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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vs 파키스탄의 70년 넘은 해묵은 갈등] 종교·영토 분쟁 얽힌 핵 보유국의 화약고 

 

채인택 중앙일보 기자
폭탄 테러→보복 폭격으로 충돌 위기… 추락 조종사 석방하며 화해 움직임

▎인도 공군기 2대가 2월 27일(현지시간)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에서 파키스탄 공군에 격추됐다. 전날 인도의 파키스탄 지역 공습에 대한 보복 공격이다. 인도 군인들이 격추된 인도 공군기 잔해 주변에 모여 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비핵화와 유엔 제재 해제를 둘러싸고 정상회담을 시작한 2월 27일(이하 현지시간) 사실상의 핵 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파키스탄군은 인도와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의 정전선 부근에서 인도 공군의 미그-21 바이슨을 격추하고 조종사를 사로잡았다. 인도 측은 파키스탄 공군의 F-16 전투기도 추락했다고 주장했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를 부인했다.

사실상의 핵 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면전으로 치달을 경우 국제 정세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러시아와 전통적으로 가까웠던 인도는 최근 들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군사적으로도 협력하면서 전략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는 데 동참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과 가까워졌던 파키스탄은 최근 들어 다시 중국에 접근해 일대일로에 동참하다 국가 부채가 늘면서 고민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이런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이 악화하면 국제적으로도 다양한 합종연횡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 공군의 F-16 전투기는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협력 관계를 강화했던 미국이 파키스탄에 ‘테러와의 전쟁’에만 쓴다는 조건 아래 판매한 고성능 무기체계다. 가뜩이나 남미 최대의 산유국인 베네수엘라 사태로 복잡한 상황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무력 충돌을 벌이면서 전면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트럼프는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로 피를 씻는’ 방식의 유혈 보복


더구나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하노이에 머무는 동안 미국 워싱턴에선 ‘코언 청문회’가 열려 트럼프 대통령이 내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리는 상황이 됐다. ‘트럼프 해결사’로 불렸던 개인 변호사 마이클 코언이 미국 하원 감독개혁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트럼프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코인은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 ‘사기꾼’ ‘범죄자’로 부르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다양한 스캔들과 관련해 거짓말을 해왔다고 증언했다. 코언 청문회에 더해 인도·파키스탄 상황까지 악화한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2월 28일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하노이를 떠났다. 물론 북한과의 협상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결렬의 결정적인 요인이겠지만, 트럼프를 둘러싼 다양한 국내외 상황이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월 27일 파키스탄의 인도 공군기 격추는 하루 전인 2월 26일 벌어졌던 인도의 공습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날 인도 공군의 미라지-2000 전폭기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의 정전선을 넘어 파키스탄 관할지를 폭격했다. 그곳에 테러 캠프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도가 파키스탄 관할 지역에 있는 ‘테러 캠프’를 공습한 이유도 ‘보복’이었다. 2월 14일 잠무카슈미르의 인도 관할지역인 잠무카슈미르주의 주도인 스리나가르 외곽을 지나던 수송 차량 행렬을 대상으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인도 경찰 41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부상했다. 당시 인도 경찰 2500명이 버스 25대에 나눠 타고 이동하던 중 버스 두 대를 상대로 한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이는 양군 간 벌어진 민병대 공격으로는 30년 만의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인도는 잠무카슈미르의 파키스탄 지역 민병대가 이 테러를 조직했다고 보고 보복에 나섰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2월 16일 한 집회에서 “테러범을 어떻게 처벌할지는 우리 군대가 결정한다”라며 보복을 암시했다. 양국은 이런 상태가 벌어지면 빠짐없이 ‘피로 피를 씻는’ 방식의 유혈 보복을 가해왔다. 실제로 2016년 9월 잠무카슈미르의 인도 관할지에서 인도군이 공격을 받아 19명이 숨지자 인도는 특수부대를 파키스탄 관할지역으로 투입해 12명을 사살했다. 이런 종류의 사태가 벌어지면 양국 국민도 ‘보복’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게 일상화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벌인 양국의 설전을 살펴보면 협상이나 타협이란 단어는 아예 찾을 수가 없다.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진 당일인 2월 14일 인도는 즉각 “테러 단체가 벌인 공격으로 파키스탄이 지원했다”고 발표했다. 파키스탄 측도 물러나지 않고 “우리 당국은 관여한 적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인도가 말하는 단체의 창설자가 파키스탄에 있는데 인도가 증거를 제시하면 체포하겠다”라고 나왔다. 인도는 “원한다면 증거를 제공하겠다”라면서도 “대화할 시간은 끝났다”라고 말했다.

2월 16일 인도 공군의 미라지-2000의 공습이 이뤄진 직후 인도는 “테러조직만을 겨냥한 공격이었으며 군과 시민은 피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폭격은 전정협정 위반”이라며 “시민들이 부상했으며 이로써 우리에겐 보복할 권리가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다음날인 2월 27일 파키스탄 공군의 F-16기가 인도 공군의 미그-21 바이슨을 격추하자 인도는 “파키스탄 공군기가 인도 군시설을 노려 우리가 출격했다”라고 발표했으며, 파키스탄 측은 “인도군의 전투기가 우리 측에 칩입해 격추했다”라고 상반된 주장을 했다.

그런데 3월 1일 대반전이 일어났다. 파키스탄의 임란 칸 총리가 추락 인도 공군기의 조종사를 석방해 인도로 송환한 것이다. 더 이상 사태 확대를 바라지 않는다는 사인을 보낸 셈이다.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도 양측은 설전을 이어갔다. 인도는 “조종사 석방이 대화의 시작이 될 순 없다”라며 협상을 거부하고 “우선 파키스탄 측의 테러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파키스탄의 칸 총리는 “(인도 조종사 석방으로) 평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며 대화를 호소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 모두가 ‘정치적인 주판알’을 튕기면서 실리를 계산하기 바쁜 상황이다.

사실 모디 총리는 4~5월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힌두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노리기에 이번 사태가 호재가 될 수 있다. 모디 총리는 현재 야당인 국민의회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총선은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국민의회는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1889~1964년, 1947~1964년 총리 재임)와 그의 딸인 인다라 간디(1917~1984년, 1966~1977년 및 1980~1984년 총리 재임)와 손자인 라지브 간디(1944~1991년, 1984~1989년 총리 재임)에 이어 증손이자 4대 세습 정치인인 라훌 간디(49)가 이끌고 있다. 군부의 입김을 강하게 받고 있는 연약한 총리라는 평판을 듣는 파키스탄의 칸 총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강한 리더십을 보여줘 지지층을 넓힐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은 치열한 미디어전·선전전을 전개하고 있다. 하늘에서 공중전을 벌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조종사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대표적이다. 특히 인도는 파키스탄이 부인하는 F-16 전투기 추락을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다. 추락 조종사의 신원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심지어 파키스탄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했지만 그를 인도 조종사로 오인한 파키스탄 군중이 집단 폭행해 숨졌다는 소문도 확산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파키스탄과 인도 경계지역 상공에서 양국 전투기 각각 1대가 서로 공중전을 벌인 것은 확실하다. 이 교전에서 인도 공군의 미그-21 바이슨 1대가 추락했으며 낙하산으로 탈출한 조종사가 파키스탄 측에 ‘체포’됐다가 3월 1일 본국으로 생환했다는 내용까지는 확인된 사실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보도된 이 뉴스에는 소문이 하나 붙어 다닌다. 이 소문은 인도 미디어만 상세히 보도할 뿐 파키스탄 미디어에선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로 표현되지만 힌두 민족주의가 만만하지 않은 인도와, 쿠데타 세력인 군부가 정국을 좌우하고 이슬람 민족주의가 역시 상당한 파키스탄 중 어느 나라 미디어를 신뢰할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렸다.

소문은 각각 인도 공군과 파키스탄 공군 소속인 조종사의 엇갈린 운명을 다뤘다. 인도 미디어인 ‘뉴인디언 익스프레스’에 따르면 당시 공중전에선 인도 공군의 미그-21 바이슨만 추락한 게 아니라 파키스탄 공군의 F-16 전투기도 함께 떨어졌다. 두 사람 모두 비상 탈출해 낙하산을 타고 파키스탄 지역에 내려 지역 주민들에게 붙잡혔지만 그 뒤의 운명은 엇갈렸다. 추락한 인도 공군의 미그-21 전투기 조종사 압히난단 바르타만은 낙하산으로 지상에 내린 후 파키스탄의 지역 주민에게 붙들렸지만 파키스탄군에 구출돼 구금시설로 옮겨졌다. 3월 1일 석방돼 인도로 돌아온 그의 사진이 공개됐는데 얼굴이나 신체에서 구타나 가혹행위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히 사실상 핵 보유국인 양국 간의 이번 분쟁은 전면적인 충돌로까지는 번지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잠무카슈미르를 둘러싼 양국 국민의 감정 대립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잠무카슈미르에서 전면전·국지전 반복


인도는 1947년 독립하면서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와 무슬림(이슬람신자)가 다수인 파키스탄으로 분할됐다. 인도냐 파키스탄이냐의 선택은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인도의 각 지역을 지배하던 봉건 영주인 라자 562명의 의사에 따랐다. 그런데 인도의 북서쪽, 파키스탄의 북동쪽에 있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은 분쟁의 불씨가 됐다. 이 지역 주민은 무슬림이 80%였지만 지배 영주인 라자는 힌두교도로 인도 귀속을 원했기 때문이다.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해 10월 무슬림은 파키스탄 귀속을 요구하며 소요 사태를 일으켰으며 10월 21일 파키스탄에서 이 지역을 접수하겠다는 민병대가 이동해 들어왔다. 그러자 라자의 요청으로 인도도 다음날 군대를 보내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1949년 유엔의 중재로 잠무카슈미르 지역을 분할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그 뒤로도 1965년, 1971년 전면전을 벌였다. 1971년은 잠무카슈미르가 아닌, 당시 ‘동파키스탄’으로 불렸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도가 지원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1999년에는 파키스탄이 잠무카슈미르 지역의 카길을 공격해 점령했다가 인도군의 반격으로 물러난 국지전이 벌어졌다. 2014~2015년과 2016~2018년에도 대치와 부분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핵 보유국 사이의 화약고인 셈이다.

중국도 이 분쟁에 끼어들었다. 현재 잠무카슈미르 지역은 인도가 43%, 파키스탄이 37%, 그리고 중국이 잠무카슈미르 지역 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20%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은 1962년 인도와의 국경 분쟁 당시 이곳을 점령해 계속 점유하고 있다. 현재 파키스탄은 중국이 점유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잠무카슈미르 지역 전체의 영유권을, 인도는 이를 포함한 전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인도는 1993년과 1996년 협상으로 현재의 중국이 점유한 지역의 통제선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토 주장은 계속하지만 경계선은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잠정적인 외교 선언이다. 잠무카슈미르 분쟁이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간 분쟁을 넘어 국제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쟁 와중에 핵 실험을 하고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 됐다. 인도는 1964년 국경을 맞대고 국경분쟁까지 벌인 중국이 핵 보유국이 되자 비밀리에 핵 개발에 나섰다. 인도는 1974년 ‘미소 짓는 부처’라는 암호명으로 첫 핵실험을 한 다음 24년 이상을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힌두민족주의정당이자 지금 모디 총리의 소속 정당인 BJP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가 집권하던 1989년 핵실험에 나섰다. 서부 라자스탄주의 포크란 핵실험장에서 ‘샤크티(위력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작전’이란 암호명으로 5월 11일 세 발을 연속 터뜨린 후 13일 두 발을 추가 실험하는 연속 핵실험을 했다. 언제, 어떤 종류의 핵폭탄도 마음대로 터뜨릴 수 있는 과학적·군사적 능력을 중국과 파키스탄은 물론 전 세계에 보여준 셈이다.

바리파이 총리는 핵실험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선거에 승리했으며 집권한 지 불과 두 달 뒤에 이를 실행했다. 핵개발은 이미 이전에 완료된 셈이다. 바지파이 총리는 의기양양하게 핵보유국을 선언하고 정치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미국과 일본 등 서방국가가 경제 제재에 나섰지만 이를 감수했다. 제재로 경제 발전에 필요한 해외 투자가 끊겼지만 민영화 정책 등을 통해 자본을 모으면서 경제 성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힌두민족주의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파키스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인도가 핵실험을 한 같은 달인 5월 28일 서부 발루치스탄의 창가이 지역에 있는 라스코힐에서 다섯 발의 핵폭탄을 동시에 터뜨렸다. 암호명 ‘창가이1’로 불리는 핵실험이었다. 5월 30일 발루치스탄 하란 사막에서 한 발의 핵폭탄을 추가로 터뜨리는 암호명 ‘창가이2’ 핵실험도 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5회의 핵실험을 한 인도와 6회의 핵실험을 한 파키스탄은 핵 능력을 사실상 인정받았다.

파키스탄도 인도와 마찬가지로 핵실험 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재를 받았지만 인도처럼 NPT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냉전 기간 중 미국의 남아시아 동맹국이었던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는 무자히딘(무슬림 전사)의 훈련·투입·보급을 하려는 미국에 적극 협조해왔다. 파키스탄에 주둔했던 미군은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때까지 머물렀다.

파키스탄은 중국, 인도는 미국과 밀월관계

이런 배경에 따라 1998년 핵실험에 따른 미국의 제재는 3년 만에 풀렸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한 것도 큰 계기였다. 미국이 2001년 10월 7일 탈레반 지배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파키스탄은 군수와 작전의 후방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탈레반 세력을 공격하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무인기도 파키스탄 남부 발루치스탄주에서 이륙했다. 파키스탄은 군사적으로 미국의 준동맹으로 간주돼 왔다. 이번에 인도 공군의 미그-21 바이슨을 떨어뜨린 파키스탄 공군의 F-16 전투기도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파키스탄이 중국에 접근하면서 미국과 관계가 멀어지고 대신 인도가 미국과 가까워지고 있다. 얽히고설킨 잠무카슈미르의 갈등을 푸는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1475호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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