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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사의 힐링 상담 | 해고 트라우마 극복] 현재에 깨어있고 현재를 살아가라 

 

과거 상처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가족·지인 등과 얘기하고 또 얘기해야

▎사진:© gettyimagesbank
훤칠한 외모, 업무능력과 매끄러운 인간관계로 동기 가운데 가장 빨리 승진한 그는 40대 초반에 벌써 대기업 부장자리에 올랐다. 한창 잘 나가던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 회장과 중국 사업부 임원과의 갈등에 휘말린 것이다. 사정도 모르고 회장 편을 들다가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쳤고, 이후 운 나쁘게도 그 임원 산하 부서에 배치돼 중국 파견이 결정된 것이다.

그는 집을 팔아 상가를 분양받고, 남은 돈으로 중국에서 기거할 집을 마련했다. 두 아들이 중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기뻤다. 모든 짐은 배로 부치고, 간단한 살림살이만 챙겨 중국에 도착한 후, 중국지사로 출근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임원이 투자 실패를 빌미로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를 해고 조치한 것이다.

중국지사로 출근하자마자 갑작스런 해고 통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회장 편에 섰던 터라 별 탈 없으리라 확신했다. 동료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중국행을 준비하는 동안 순식간에 해고 조치가 진행됐다고 한다.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중국에 머물 돈도 없고, 가족들은 그의 눈치만 보고 있다. 더구나 배로 부친 짐이 도착지를 잃어 통째로 분실됐다. 머나먼 타국에서 버려진 고아 신세가 돼 버렸다.

반년이 지났다. 그는 지금 선배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다. 생지옥 같았던 당시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밤마다 악몽에 놀라 깬다. 공포감도 자주 느낀다. 자신에 대한 수치감, 가족에 대한 죄의식, 회사에 대한 굴욕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상처다. 충격을 경험한 후 마음에 남은 상처다. 전쟁·재난·폭행과 같은 충격은 큰 상처를 남긴다. 교실에서 소변을 보거나, 발표할 때 실수한 경험도 상처로 남는다. 거절·왕따·학대와 같은 사건이 반복되면 큰 상처가 된다. 상처는 초기에 치유해야 한다. 방치하면 정신적 후유증으로 남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 한다. 모든 상처가 병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90%는 1달 내에 정상으로 돌아오고, 10%가 후유증으로 남는다. 10년이 지나 발병하는 경우도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반복경험은 사건 당시의 고통을 꿈이나 생각으로 다시 겪는 것이다. 공포와 무력감에 빠지고, 사건 당시처럼 느끼고 행동한다. ②각성반응은 과도한 긴장상태이다.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 놀란다. 잠들기가 어렵고, 밥 먹기가 힘들고, 분노가 폭발한다. ③회피반응은 사건과 연관된 자극을 피하는 것이다. 흥미가 사라지고, 감정이 무뎌지고, 희망이 사라진다. 약물중독, 대인기피, 편집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기억에 존재한다.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면 마음은 질식한다. 뇌는 충격적인 정보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기억은 통합되지 않은 채 흩어져 저장된다. 기억의 파편은 이물질로 작용해, 오랜 기간 스트레스 증상을 일으킨다. 트라우마는 신념체계를 위협한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일이….” 그동안 쌓아온 신념이 산산이 조각난다. 신에 대한 믿음, 세상에 대한 안전감, 나에 대한 자존감의 붕괴로 혼란에 빠져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한다.

트라우마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①상처는 현재로 진행된다. 선명한 이미지를 동반하고, 유사한 상황에서 재현된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과거에 묶여 현재를 살지 못하도록 한다. ②충격과 상처는 비례하지 않는다. 충격이 작아도 큰 상처가 날 수 있다. 충격이 커도 전혀 상처가 없을 수 있다. 타고난 체질과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③상처는 감출수록 심해진다. 억누르고 싫어할수록 커진다. 드러내고 받아들이면 작아진다.

한국 사회는 트라우마가 만연하다. 아동학대, 가정폭력, 청년실업의 굴레에서 상처를 남기는 일이 계속된다. 붕괴와 참사가 이어지지만 생존자와 유족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안전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국 사람은 트라우마에 취약하다. 한(恨)이 많다. 수많은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겪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정서다. 정(情)이 많다. 공감을 잘하면 상처를 입기 쉽다. 인(忍)을 강조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감정을 억누르면 상처가 되기 쉽다.

자,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탁월한 처방은 무엇일까? 첫째, 현재에 집중하자. 인간 뇌는 불완전하다. 과거를 떠올릴 때 현재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현재가 불행하면 과거 상처가 커 보이고, 현재가 행복하면 과거 상처가 작아 보인다. 인간 뇌는 바보스럽다. 현재와 과거 사건을 감정적으로 구분하지 못한다. 강한 감정의 사건을 더 현실적으로 느낀다. 현재가 행복하면 과거 상처는 무시된다.

현재를 확장하자. 우리의 뇌는 과거와 미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가 머물 공간이 늘 부족하다. 현재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숲속의 빈터와 같은 곳이다. 현재에 깨어있자. 과거 상처가 현재 실패의 원인이 되면 안 된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자. 과거 상처가 현재를 피하는 수단이 되면 안 된다. 상처는 중요한 경험이다. 상처를 교훈삼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얘기하고 또 얘기하자. 가족에게 얘기하자. 상처를 털어놓으면 한결 나아진다. 가벼운 위로에 개의치 말자. 고통이 떠오를 때 나비포옹을 해보자. 양팔을 교차해 양쪽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다. 뇌가 끊어진 정보를 다시 처리한다. 친구에게 얘기하자. 처음 얘기를 꺼내기는 힘들지만 두 번째는 쉬워진다. 어설픈 조언에 개의치 말자.

고통이 밀려올 때 안구운동을 해보자. 양쪽 안구를 동시에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다. 뇌가 조각난 기억을 다시 통합한다. 지인에게 얘기하자. 반복해 얘기하면 스토리가 구성된다. 섣부른 충고에 개의치 말자. 고통이 떠오를 때 영화의 한 장면이라 생각하자. 객석에 홀로 앉아 나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 과거 상처가 점점 무덤덤해진다.

의연하게 견뎌야

셋째, 의연하게 견디자. 맹자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먼저 마음을 힘들게 하고, 몸을 지치게 하고, 육체를 굶주리게 한다. 또한 생활을 어렵게 하여,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틀어지게 만든다. 이는 본성을 강하게 일으켜 욕심에 대한 인내를 기르게 하여, 지금까지 못했던 어떤 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늘이 시련을 주는 것은 더 큰일을 하라는 천명(天命)이다. 고난 가운데 성공이 있고, 안락 가운데 멸망이 있다. 시련과 고통에 의연하게 견디자.

※ 필자는 정신과의사, 경영학박사, LPJ마음건강 대표. 연세대 의과대학과 동대학원을 거쳐 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임상집단정신치료] [후박사의 마음건강 강연시리즈 1~5권][후박사의 힐링시대 프로젝트]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1490호 (20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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