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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대폐업 시대’ 맞나] 높은 상속세 장벽… “부동산이나 살 걸”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중견기업 85% “승계 계획도 못 잡아”… “과표구간 넓히고 사후관리 요건 완화” 필요

경기에 ‘10년 주기설’이 있듯 기업에 ‘30년 수명설’이 있다. 대개 창업자의 은퇴와 더불어 기업도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1970~80년대 고성장기에 숱하게 생긴 기업이 최근 안고 있는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자녀에게 가업 승계를 고려하지만, 상속·증여세 장벽이 도사리고 있다. 후계자를 찾지 못하면 남는 선택지는 폐업이나 매각이다. 그러나 폐업하면 기술과 경험이 사장되고 일자리도 사라져 결국 나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최근 상속·증여세 논쟁이 뜨거운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기업의 노쇠화와 경제 전반의 활력 감소에 정부가 전향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외환위기 때 투자를 늘릴 게 아니라 강남에 아파트를 샀어야 했어요.” 여러 대기업에 섬유 원단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대표 박모(72)씨는 아쉬운 속내를 털어놨다. 박 대표는 원래 회사를 장성한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따져보니 상속세가 수십억원에 달해 부담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두 아들 역시 큰 비용을 치러가며 회사를 물려받을 뜻이 없다. 박 대표는 이렇게 될 것을 왜 그리 고생해 회사를 키웠나 자괴감이 든다. 1980년대 초 창업해 원청 기업의 단가 후려치기와 ‘갑질’을 견디며 회사를 운영해온 그다. 외환위기 때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재도 쏟아붓고, 사업을 키울 생각에 투자도 적지 않게 했다.

박 대표의 노력에 이 회사는 한때 연 매출 100억원이 넘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자신이 60대 후반에 들어선 후로는 사업 규모를 조금씩 줄여 현재는 적정 수익이 발생하는 연 매출 50억~60억원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 더는 성장이 어렵고 상속도 힘들 거라 판단해서다. 박 대표는 경쟁사든 사모펀드(PEF)든 적당한 인수자가 나타나면 회사를 매각할 생각이다.

한국 기업 오너십에 격변기가 다가오고 있다. 1970~80년 대 고성장기에 회사를 설립해 이제 60~70대로 접어든 창업자들이 물러나고, 2세들로 대대적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고율의 상속·증여세 벽에 막혀 가업 승계를 엄두도 못 내거나, 아예 회사를 매각하려는 중소·중견 기업인이 늘고 있다. 상속·증여세 부담을 낮춰 기업의 혁신을 지원하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정책 때문이다.

한국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말 통계청이 내놓은 ‘기업생멸행정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활동 중인 기업 중 60대 이상이 CEO를 맡은 기업 수는 139만8364개로 전체 활동 기업 중 23.11%에 달했다. 2012년 같은 조사 때보다 기업 수는 29만527개, 비중은 2.52%포인트 증가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CEO들의 연령대도 전체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중소기업 CEO 4명 중 1명 60세 넘어


한국기업데이터 자료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창업자가 현재 CEO를 맡은 국내 5만1256개 기업 중 33.2%(1만7021개)가 CEO 연령이 60대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잠재적 승계 수요가 있는 기업이 전체의 20~30%에 달한다는 의미다. 현재 50~59세 CEO는 45.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도 10~20년 후면 가업 승계를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된다. 한국 경제가 연로해지면서 가업 승계는 상시적 문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창업자들은 아직 승계 방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현재 CEO 중 ‘승계’를 받아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는 전체의 3.5%에 불과한 실정이다. 기업을 인수해 경영(9.1%)하는 경우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전문경영인(2.8%)에게 맡긴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기업인들은 가업 승계에 사실상 손을 놓은 실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3월 발표한 ‘2018년 중견기업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의 84.4%가 ‘가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가장 큰 이유로는 ‘상속·증여세 부담’(69.5%)이었다.

실제 한국의 상속·증여세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1억원 이하의 상속세는 10%에 불과하지만, 누진세율을 적용해 5억원 이하 20%, 10억원 이하 30%, 30억원 이하 40%, 30억원 초과 50%다. 최고 상속세율은 일본(55%)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여기에 최대주주 보유주식(경영권) 할증평가를 적용하면 15%의 추가 세금을 부담해야 해 최고 명목세율은 65%에 달한다. 실효세율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10억원을 기준으로 따지면 한국의 상속세 실효세율은 28.09%에 달한다. 미국(23.86%, 100만 달러 기준), 독일(21.58%,100만 유로기준), 일본(12.95%, 1억엔 기준) 등에 주요국보다 높다.

한국의 상속·증여세가 높은 것은 부의 집중화와 대물림을 방지해 계층 간 이동을 가능하게 하자는 취지에서다. 또 1960~70년대 경제성장을 위해 정책자금을 풀어 기업을 대거 육성했기 때문에 기업의 부 축적에 정부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논리도 반영됐다.

그러나 높은 상속세가 기업 폐업 등으로 이어져 일자리를 줄이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가업 승계의 세금은 상속자가 부담한다. 상속자로서는 상속세를 부담하면서까지 고된 중소·중견 기업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결과적으로 동일 업종 경쟁사나 PEF에 매각돼 인력 감축 및 자산 매각 등 구조조정을 거칠 가능성이 크다. 또 부를 자녀에게 승계하기 어려워지면 창업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유인이 떨어진다. 기업가정신을 저해해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60대 나이의 한 코스닥 상장사 대표는 “대개 투자는 10년 후를 보고 하는데, 자녀에게 상속을 못 한다면 불확실성이 커 투자나 신규 비즈니스 진출 의욕이 떨어진다며 “차라리 기업을 국가가 운영하고, 배당금만 챙기면 좋겠다는 비현실적 생각마저 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상속 못 하는데 투자?” 락앤락·유니더스 등 줄줄이 매각


실제 승계에 어려움이 커지자 농우바이오와 락앤락, 유니더스 등이 모두 승계를 포기하고 회사를 매각했다. 각각 종자와 주방용품, 콘돔 분야에서 국내 1위 회사다. 수십년간 쌓은 원천기술과 노하우, 영업망 등의 맥이 끊긴 셈이다. 유영산업·우리로광통신·까시미아 등도 PEF나 대기업에 회사 경영권을 넘겼다. 한국 기업들이 대거 폐업하거나 PEF에 매각될 경우 전체 경제 규모가 작아지고 기술경쟁력이 위축되거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후계자 부재 등으로 ‘대폐업 시대’에 접어든 일본은 한국보다 기업 폐업에 따른 경제 충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2025년 전체 중소기업의 60%에 해당하는 245만개 기업의 CEO 나이가 70세가 넘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 중 절반, 일본 전체 기업의 3분의 1에 달하는 127만개 회사가 아직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런 상황을 방치할 경우 2025년 중소기업 73만개가 폐업해 약 650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22조엔(약 238조원)의 국내총생산(GDP)이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과 경제·인구구조가 비슷한 한국도 일본과 같은 문제를 겪을 수 있다. 기업 규모가 크고 오래된 기업일수록 상속 등 세대교체 가능성이 크높다. 국내 산업의 가치사슬 중추를 맡은 중견기업(3년간 평균 매출 3000억원 미만)의 경우 346개 중 237개(68.5%)의 CEO 나이가 60세 이상이다. 코스닥 상장법인의 경우 CEO 평균연령이 2002년 50세에서 지난해 55.7세로 급격히 늘어났다. CEO가 60대 이상인 기업 비중도 같은 기간 14.7%에서 29.8%로 증가했다.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우리나라 가업승계 현황 분석’ 보고서에서 “1세대 기업 3개 중 하나는 10년 안에 세대교체 가능성이 크며, CEO의 준비 없는 은퇴로 기업의 폐업·매각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다”며 “30년 이상 기업의 자산·매출·고용은 10년 미만 기업의 4~5배 규모라 기업의 영속성이 단절되면 국가 경제의 손실이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독·일 등 주요국 상속세 부담 완화 움직임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오른쪽)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상속세제 개선 토론회’에서 이성봉 서울여대 교수의 주제발표를 듣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물론 일본은 상속세 부담보다는 자녀가 가업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데에서 문제가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도 일본처럼 고령화·소자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2세들이 상속세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어 비슷한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인천에서 대형 가구 회사의 1차 협력사를 운영하는 한 목재 가공 회사의 신모(72) 대표는 “오랫동안 불경기에 시달리는 가구 회사들이 발주 물량을 줄이거나 거래를 끊으면 바로 공장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며 “어차피 자녀들은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어, 회사를 빨리 현금화해 물려 달라고 재촉한다”고 토로했다. 이 회사는 일용직 근로자를 포함해 총 2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자녀들이 가업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상속세 부담은 가업 승계에 부담을 더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상속에 대한 부담을 낮춰 기업의 영속성을 보장하자는 것은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기업의 투자를 끌어내는 한편 산업 전환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일본 정부는 가업 상속공제제도의 사후관리 기간을 5년으로 단축하는 한편 지난해 특례를 도입해 10년간 비상장 중소기업 공제 금액을 자산의 80%에서 100%로 늘려주기로 했다. 독일은 상속세 실효세율이 높은 편이지만 가업 경영 횟수나 상속자의 종사 기간 등 상속 공제 조건이 느슨하다. 업종의 신속한 변동을 지원하기 위해 근로자 수 유지 기준도 근로자 수에서 매출액 대비 인건비의 평균비율로 변경을 검토 중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스웨덴·오스트리아·노르웨이·포르투갈·멕시코 등은 2000년대 들어 상속세를 폐지했다.

한국도 상속세를 일부 공제해주는 ‘가업승계 지원제도’가 있다. 다만 매출·자산 규모와 최대주주 지분, 업종, 피상속인 10년 경영 등 요건이 까다롭다. 중소·중견 기업 가운데 이 조건을 충족하는 회사는 27.2%에 불과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가업상속공제를 받은 기업은 2017년 91건, 공제액은 2226억원에 불과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여당은 6월 11일 사후관리 기간 감축 등 가업상속지원세제 개편 방안을 내놨다. 가업상속공제 시 업종·자산·고용 유지 의무 기간을 10년에서 7년으로 줄이는 내용이다. 정부는 논의 내용을 토대로 9월 초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에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들이 요구한 내용에 비해 크게 미흡해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도 “공제 대상과 한도 확대를 외면한 것은 맹목적인 반기업정서에 흔들린 결과”라고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재계는 ‘공제 혜택 대상을 매출 3000억원 미만에서 5000억원 미만 기업으로 확대’하는 한편 현재 ‘500억원인 공제 한도도 늘려달라’고 요구해왔지만, 정부·여당은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재계는 또 과세표준 구간 재설정도 꾸준히 요구해왔다. 현재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과 과세표준 구간은 1999년 12월 말 개정 이후 20년째 바뀌지 않고 있어서다. 그간의 물가상승률과 기업 성장 등을 고려하면 현재 30억원인 최고 구간을 상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상속세 면제 한도를 549만 달러(약 63억원)에서 1120만 달러(약 128억원)로 상향해 중소기업의 안정적 승계를 보장해주는 분위기다. 1120만 달러 이하 기업은 상속세가 없다는 뜻이다.

‘가업승계 지원제도’ 요건 충족 27.2% 불과


중견 코스닥 상장사 관계자는 “중소기업을 100년 기업으로 만들려면 과표구간을 넓혀야 함은 물론, 최대주주 할증평가 배제, 상장 주식 상속세 물납 허용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경우 2006년 세법 개정을 통해 상장주식은 물론 비상장주식의 물납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는 ‘고용·업종·지분 10년간 유지’란 사후관리 요건도 가업 승계를 어렵게 한다. 승계 이후 경영 환경 변화에 맞춰 주력 업종을 바꾸거나 인력 조정이 있을 수 있는데, 여러 경영 여건을 반영하지 못해서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홍성규 가루다IPS 세무총괄 대표는 “경영자는 기업을 운영하며 이미 소득세·법인세를 냈기 때문에 상속세는 이중과세 소지가 있다”며 “상속세 과세표준 구간도 1999년대부터 바뀌지 않아 지나치게 낮다”고 말했다. 이어 “차등 세율 구간을 확대해 일부 대기업의 탈세와 불법증여를 방지하는 한편 미국처럼 중소·중견기업이 활발하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491호 (20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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