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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3) 정몽주, 최후의 담판] 당장은 패배로 보여도 영원히 승리하다 

 

최후의 자리에서 충절 지켜… 조선 선비정신의 모범으로 추앙 받아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정몽주를 초청해 잔치를 연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하여 한 평생을 누리리니”([청구영언]에는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또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고저’라고 되어 있다)라는 시를 읊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답한다.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다. 역성혁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겠다며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역성혁명 제안 단호히 거절

술자리에서 시조를 주고받는 형식이었지만 사실 이 대화는 조선의 건국을 좌우하는 중요한 담판이었다. 원래 정몽주는 이성계의 지지자로서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해왔다. 여러 차례 이성계를 보좌하는 관직을 맡으면서 그의 인품에 감복했고, 이에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명장이자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성계를 내세워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위화도 회군을 비롯해 우왕 퇴위, 창왕 폐위에서 모두 이성계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래서였다.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던 김종연이 정몽주를 함께 제거하겠다고 모의했을 정도로 그는 이성계파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몽주가 반이성계로 노선을 바꾼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다. 당초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에 책임이 있는 우왕을 퇴위시키더라도 (우왕을 그대로 둔다면 우왕의 명령에 반기를 든 위화도 회군의 주역들은 역적이 된다) 우왕의 아들 창이 보위를 계승하게 한 후 이성계-이색의 연립정권을 구축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개혁파의 영수이자 물리적인 힘을 갖고 있는 이성계가 정치를 담당하게 하고 성리학자의 우두머리이자 보수파를 대표하는 이색이 국가 비전을 제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를 추종하는 세력은 이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왕을 폐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왕으로 퇴진시키고 그의 아들 창을 임금으로 세운다면 훗날 보복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색은 토지개혁 등 이성계 진영이 추진하는 개혁 의제를 반대하고 있었다. 다만 신하로서 임금을 폐위시킬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한다.

그런데 명나라가 이 구도를 흔들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우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고 창왕의 입조(入朝)를 거절했다. 창왕을 명나라에 입조시켜 정통성을 인정받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보수파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더구나 명나라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왕씨(공민왕)가 시해된 후 고려의 왕위는 후사가 끊겼다. 왕씨를 가장하여 다른 성씨(우왕)를 임금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삼한(고려)을 길이 지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 못 된다. 예로부터 임금을 시해하는 역적이 있었던 것은 임금의 악행이 너무 심했기 때문으로,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비록 난신적자(亂臣賊子)이나 어진 정치를 펼침으로써 하늘의 뜻을 돌이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 우왕과 창왕은 고려 왕실의 핏줄이 아니니 제거해야 하며 고려의 신하가 이를 시도하면 승인하겠다고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가 도대체 왜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우왕이 명나라 공격을 시도한 점, 우왕을 끌어내린 위화도 회군의 주역들이 친명(親明) 노선이라는 점에서 자국에 이익이 되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와 같은 명나라의 반응으로 이색 등 보수파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고 이색과 이성계의 공존, 보수파와 개혁파의 조화를 추진했던 정몽주의 구상도 좌초됐다.

이후 정몽주는 창왕의 폐위에 동의하고 공양왕 옹립에 주도적으로 나섰는데 스승 이색이 실각하고 절친한 후배이자 동지인 이숭인이 유배를 가는 상황에서 자칫 배신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어떻게든 고려 왕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계 세력과 일정 부분 타협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정몽주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변안열·왕안덕 등 이성계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장군들이 제거되었고 우왕과 창왕이 처형당했다. 이색이 고문을 당했고 외척의 중심 인물이었던 우현보가 파상 공격을 받았다. 고려 왕조를 지탱하는 세력들이 전멸할 위기에 놓였다. 정몽주가 태도를 바꿔 이성계 세력과 대결에 나선 것은 이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의 핵심 인물인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을 강력히 탄핵하고 정도전에 대해서는 ‘미천한 신분’이라며 비하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그렇다면 이 때 이성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성계는 계속 주저했다. 관직을 모두 내려놓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낙향하겠다고 밝혀 주위를 당혹시키기도 했다. 자파(自派)의 일원들이 탄핵 당하는 상황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약 이성계가 마음만 먹었다면 정몽주의 반격쯤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몽주가 아무리 공양왕과 반이성계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도 압도적인 힘을 갖춘 이성계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이성계가 고려의 역신(逆臣)이 되는 것을 머뭇거렸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의 계획이 성공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성계가 말을 타다 낙마해 큰 부상을 입으면서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듯 보였다. 그는 정도전을 위시한 이성계 일파의 전멸을 시도한다.

이 같은 상황을 뒤집은 것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다.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이방원은 급거 상경해 이성계를 찾아간다. “지금 정몽주가 정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우리 집안까지 관련시켜 해치려 합니다. 사세(事勢)가 이렇게 급박하온데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성계가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는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서 시묘를 마치도록 해라.”

하지만 이방원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대업을 이루기는커녕 가문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노릇. 그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뜻을 확인해 보고자 서두에서와 같은 자리를 만든 것이다. 이성계 일파의 또 다른 중심축인 이방원이 움직인 이상, 정몽주에게 더 이상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는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고개를 숙여야 할까? 이제라도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해야 할까? 자신의 편이 될 것인지 끝까지 적으로 남을 것인지를 묻는 최후의 담판에서 정몽주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의 철퇴에 정몽주는 목숨을 잃었다. 선죽교 위에 붉은 충절을 뿌린 채.

몰살 위기 몰린 이방원의 대반격

여기까지만 보면 정몽주가 나섰던 최후의 담판은 비극으로 끝난 듯하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고려는 멸망했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바로 그 최후의 담판 때문에 조선 선비정신의 모범으로 추앙되었고, 그의 단심가는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다.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영원히 승리하는 담판도 있다는 것, 정몽주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92호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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