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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15) 위혜왕의 어리석음] 눈앞의 이익 좇고 인재는 내쫓아 

 

김준태 칼럼니스트
동시다발적으로 전쟁 일으켜 백성 피폐...전국시대 첫 패자 위나라 몰락 부추겨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선생께서 천리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왕림하셨으니 장차 무엇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시겠습니까?”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유교의 경전 [맹자(孟子)]는 위와 같은 대화로 시작한다. 맹자를 초빙한 위(魏)나라의 군주 혜왕(惠王)이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자 맹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시면 그 아래 대부(大夫)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할 것이고 또 그 아래 사(士)와 서인(庶人)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취하려 드니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윗사람이 물질적 이익을 중시하게 되면 구성원들은 서로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려고 다투게 된다는 것이다.

맹자로부터 질책 받아

철없는 질문을 던졌다가 맹자로부터 질책을 당한 것이지만 혜왕이 저렇게 말한 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혜왕의 저 질문 앞에는 부연설명이 붙는다. “과인이 재주가 없어서 세 번이나 군대를 밖에서 잃어버렸습니다. 태자는 사로잡혔고(다른 기록에는 죽었다고 되어 있다), 상장군이 전사하였으며 나라가 텅 비어버렸습니다. 선왕과 종묘사직을 욕되게 하였으니 과인은 매우 부끄럽습니다.” 당시 위나라는 제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태자와 총사령관을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군대 역시 괴멸당하다시피했다. 이듬해에는 진나라에 참패하여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기고 수도를 옮겨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이 때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겼다고 하여 위혜왕을 양(梁)혜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나라가 존망의 갈림길에 내몰린 상황에서 혜왕은 당장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부국강병의 방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묘책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할아버지인 위문후 대에만 해도 천하를 호령했던 위나라가 혜왕의 대에 와서 급격하게 몰락한 이유는 다름 아닌 혜왕 자신의 어리석음에 있었다.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외교전략의 실패다. 위문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나라·한나라와 연합했고 초나라와 제나라를 견제하되 화친을 유지했다. 덕분에 진(秦)나라와의 서쪽 국경에 오롯이 국방력을 집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혜왕은 한나라와 조나라를 공격한 데 이어 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송나라를 침략했고 진나라와 교전했다. 초나라와도 긴장 관계에 놓였다. 위나라를 둘러싼 모든 나라와 전쟁을 치른 것이다. 더욱이 혜왕은 조나라를 거듭 공격하고 핍박함으로써 조나라와 제나라가 연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을 촉발하곤 했다. 진나라 하나와 맞서 싸우려고 해도 온 나라의 힘을 모아야 하는 마당에 오히려 사방팔방으로 힘을 분산해버린 것이다.

다음으로 혜왕은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맹자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인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곳 백성을 하동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옮겨가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서는 곡식을 풀어 구휼해주었습니다. 하동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과인의 백성은 늘어나지 않는 것인지요? 이웃 나라를 살펴보면 과인처럼 마음을 쓰는 자가 없는데도 백성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어질고 의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애쓰고 있지만 백성이 늘지 않고 국력이 약해지니 걱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이없는 말이다. 혜왕의 재위 36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해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것도 다른 나라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혜왕이 먼저 일으키거나, 공격을 유발한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놓고서는 백성이 늘지 않는다며 푸념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혜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을 양식을 먹어도 단속할 줄 모르며 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창고를 열어 구제하지 않는다. 사람이 굶어 죽으면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임금의 푸줏간에는 살진 고기가 마구간에는 살진 말이 있는데 백성은 굶주린 기색이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했다.” 백성의 삶을 살피지 않았고 임금으로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전쟁을 멈추지 않는 혜왕에게 맹자는 “백성들이 이웃 나라보다 많아지길 바라지 말라”며 일갈한 바 있다. 서두에서 소개한 대로 이로움을 묻지 말고 인의(仁義)를 중시하라고 꾸짖은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혜왕은 죽는 순간까지 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혜왕은 인재를 보는 안목에서도 어리석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인재를 활용하지 못했다. 혜왕의 재위 초기 재상이었던 공숙좌는 죽음을 앞두고 위앙이라는 사람을 후임자로 추천했다. 그러나 혜왕은 “공숙좌가 오랫동안 병을 앓더니 헛소리를 하는구나! 위앙 같은 자가 뭐라고 재상으로 삼는단 말인가? 공숙좌는 참으로 어리석구나!”라며 코웃음을 쳤다. 얼마 후 위앙은 진(秦)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고 위혜왕의 군대를 대파한다. 이 사람이 바로 변법(變法)개혁을 통해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닦은 상앙이다. 이 일을 두고 [전국책(戰國策)]은 “어리석은 자의 병폐란 바로 어리석지 않은 자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데에 있다”라며 혜왕을 비판하였는데, 실로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혜왕이 놓친 인재는 또 있다. 혜왕은 귀곡자(鬼谷子)의 제자 방연과 손빈을 등용했는데, 손빈을 질투한 방연의 모략에 빠져 손빈에게 무릎 아래 두 발을 잘라내는 형벌을 내렸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제나라로 탈출한 손빈은 위나라를 존망의 기로로 내모는 주역이 된다(상앙과 손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16~17회에서 차례로 다룬다). 이 밖에도 위혜왕은 오락가락하는 행동과 무책임한 태도로 맹자와 순우곤·추연 등 당대의 명사들을 실망하게 해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달변으로 자신을 현혹한 혜시(惠施)같은 인물만 중용한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실패에서 배우지 못해

요컨대 위혜왕은 국가 경영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을 좇으며 그저 닥치는 대로 대응했다. 이 상황이 통제가 가능한 것인지를 헤아려보지 않고 무작정 전쟁을 일으켜 패배를 자초했다. 나라 안에 있는 좋은 인재들을 제대로 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인재들이 위나라를 향해 칼끝을 돌리게 했다.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고, 겉으로만 듣는 척했을 뿐 인재들의 조언을 따라 실천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어리석음이 전국시대의 첫 번째 패자 위나라를 순식간에 쇠락하게 만든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 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61호 (201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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