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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40년의 중국은 어디로] 경제적 번영 이루고 중화제국 야심 드러내 

 

국제적 영향력 확대, 군사력 증강 잰걸음… 미국과의 패권전쟁 결과 주목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기념식’ 전경. / 사진:연합뉴스
2018년 12월로 40주년을 맞은 중국의 개혁개방(改革開放)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엄청난 성공을 안겨줬다. 개혁개방 이래 40년 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31배로 증가했다. 미국 매체 ‘지제로(GZERO) 미디어’가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미국 정치학자 이안 브레머가 운영하는 유라시아그룹의 인터넷 매체다. 같은 기간 그나마 경제가 고성장했다는 한국(약 17배)·브라질(약 7배)·인도(약 7배)·말레이시아(약 6배)·미국(약 5배)·독일(약 4배)·일본(약 4배)·멕시코(약 3배)·남아프리카공화국(약 2배)과 비교해도 월등한 성장이다.

이런 경제 성장의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다. IMF 통계에 따르면 2017년 중국의 GDP는 명목금액 기준 12조146억 달러로 미국(19조3906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개혁개방의 최대 성과다. 중국이 오랫동안 부러워했던 경제대국 일본(4조8721억 달러)·독일(3조6846억 달러)·영국(2조6245억 달러)을 3~5위로 따돌린 지 오래다. 중국이 과거 19세기와 20세기 초 부국강병을 이뤘던 이 세 나라를 경제 규모에서 눌렀다는 사실은 중국의 ‘역사적 반격’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역사적으로 이들 나라는 중국과 악연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1840~1842년)과 2차 아편전쟁(1856~1860년) 이후 1997년 10월 1일 0시까지 홍콩과 주룽(九龍) 반도를 식민 지배했다. 청일전쟁(1894~1895년) 이래 만주사변(1931~1932년)과 중일전쟁(1937~1945년)으로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은 중국에 아물기 쉽지 않은 상처를 안겼다. 독일은 1898~1914년 산둥(山東) 반도 남부의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해 식민지로 삼았다. 1세기 이상 경제적·군사적으로 약체의 빈곤 국가였던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강대국의 위상을 되찾은 셈이다.

개혁개방 40년 만에 GDP 기준 세계 2위


▎국가주석 연임 제한을 철폐해 장기 집권 토대를 마련한 시진핑 주석이 미국과의 패권전쟁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관심거리다.
중국은 신흥경제국이라는 인도(2조6110억 달러)·브라질(2조549억 달러)과도 격차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2조5835억 달러)·이탈리아(1조9378억 달러)·캐나다(1조6524억 달러)·대한민국(1조5380억 달러)과는 한참이나 차이를 냈다. 한때 사회주의권 종주국 노릇을 했던 러시아(1조5274억 달러)는 비교 대상도 되지 못한다. 물론 인구는 2016년 추정치 기준 14억350만 명에 이르다 보니 1인당 GDP는 8643달러(72위)로 러시아(1만955달러)·터키(1만537달러)·브라질(9895달러)·말레이시아(9755달러)·멕시코(9318달러)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다. 2018년 추정치 기준으로 중국의 GDP는 14조92억 달러로 세계 2위이며, 1인당 GDP는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 1만87달러(71위)에 이를 전망이다. 물가 등을 감안한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GDP가 25조23800억 달러로 세계 1위, 1인당 GDP는 1만8066달러로 세계 79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개혁개방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경이의 연속이다. 중국의 실권자였던 덩사오핑(鄧小平,1904~1997)이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회 전체회의에서 제안한 게 개혁개방의 시작이다.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가속화했고 대내적으로는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중국의 변혁을 놓고 ‘개혁’인지 ‘체제 혁명’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헝가리의 사회주의 경제 전문가로 고전적 사회주의 체제를 분석한 고전인 [사회주의 체제(The Socialist System)]의 저자 야노스 코르나이는 “공산주의 체제 전환에서 부분적이고 속도가 완만할 경우 이를 ‘체제 개혁’으로, 전면적이고 금속적일 경우 이를 ‘체제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공산당 권력독점 ‘지배적인 공식 이데올로기’ ‘국가적 또는 전인민적 소유형태’의 세 가지로 기준에서 적어도 하나가 근본적으로 변할 때 이를 개혁으로 정의했다. ‘혁명’은 통칭 ‘체제 전환’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가 형성됐을 때를 가리킨다. 체제 전환은 그동안 유지돼온 질서형태가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개혁’은 현재의 집권자와 그와 연합된 국가기구 내부 또는 외부의 그룹에 의해 추진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말한다. 이를 기준에서 볼 때 중국의 개혁개방은 체제 전환이 아닌 개혁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중국의 형식적인 권력자는 화궈펑(華國鋒, 1921~2008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978년 12월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76년 10월~81년 6월)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76년 10월~80년 6월),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76년 4월~80년 9월)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국무원 총리는 마오의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년)가 54년 9월부터 76년 1월까지 맡았던 자리를 이어 받았다.

화궈펑은 권력을 잡은 76년 10월 6일, 과거 문화대혁명(1966년 5월~1976년 12월)을 이끌며 중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이른바 4인방을 전격 체포한 주역이다. 4인방은 배우 출신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이던 장칭, 언론인 출신 장춘차오,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동자 출신 왕훙원, 문학평론가 출신 야오원위안이다. 1981년 재판 결과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왕훙원은 종신형, 야오원위안은 20년형이 선고됐으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장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 개혁개방은 체제 전환 아닌 개혁 범주


화궈펑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실각했다 1977년 복권된 덩샤오핑이 화궈펑의 오류를 비판하며 권력 실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부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정치협상회의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를 맡았다. 덩샤오핑은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쥐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을 겪은 중국을 정상화하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으로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젊은 세대 대부분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신속하게 바로 집지 못하면 중국공산당의 권력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덩샤오핑은 벤치마킹 대상을 찾아나섯다. 부총리 시절이던 1978년 11월 중국 지도자 가운데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리콴유(李光耀·1923~2015년) 초대 총리를 만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덩은 깨끗하고 경제적 활력으로 넘치는 이 도시국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1918년 프랑스로 근공검학(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해서 공부함) 고학생으로 유학 가던 중 목격했던 낙후하고 지저분했던 식민지의 풍경을 기억하는 덩에게 싱가포르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혁신의 현장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싱가포르는 권위주의 체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서구 민주주의 체제 도입 없이도 경제 성장을 이룬 싱가포르에 덩샤오핑이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는 이미 1970년대 후반 상당한 경제·사회 발전을 이뤘다. 이런 싱가포르는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개방 정책 시작 이후 자금과 경제 성장 노하우의 주요 공급원 역할을 했다. 중국사 권위자인 임계순 한양대 명예교수는 저서 [중국의 미래, 싱가포르 모델]에서 “중국의 번영을 이끈 개혁개방 아이디어의 근원지가 싱가포르”라고 강조했을 정도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처음 제안한 역사적인 현장인 1978년 12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자신이 목격한 싱가포르 발전상을 언급했다. 그는 “나의 꿈은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1000개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그가 개혁개방을 통해 최종적으로 원하는 중국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덩샤오핑은 싱가포르를 거울삼아 나라를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했다. 덩샤오핑은 1992년 1~2월 우한·선전·주하이·상하이 남방 지역을 시찰하고 담화를 발표했다. 바로 남순강화(南巡講話)다. 거기에서도 싱가포르를 질서유지의 모범 사례로도 거론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아예 제도적으로 정착해 공고화하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개헌이라는 공식 절차다. 중국 현대사에서 헌법은 긍정적인 의미가 크다. 개정 과정은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마오쩌둥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 헌법은 20년이 지난 75년 첫 개정됐지만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친 개헌에 불과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1977년 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 진행된 여러 차례의 헌법 개정에선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주는 작업이 진행됐다.

특히 1978년 3월의 헌법 개정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사오핑이 작심하고 나선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가 주창한 정책으로 덩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정책이다.

덩의 개혁개방 사상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선부론(先富論)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은 실용주의를 가장 잘 요약하는 내용이다.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은 개혁개방 정책의 실질적인 지침이다. 일방적인 평등화나 평준화를 포기하고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은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인 보수화를 상징한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개혁파와 보수파 간 대립을 반영한 셈이다.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붙이기)를 폐지했다. 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마오쩌둥이 주창해선 인민 동원 방식이었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1982년 개헌도 중국공산당내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해 급진적인 개혁 요구를 제한했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성격이 ‘정치개혁 없는 경제 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그 뒤로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루는 데 치중해왔다.

이런 조치를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샤오핑은 시장경제화 속도를 높였다. 1988년 개헌에선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헌법 11조에 “자영경제·사영경제 등 비공동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임을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자영경제·사영경제 등 비공유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못을 박았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도록 했다.

1993년 개헌에선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경제나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조치다. 중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개혁이다. 19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라고 명시해 중국의 법치를 명문화했다.

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중국이 공산화한 지 55년 만이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의 이념은 인민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설 자리를 잃었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사상’도 헌법적 지위를 얻었다.

중국공산당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했다.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과거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할 계기로 삼았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자본가(홍색자본가)’까지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지만 공산당의 권위는 유지됐으며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중국식 개혁개방이자 개혁이다.

일대일로 정책 펴고 항공모함 보유

중국 헌법은 올해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3월 11일 전국인민 대표자대회의 결의로 공산당의 영도를 강화하고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철폐해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장기 집권 길을 열어놓았다. 개헌을 통해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한 시 주석은 ‘중화제국’ 수립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고대에 동서 세계를 잇던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현대에 복원하겠다는 ‘일대일로’ 정책에는 국제 영향력 극대화 전략이 엿보인다. 총연장 3만㎞에 가까운 고속철도가 선봉에 서있다. 이미 102개국과 진출 계약을 맺었다. 군사력도 전방위로 증강 중이다. 공격용 외에 달리 쓸 일이 없는 고가의 항공모함을 2025년까지 7척이나 보유할 예정이다. 경제 성장으로 대국을 지향하면서도 민주주의나 자유·인권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를 둔다. 더구나 미국과 무역분쟁이 터지자 ‘사실은 개발도상국’이라고 엄살까지 피운다. 시 주석 시대에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이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당연히 한국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중국을 제대로 알고 중국의 미래를 예측하는 자체 역량을 기르며 대비할 때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1465호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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