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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 유방과 항우의 홍문연] 생사 가를 자리에서 몸 낮춘 유방 

 

항우에게 군신의 예 나타내 의심 풀어… 몰살 피하고 후일 도모

▎사진:김회룡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자리. 주군을 지키려는 참모와 주군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참모의 치열한 머리싸움.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참석자들. 이처럼 담판에는 음험하고 위태로운 요소들이 뒤엉키기도 한다. 유방과 항우가 만났던 홍문(鴻門)의 연회처럼.

잘 알려져 있다시피 초한(楚漢)쟁패의 주도권은 원래 항우에게 있었다. 진나라 2대 황제 호해와 승상 조고의 폭정이 절정에 달하면서 나라는 혼란에 휩싸였고 이 틈을 타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항우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숙부 항량과 함께 거병한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천하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진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장한의 군대를 격파한 것도 그였다. 이에 비해 유방은 후발주자로서 아직 모든 면에서 항우에 미치지 못했다.

후발주자 유방, 모든 면에서 항우에 미치지 못해

그런데 진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맞부딪힌다. 당시 유방과 항우는 모두 초나라 회왕(懷王)의 휘하에 있었다(항우가 진나라에 대항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진시황에게 멸망한 초나라를 다시 세우고 망국의 왕족 웅심을 임금으로 옹립했다. 유방도 여기에 참여한다). 두 사람은 왕명에 따라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했는데 이 때 회왕은 관중(關中, 진나라의 수도가 위치한 지역 일대) 땅을 먼저 평정하는 사람을 왕으로 봉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항우에게는 멀고 힘든 동선을 주고 유방에게는 쉬운 동선을 가게 했다는 점에서 일부러 유방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잔혹한 항우보다는 관대한 유방이 민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방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항우를 견제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튼 상대적으로 편한 코스를 배정받은 유방은 항우보다 빨리 관중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함곡관에 진입했다. 이어서 진나라 왕(호해가 죽고 난 뒤 군주의 칭호를 ‘황제’에서 ‘왕’으로 바꿨다) 자영의 항복을 받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거나 훔친 자에게는 그에 따라 처벌하며, 나머지 진나라의 법은 모두 폐지한다”라는 소위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했다. 자신이 관중의 지배자라고 천명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유방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전해들은 항우는 격노했다. 진나라의 수도는 상징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천하의 중심지이자 통일 제국의 정통성이 실려 있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을 차지함으로써 진나라의 계승자로 인식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유방의 부하 조무상이 몰래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패공(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항복한 진나라의 왕)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가지려 합니다”라고 참소함으로써 항우의 의심은 더욱 짙어져버렸다. 이에 항우는 40만 군사를 휘몰아 함곡관으로 진군한다. 유방이 함곡관을 봉쇄했지만 단숨에 돌파해 유방의 코앞에 이르렀다. 병력 숫자도 4분의 1에 불과했고 여러모로 항우의 맞상대가 되기에 부족했던 유방으로서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형국이었다.

유방은 다급했다. 자칫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던 그때 항우의 숙부 항백이 유방의 핵심 참모 장량을 찾아온다. 예전에 장량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항백이 장량의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칠 것을 권유하러 온 것이다. 유방은 항백에게 매달렸다. “나는 이곳에 온 후 장군(항우)을 위해 창고를 모두 봉쇄하고 호구수를 파악한 후 장군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찌 다른 마음을 품고 반란을 꾀하겠습니까?” 유방의 설득에 넘어간 항백이 항우에게 이 말을 전했고, 항우는 ‘홍문’이라는 곳으로 유방을 부른다. 유방의 말을 믿어서? 유방을 용서해서? 아니다. 유방을 직접 만나본 후 죽일지 살릴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유방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사가 이번 담판으로 판가름될 거라는 것. 장량과 소수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길을 나선 유방이 항우를 보자마자 납작 엎드린 것은 그래서였다. “신이 본의 아니게 미리 관중에 들어와 진을 격파하고 이곳에서 다시 장군을 뵈옵니다. 장군에 대한 신의 충정은 변함이 없으나 지금 어떤 소인배의 말 때문에 장군과 신 사이에 틈이 생겼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항우 앞에서 스스로 ‘신(臣)’이라고 일컬음으로써 군신의 예의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유방이 저자세로 나오자 항우는 의기양양했던 것 같다. 자신의 경쟁자로 꼽히는 인물이 자기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하니 말이다. 마음이 풀어진 항우는 유방에게 자리를 권하며 연회를 베풀었다. 수석 참모 범증이 항우에게 계속 눈짓을 주고 옥패를 세 번이나 들어보였지만 모르는 척한다. 당초 범증이 옥패를 들면 항우가 유방을 죽이기로 약속했지만 무시한 것이다. 항우의 대업을 위해서는 후환이 될 수 있는 유방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범증으로서는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고심하던 범증은 장수 항장에게 지시했다. “주군께서 차마 유방을 죽이지 못하시는 것 같다. 그대가 들어가 흥을 돋우겠다며 검무(劍舞)를 춰라. 그리고 기회를 봐서 유방을 찔러 죽여라.” 항장이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장량은 깜짝 놀랐다. 항백이 장량을 돕기 위해 함께 검무를 추며 항장의 칼을 막아주었지만 무슨 일이 더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장량은 급히 뛰어난 용력을 지닌 맹장 번쾌를 불러들여 유방을 호위하도록 한다. 그리고 측간에 간다는 핑계로 유방을 연회장에서 빠져나오게 하여 그길로 도망가도록 했다. 대신 장량이 항우에게 가서 사과했는데, 유방이 너무 취해 폐를 끼칠까봐 먼저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이때 장량이 항우와 범증에게 벽어(碧玉)을 예물로 올리자 항우는 웃으며 받았고 범증은 분통을 터뜨리며 내던져 깨버렸다고 한다.

항우의 성격 파악해 그에 맞게 행동

이렇게 보면 홍문연은 싱겁게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유방이 사과하자 항우는 쉽게 의심을 풀었고 범증이 유방을 죽이려고 했지만 장량의 활약으로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유방의 홍문행은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다 몰살당하느니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담판이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고 항우의 성격과 욕망을 분석한 후 그에 맞춰 대응한 것이다. 항우를 살살 달래며 그의 어린아이 같은 치기와 오만함(범증의 표현)을 충족시켜준 것, 유방이 그의 생애에서 지극히 이례적으로 비굴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방이 도망친 것도 그렇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도 안 하고 사라졌으니 초대한 사람의 화를 돋웠을 일이다. 그러나 항우에게는 유방이 겁쟁이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유방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음험하고 위태로운 요소들이 얽힌 담판이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철저하고도 맞춤형 대응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90호 (20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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