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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새 대통령 보우소나루는 누구인가] 경제·치안 앞세운 ‘반부패의 아이콘’ 

 

채인택 중앙일보 기자
트럼프와 두테르테 합친 듯한 이미지… 선거 과정에서 군부통치 시절의 질서·안정·성장 강조

▎보우소나루 후보 당선에 열광하는 지지자들. / 사진:연합뉴스
올해 라틴아메리카의 최대 관심사는 2017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로 국내총생산(GDP) 세계 8위인 브라질과 세계 15위인 멕시코의 대선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대표하는 두 경제 대국의 대선은 공통점이 적지 않다. 우선, 대선 최대 이슈가 모두 ‘부패’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나라가 올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주목할 점은 온건 중도가 힘을 잃고 우파나 좌파의 ‘편향’ 정책을 내세운 후보가 당선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당선자의 정치적 성향은 브라질이 우파인데 비해 멕시코는 좌파라는 점이 다르다.

지난 10월 7일 대선 1차 투표에 이어 28일 결선투표를 치른 브라질의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다. 결선투표에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던 사회자유당(PSL) 소속 자이르 보우소나루(63) 후보가 전통의 좌파 노동자당의 페르난두 아다지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보우소나루는 55%를 득표해 상대인 아다지 후보보다 10%포인트를 앞섰다.

전통의 좌파 후보 물리치고 당선


▎극우 성향의 보우소나루는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아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보우소나루는 대선 과정에서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우선 그는 ‘반부패의 아이콘’이 됐다. 보우소나루는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장교로 근무했는데, 1986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군 비리를 고발하면서 ‘부패의 내부고발자’로 명성을 얻었다. 1988년 리우데자네이루 시의원을 시작으로 1990년 연방 하원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부패가 만연한 브라질에서 비리 고발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부패가 최대 이슈인 선거에서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질적인 부패에 물들지 않은 인물로 비쳤기 때문이다. 기존의 좌우 정치 권력이 보여준 기득권에 질려 있던 국민에게 그의 ‘아웃사이더’ 이미지는 득표 요인이 됐다.

문제는 보우소나루 당선인은 과거 군부 통치를 미화하는 극우 성향의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보우소나루는 대선 유세 과정에서 과거 군부통치 시절의 질서와 안정, 성장을 강조하며 “대통령이 되면 주요 자리에 군 장성들을 임명하겠다”라고 공약했다. 유세 과정에서 등장한 그의 발언을 들어보면 정치 성향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보우소나루는 특히 1985년 무너진 군부독재를 대놓고 찬양했다. 그는 의회의 비효율과 정쟁을 비난하며 “곧장 독재로 가자” “사람들을 고문하지도 죽이지도 않은 것은 독재 정권의 실수”라는 막말을 대놓고 해왔다. 의회의 비효율을 고치는 방법으로 군부독재를 내세운 것이다.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이다. 정책을 비판하면 ‘그럼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냐’고 비판하는 것인데, 여기서 보우소나루는 실제로 현재 정치 시스템을 비난하면서 군부통치 시절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보우소나루가 이유 없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 것을 콕 집어내고 이에 대한 처방과 비전으로 과거의 군부통치 시절을 제시했다. 선거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보우소나루는 국민의 최대 불만인 불안한 경제와 치안 해소를 약속하면서 과거 군부통치 시절을 거론하는 전략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경제난으로 고통 받는 국민에게 “군부통치 시절엔 경제가 성장했다”라며 당시의 경제 안정을 강조했다. 그는 성장과 고용 확대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경제 성장을 자극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기업의 대대적인 민영화를 내세웠다.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거액의 민간 자본이 몰리면서 경제에 윤활유 노릇을 할 것이란 점을 지적했다.

공기업의 대대적 민영화 공약


보우소나루는 국민의 최대 불만인 치안 문제도 중점 거론했다. 그는 “적어도 군사정권 시절에는 거리가 안전했다”는 말로 극심한 치안 불안에 떠는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브라질의 치안 불안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라는 노래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파네마의 해변은 이미 강도의 소굴로 변해 ‘관광객이 절대 가선 안 되는 지역’ 명단에 필수적으로 오른 지 오래됐다. 브라질의 평범한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강도를 당하는 일은 뉴스 축에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다. 도심에서 갱단의 총격전이 벌어지기 일쑤다. 무장경찰과 군인이 갱단의 본거지인 빈민촌으로 진입해 작전을 펴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17년 한해 6만 명이 넘었다. 엘살바도르와 함께 남미 최악의 치안 불안 국가로 꼽힌다.

보우소나루는 이런 현상 앞에 개탄만 해대는 다른 정치인과 달랐다. 그는 ‘강한 경찰력이 국민을 지킨다’ 등의 말로 초강경 대응만이 범죄로부터 국민을 구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당시에 치안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거론하며 “대통령으로 당선하면 무장 군인을 투입해 거리 순찰을 맡기겠다”라고 공약했다. 이 과정에서 ‘흉악범은 즉시 사살한다’ ‘미성년도 가차 없이 처벌한다’ 등 법을 넘어서는 막말이 이어졌다. 범죄가 만연한 필리핀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범죄자를 가차 없이 사살해 인권 침해 논란을 빚은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다. 반대파들은 그를 두고 ‘라틴 아메리카의 두테르테’라고 비난했지만 치안에 목마른 유권자들의 표는 오히려 보우소나루에 몰렸다. 범죄자의 인권보다 국민 인권이 우선이라는 그의 주장은 오히려 득표 요인이 됐다.

하지만 보우소나루가 군부통치를 거론한 것은 감정을 자극하는 선거 전술로는 효과를 거뒀는지 몰라도 역사를 후퇴 시킨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브라질 역사에서 군사정권은 오랜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군부독재는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시작된 브라질의 공화정은 브라질을 군부독재로 얼룩지게 했으며 남미 전체로 파급됐다. 브라질인의 군부독재 트라우마를 알려면 이 나라 역사를 잠시 살펴봐야 한다. 브라질의 근·현대사는 포르투갈 왕국의 식민지(1500~1822년)와 브라질 제국(1822~1899년), 공화정 수립과 군부독재(1899~1985년), 그리고 현재의 민주화 시대로 나뉜다. 이 나라는 1500년 포르투갈인이 들어오면서 식민지가 됐는데, 1808년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본국의 수도를 유치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동맹이던 포르투갈의 왕실은 1808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가 침공해오자 브라질로 몸을 피했다. 그러면서 포르투갈의 수도를 아예 리스본에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임시 이전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군주는 마리아 1세(1734~1816, 재위 1777~1816) 여왕이었는데 정신질환이 있어 아들 주앙(1767~1826)이 일찌감치 1799년부터 섭정 왕자로서 국가를 운영했다.

주앙은 1914년 영국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등으로 이뤄진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이 라이프치히 등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치자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듬해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황급히 대서양을 다시 건넜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 패전으로 몰락했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당장 돌아가지 않았다. 그해 아예 나라 이름을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스 연합왕국’으로 바꾸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정식 수도로 삼았다. 알가르베스는 포르투갈 남부지방을 가리킨다. 이후 브라질은 식민지가 아닌 연합왕국의 중심지가 됐다. 주앙은 1816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브라질에서 주앙 6세로 즉위했다.

주앙 6세는 1820년 본국에서 자유주의자 혁명이 일어나자 돌아가서 이를 진압했다. 뒤에 남아 브라질 섭정을 맡았던 주앙 6세의 아들 페드루는 1822년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을 세워 초대 황제가 됐다. 부왕과 달리 자유주의를 옹호했던 그는 의회를 만들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으며 1824년 헌법도 반포했다. 브라질은 남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군주국으로 독립한 것은 물론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인 유일한 나라가 됐다. 1825년 본국의 주앙 6세도 마지못해 브라질의 독립을 승인했다. 브라질의 기묘한 역사다.

브라질 제국은 2대 69년 간 유지되다 1889년 군사쿠데타로 무너져 ‘브라질 합중공화국’이라는 공화국이 됐다. 1967년에는 국명을 브라질 연방공화국으로 바꿨으며 현재도 이 명칭을 유지한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군주제를 타파하고 들어선 브라질 공화국에서 남미를 괴롭힌 쿠데타와 군부 독재가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193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제툴리우 바르가스(1882~1954)는 군부독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930~45년 대통령을 지내면서 경제 성장을 이뤄 인기가 높았으며 축구로 국민 통합을 시도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축구 열기는 군부 독재의 민심 공략 수단이었던 셈이다.

군주제 타파했지만 군부 독재 시작

바르가스는 좌우 모두의 도전에 맞서면서 자리를 지킨 권력 오뚜기였다. 1935년 공산주의자들에 이어 1938년에는 파시스트들이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모두 물리쳤다. 하지만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속담처럼 걸맞게 1945년 또 다른 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바르가스는 브라질에 기묘한 역사를 더했다. 1950년 최초로 치러진 민주 선거에서 민선 1호 대통령에 당선해 자신이 브라질의 정치적인 오뚝이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쿠데타 주역이 또 다른 쿠데타로 쫓겨났다가 민주 선거로 민선 1호 대통령이 된 것은 유례가 없다.

바르가스는 재임 초기 경제 발전을 이끌어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인기는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바래갔다. 더욱 극적인 것은 브라질 역사만큼 널뛰기를 계속했던 바르가스의 비극적인 최후다. 바르가스는 1954년 경제난에 이어 측근 비리까지 겹치면서 사방에서 사임 압박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군부 독재로 정치 경력을 시작해 경제 발전으로 인기를 모으다 경제난과 측근 비리로 실패한 민선 대통령이 된 셈이다. ‘풍운아’ 바르가스의 삶은 브라질의 비극을 상징하며 역사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20세기 브라질 역사에서 민정은 짧고 군정은 길었다. 1964년에는 카스텔로 브랑코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해 군사독재가 다시 시작됐다. 브랑코 정권은 ‘친미반공’과 ‘외국자본 유치’에 주력했다. 군사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비도적이었다. 국민의 뜻을 외면한 군부 독재는 끝내 지지를 잃고 자멸했다. 군사정권은 1985년 끝나고 다시 민정으로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정으로 정권 교체 후 브라질의 최전성기가 시작됐다. 2003년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좌파 대통령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3)는 우파의 전유물이었던 경제 성장을 자신이 이끌어 나라를 역사상 최전성기로 올려놨다는 평가를 얻는다.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룰라는 ‘왼쪽의 길’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지향했다. 좌파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노동자·농민·빈민 외에 중산층까지 끌어안아 정치적인 지평을 넓혀 정권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 지지자들에겐 기초 복지 혜택과 교육의 기회를 확충해 인간적인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선물했다. 중산층에겐 경제 발전을 선사했다.

룰라는 이전의 우파 정권이 마련한 경제개발 정책을 계승하고 이를 잘 운영해 브라질을 세계적인 고도성장 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브라질의 첫 좌파 대통령이 경제 부흥과 성장을 주도했다. 성장을 통해 빈민을 줄이는 정책이기에 지지층도 환영했다. 민주주의를 되찾은 브라질이 안정적인 발전기에 접어든 셈이다. 브라질이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룰라 시절의 성장 드라이브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브라질과 러시아·인도·중국 등 신흥 경제국가를 가리키는 ‘브릭스’라는 용어가 세계적으로 일반화한 것도 룰라 시절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더하기도 한다.

2006년 재선해 8년 간 대통령에 재임했던 룰라는 같은 노동당 소속의 후계자 지우마 호세프(71)가 2010년 대선에서 당선해 2011년 대통령 취임하자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세프 대통령이 2016년 8월 31일 상원에서 탄핵을 당하자 이를 격렬히 비난하며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탄핵 사유는 2014년 재선 당시 재정 적자를 숨기기 위해 국가 회계장부를 조작한 혐의였다. 탄핵을 주도한 브라질민주운동당 소속 미셰우테베르(78) 부통령이 잔여 임기를 이어 받았다. 하지만 테메르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자신이 탄핵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임기 내내 언제 그만두고 감옥에 갈지 모르는 부패하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국민의 비난과 조소를 한 몸에 받았다.

테메르가 이끄는 브라질민주운동당은 군부 독재가 무너진 후 1979년 다당제를 허용하는 정당개혁법이 나오자 이듬해 창당된 정당이다. 군부 독재 시절 ‘체제 내 야당’을 내세웠던 브라질민주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반군부 세력’이 집결한 정당이다. 보수주의자와 포퓰리스트에 자유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심지어 좌익 게릴라 출신까지 이 정당에 합류했다. 좌우를 망라한 다양한 스텍트럼의 정치인이 ‘반군부’라는 공동의 구호로 모인 ‘잡탕’ 정당이기 때문에 정책적으로는 중도를 내세운다. 하지만 지향하는 이데올로기 없이 눈앞의 정치적인 이익만 추구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브라질 하원 의석 513석 중 13%인 68석, 상원 의석 81석 중 22%인 16석을 차지하고 있다.

좌파를 대표하는 노동자당은 이번 대선에서 룰라 전 대통령을 출마시키려고 했지만 무산됐다. 브라질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중임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두 차례 연속 당선된 대통령은 다음 선거에는 나오지 못하지만 차차기 선거에는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룰라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좌파의 희망으로 유력 후보였다. 퇴임 당시 지지율이 87%였던 것과 비교하면 ‘추락하는 영웅’이긴 하지만 룰라는 올 초 후보군 가운데 가장 높은 36%의 지지율을 얻었다. 하지만 부패 스캔들이 끝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올해 1월 24일 지역 연방법원에서 열린 뇌물수수 혐의 2심 재판에서 징역 12년 1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출마를 해도 옥중 출마가 되기 때문에 유세를 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8월에는 법원이 “부패 혐의로 재판 중인 룰라는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라고 최종 결정했다. 다급해진 노동자당은 ‘젊은’ 정치인 페르난 두 아다지(55)를 후보로 내세웠다. 룰라와 호세프 집권 시절인 2005~2012년 6년 6개월 간 교육부 장관을 지니며 빈민층의 교육 기회 확대에 주력하고 2010~2017년엔 사웅파울루 시장을 지낸 좌파의 차세대 유망주다. 교육 기회 확대는 경제 성장과 함께 룰라에서 호세프로 이어지는 브라질 좌파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된다. 사웅파울루는 인구 1210만 명(교외까지 합치면 2160만 명)으로 브라질 최대 도시다. 이런 장점이 있는 아다지는 노동자당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아다지는 브라질 공산당 소속의 여성 정치인 마누엘라 다빌라(37)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청년 표몰이에 주력했다. 하지만 아다지는 룰라만큼의 흡인력은 갖추지 못했다.

여성과 소수민족 혐오 우려

결국 이런 상황은 극우 성향의 보우소나루에게 당선을 안겨줬다.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그에게 내년 1월 1일부터 4년 간 나라를 맡겨야 한다. 특히 염려되는 것은 그가 브라질을 분열의 나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보우소나루의 지금까지의 발언은 이런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는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한 여성 의원에게 “당신은 너무도 못생겨서 강간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말을 퍼부어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을 정도다. 심지어 “여성과 흑인은 국가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라는 말로 아프리카계 브라질인과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기도 했다. 브라질은 유권자의 50%가 여성이 차지하긴 하지만 ‘파르두’로 불리는 혼혈인, 또는 갈색인종도 43.13%로 비슷한 비율이다. ‘네그루’로 불리는 아프리카게 브라질인이 7.61%이고, 노랗다 또는 황인종이라는 뜻의 ‘아마렐루’로 불리는 동아시아계도 0.43%가 있다. 아마렐루는 일본과 한국의 이민이 주류다.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가 서로 차별이나 대결 없이 공존과 화합의 문화를 건설해온 대표적인 나라가 브라질이다. 이런 나라에서 여성과 특정 인종을 내놓고 비하한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한 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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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호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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