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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이코노미 수용하려는 미국, 한국은…] 미 SEC “플랫폼 있고 단순 자금 모집 아니면…”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한국은 국회 공전에 법·제도 공전상태… ‘거래소 폐쇄’ 발언 이후 한발짝도 못 나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ICO와 STO에 대한 규정을 사실상 마련하면서 토큰이코노미를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사진:SEC
기술의 진보로 경영이 바뀌는 데 1년, 법이 바뀌는 데 5년, 교육이 바뀌는 데 10년이 걸린다고들 한다. 개인의 행동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사회의 통념과 제도를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뜻이다. 제도·사회는 신기술이 기존 체제와 충돌하지 않는지, 혼란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등 부작용을 충분히 검증해 받아들인다. 지난해 1월 당시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가상증표(암호화폐를 이른 말) 거래소를 폐쇄하고, 이를 광고하거나 거래하는 자들을 처벌하겠다”는 강성 발언은 기존 사회적 합의와 인식을 얼마나 깨기 힘든지 보여준 사례다.

박 장관의 발언 직후 세계적으로 암호화폐 시세가 고꾸라지며 1년여 넘게 한파가 몰아쳤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암호화폐를 받아들일 시간이 충분히 지난 것인지, 세계의 금융 중심인 미국이 암호화폐공개(ICO)·증권형토큰공개(STO)를 사실상 허용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4월 3일(현지시간) ICO를 진행한 미국의 운송·여객 회사 턴키젯이 발행한 토큰이 증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조치의견서(No-action letter)’를 발송했다. 시세가 급변하지 않고 실거래가 가능한 암호화폐라면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SEC는 턴키젯이 이미 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한 후 토큰을 판매했다는 점을 비조치의견의 주요 근거로 꼽았다. 턴키젯은 기존 금융 시스템이 너무 느려 예약·결제가 불편하다며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가동했고, 토큰 하나를 1달러에 고정해 자사 서비스를 이용할 때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SEC가 ICO 프로젝트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앞으로도 ICO에 증권법을 적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졌다. SEC는 한 유관 부서의 입장일 뿐, 법적 결정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턴키젯을 선례로 남겼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업계획이 명확하고 플랫폼을 구축한 유틸리티 코인은 제재하기 어려워졌다. 페이스북·아마존·월마트 등 기존 대형 사업자들이 자사 유통망 쓸 수 있는 암호화폐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미 포브스는 “SEC가 비트코인과 유사한 암호토큰을 이용해 투자자를 확보한 기업에 최초로 집행 조취를 취하지 않았으며, 미래 기업들을 위해 별도의 문서를 통해 결정 근거를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턴키젯 비조치의견으로 블록체인 프로젝트 봇물 예상


SEC는 지난해 11월에는 STO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도 했다. 사업 목적과 재산, 회사의 경영정보, 독립 회계사가 인증한 재무제표 등이 있다면 규정에 따라 제한 없이 자금을 모집할 수 있다(레귤레이션 D). 레귤레이션D는 한국의 소액공모와 유사한 방식으로 소규모 기업들의 자금 모집을 위해 마련한 규정이다. 평균 공모 비용이 1만5000달러에 불과해 미국 중소기업들의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레귤레이션 A의 경우 모집 가능액이 5000만 달러로 제한되지만, 재판매에 대한 제한이 없다.

SEC는 이런 중소기업 자금 모집 방식을 STO에도 확대 적용했다. 신기술 기업은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않는 한 STO를 통한 자금 모집과 디지털 증권을 유통할 수 있다. STO를 통해 사업이 성공하면 나스닥 상장의 길도 열 수 있다. 한국 기업 등 해외 기업도 미국에 자회사를 만들어 STO를 진행할 수 있다. 4월 20일(현지시간) 국내 씨피이셀이 에미트액티오(Amet Actio)이란 미국 자회사를 SEC에 등록했다.

중국 정부는 블록체인 생태계 구축을 위해 정부 등록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 허가를 내줬다. 현재 중국 국가인터넷정보 판공실로부터 허가를 받은 기업은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징동닷컴 등 197개다. 중국 정부는 블록체인을 허가제 사업으로 실시해 당국이 디지털 코인 생태계를 관리, 통제한다는 방침이다. 중국 정부는 2017년 ICO를 전면 금지했지만, 암암리에 자금 모집이 이뤄지고 있고 코인 다단계도 여전히 만연해 이를 허가제로 바꿔 양성화할 계획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제도 마련에 한발 뒤처진 모습이다. 사법당국은 현재 ICO를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ICO를 통한 자금 모집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는 불법 소지가 큰 STO를 들먹이며 노년층을 대상으로 투자금을 끌어모으는 다단계 영업도 성행하고 있다. 서울 남부지검이 일부 불법적인 ICO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내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코인에 대한 법적 규정이나 제도적 방침이 없어 처벌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도 마련이 지연되면서 해외의 규정을 이용한 탈세 가능성도 제기된다. 예컨대 국내 기업이 미국에서 SEC 규정대로 STO를 진행한 경우 해당 코인을 국내로 들여와 거래해 자금을 착복하거나 상속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자금을 공모한 것이 아니라서 금융위원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 또 코인은 국경을 초월해 거래되지만, 과세 근거가 없어 세금을 매길 수 없다. 실제 최근 이런 방식을 이용해 국내 자산의 해외 이전을 컨설팅하는 법무·세무·회계 법인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중국은 허가제 도입해 코인이코노미 양성화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세무당국은 집행기관일 뿐 세제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국회와 행정부가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현재 암호화폐 제도 마련은 기획재정부가 주도하고 있지만, 아직 법적 규정이 정해지지 않아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게임 아이템의 경우 법원은 우연적 요소보다는 노력의 대가라며 자산으로 인정한 바 있지만,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별도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당초 2월 국회부터 블록체인을 통한 디지털 콘텐트·머니·토큰·포인트 등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을 ‘디지털 자산’으로 규정하는 안을 검토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야 간 대립으로 국회가 공전하며 논의가 중단된 상황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아직 법적 규정이나 과세에 대한 글로벌 룰이 없기 때문에 행정부도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결국엔 미국·일본 등의 논의 진행 상황을 따라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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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호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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