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파에톤, 슈마허, 그리고 자신감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1. 1990년대 ‘덩달이 시리즈’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말장난 같은 우스개 소리에 한참동안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중 한두 개 예를 들어보자. 덩달이에게 선생님이 짧은 말 글짓기 숙제를 내주었다. 주제는 박진감. 덩달이는 이렇게 써갔다. “박진감. 할머니가 동굴에 들어 가셨다. 천장에 잔뜩 박쥐가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는 이를 보고 ‘웬 박쥔감?’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또 글짓기 숙제를 내주었다. 주제는 자신감. 덩달이는 이렇게 써갔다. “자신감. 할머니께 감을 따다 드렸다. 할머니는 맛있게 드시고 씨만 남겨 놓셨다.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그 씨를 보시고 ‘이거 할머니가 자신 감이냐?’라고 내게 물으셨다.”

#2. 얼마 전 배기가스 수치 조작으로 세계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던 독일의 자동차 회사의 최상급 자동차 모델 이름은 ‘페이튼(Phaeton)’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그리스 신화의 한 인물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바로 ‘파에톤’이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는 이집트의 한 도시에 들렀다가 클리메네라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헬리오스가 떠나간 후 그녀는 임신을 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파에톤, 즉 ‘빛나는 자’라는 태양신의 아들에 걸맞는 이름을 지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어느 날 그 청년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들은 대로 자기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자랑한 결과였다. 심한 투정을 부리자 그녀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헬리오스는 단번에 아들을 알아 보고 아들의 소원은 무엇이든 하나는 들어주겠다고 스틱스강에 맹세한다. 이 강에 맹세하면 절대로 취소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그랬던 것이다. 그러자 파에톤은 아버지가 모는 태양마차를 단 하루만 몰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천마 네 마리가 끄는 태양마차는 헬리오스 자신도 모는 것이 힘들다며 극구 만류했지만 파에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 젊음과 힘을 믿은 나머지 이 마차를 몰 ‘자신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걱정에 가득 차서 마차 길을 자세히 알려주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파에톤은 힘차게 태양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헬리오스라는 무거운 신을 태우고 다니던 말들은 가벼운 인간이 자신들을 조종하자 가벼워진 무게를 즐기기라도 하듯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파에톤은 기겁하기 시작했고 곧 후회가 몰려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3. 골프 등 운동경기에서 선수의 자신감이 성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등 여러 나라의 세계적 여성 골퍼 상당수가 전담 심리학자를 두고 있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신감이 있을 경우가 없을 경우에 비해 더 좋은 성적으로 이어질 것은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도 근거가 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디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겨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태생의 미하엘 슈마허는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로. 은퇴한 지금까지도 자동차 경주의 최고봉인 포뮬러 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월드 챔피언십을 7번이나 차지한 유일한 선수다. 베네통팀 소속으로 1994년과 1995년 연속 우승, 1996년 페라리로 적을 옮긴 후 2000년~200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다가 2012년 최종 은퇴를 선언했다. 2013년 스키를 타다 큰 부상을 당해 지금도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등 은퇴 이후의 삶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지만, 현역 시절 그는 대단한 성적과 함께 대단한 ‘자신감’으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건방지다’는 평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었다. 그는 경주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 하루 4시간 이상을 수영·사이클 등으로 카레이서에 필수적인 목 근육 강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경쟁 선수 연구에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4. 심리학에서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 Kruger Effect)’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인지편향 현상이다. 더닝과 크루거라는 심리학자가 1999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일련의 논문을 통해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발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바로 몇년 전부터 시중에서 회자되는 ‘근자감’이라는 말을 가르키는 것이리라. 이 말은 ‘근거 없는 자신감’의 약어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근거 없는 자신감도 큰 효과를 발휘해서 어떤 사람의 성취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하는 책도 꽤 나와 있다. 전쟁사에서도 이 근자감이 큰 효과를 발휘한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태평양 전쟁 때에도 일본군의 수많은 전투기 에이스들이 미 해군의 파이팅 넘치는 풋나기 파일럿들에게 격추돼 전사한 사례는 그런 예다.

지난 1월 10일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여기자는 “현실 경제가 굉장히 얼어붙어 있다. 국민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면서 “이와 관련해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현 기조를 바꾸거나 변화를 갖지 않으시려는 이유와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다”고 질의했다. 이에 대통령은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왜 필요한지 우리 사회의 양극화, 불평등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라는 점은 오늘 제가 기자회견 30분 내내 말씀드렸다”면서 “정책기조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다는 말은 이미 충분히 드렸기 때문에 새로운 답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이후 이 기자의 질의에 대해 ‘무례냐, 당찬 행동이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정작 이 기자는 나중에 사실 대통령이 “자신있다”라고 답하길 기대했다고 한발 물러선 모습이었다.

이 회견 이후 회견문의 내용 중에 ‘가장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한 나라’나 ‘청년고용률이 역대 최대’ 등과 같은 내용은 잘못됐다는 경제 전문가의 지적이 줄을 이었다. 이는 경제 전문가가 아닌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들이 써준 원고를 믿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대통령의 자신감은 그것이 근거가 있든 없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다. 자신감의 가장 큰 근거이자 자신감이 힘을 가지고 성과로 나타나기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정확한 상황 인식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잘못될 경우 자신감이란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위험한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말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풋내기 조종사들이 일본군의 에이스를 격추시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일본군은 없으나 미 군함에는 있던 레이더의 도움이었다. 미군 조종사들은 처음부터 올바른 공격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지금 청와대의 ‘레이더’는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1470호 (2019.02.04)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