년 즉위한 후 이 사실을 알게 됐으나 이를 무마하려고 시도했으며 오히려 그런 매캐릭에 대한 근신 조치를 사면했다고 주장했다. 비가노는 이를 ‘침묵의 공모’로 부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임을 요구했다. 교황이 사제로부터 사임을 요구 받는 것은 이례적이다.

카톨릭의 성추문은 매캐릭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배심은 지난 70년 이상에 걸쳐 6개 교구에서 사제 300여 명이 1000명이 넘는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교회는 이를 은폐했다고 보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추문이라는 수렁에 빠진 형국이다. 그렇다면 교황은 그런 매캐릭을 왜 오랫동안 단죄하지 못했을까. 매캐릭이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뒤 바티칸으로부터 각종 임무를 부여 받고 중국 등으로 출장을 다녔다는 사실에서 그 맥락을 짐잘할 수 있다.

매캐릭의 성추문 묵인?


▎지난 10월 18일 바티칸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을 프란체스코 교황이 반기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매캐릭은 특히 2014년 미국·쿠바 회담 당시 중재자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다. 쿠바는 1961년 단교했던 미국과 바락 오마바 대통령 재임 시기인 2014년 12월 53년 만에 재수교에 합의했으며 2015년 워싱턴에 대사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쿠바와 미국은 2013년 6월부터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비밀 협상을 했다. 교황의 명령을 받은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가 협상 중재자 역할을 했는데 바로 매캐릭이었다. 첫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자 진보적인 교황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과 쿠바 재수교 협상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심부름을 미국에서도 영향력이 큰 매캐릭 추기경이 맡았다는 이야기다. 매캐릭 추기경은 진보 교황 프란치스코의 손발 역할을 한 셈이다. 매캐릭이 중국에 자주 들락날락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바티칸과의 수교 관련 협상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있다.

중국과의 수교 문제와 성추문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빠져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에는 한반도 문제라는 과제까지 떠안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신 전한 북한의 방북 초청 의사를 듣고 “공식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가톨릭 수장인 교황이 가톨릭 사제도 없는 북한 땅을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방문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극복해야 할 수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2014년 한국을 방문했던 교황이 앞으로 이런 문제에 어떤 해법을 내놓으며 한반도에서 레알폴리틱을 펼칠지 주목된다.

1456호 (2018.10.29)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