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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반도체산업에 민족주의 바람?] 억지 ‘국산화’로 비효율 초래하지 말아야 

 

기술력 강화 중요하지만 정부 권력 영향권에 기술·시장 가둬선 곤란

▎사진:© gettyimagesbank
동북아시아는 항상 민족주의의 열기가 뜨거운 지역이다. 오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식민지배와 전쟁, 침략, 냉전 등의 근대사를 겪은 경험 때문이다. 최근에는 반도체산업에 민족주의 열풍이 옮겨붙었다. 한국과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다투고 있고, 미국의 강력한 무역 제재에 휘청이는 중국은 반도체 국산화와 자급률 제고를 위해 기술 개발 투자에 적극 나섰다. 한일 갈등의 배경에는 식민지배 시기와 이후 양국 관계를 규정한 국제 질서에 대한 시각 차이가 있다. 미국과 중국 싸움 역시 세계 경제패권이 걸린 문제인지라, 굴기를 꿈꾸는 중국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동원해 동력을 얻고자 한다.

중국, 민족주의 감정 동원해 반도체 굴기

이 같은 다툼의 와중에 선진국의 기술력과 중국의 생산능력의 결합을 바탕으로 돌아가던 국제 자유시장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민족 감정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동북아 상황에서 각 국가의 합리적 접근이 쉽지 않다. 문제는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은 철저한 글로벌 공급망 위에서 돌아가는 반도체산업 생태계에서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사이에 정치·외교적 갈등이 일어나 이 같은 의존성을 무기로 사용할 경우, 이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소재 분쟁은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두 나라는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각종 부품·소재를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은 고품질 제품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일본의 정밀화학 및 재료공학 기술에 의존한다. 대규모 반도체산업에서 힘을 잃은 일본은 삼성전자 같은 대형 고객이 꼭 필요로 하는 첨단 부품·소재를 제공하며 글로벌 공급망에서 존재감을 지키고 있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을 전후한 한일 갈등의 여파로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면서 두 나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일본은 7월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핵심 소재의 수출 규제를 발표한데 이어, 8월에는 1120여개 전략 물자의 수출 절차를 간소하게 해주는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했다. 일본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저런 핑계로 수출을 제한해 우리 반도체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일본의 부품·소재 기업들 역시 최고의 고객을 놓칠 위험에 빠졌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역시나 민족주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대응을 택했다. ‘기술독립’을 외치며 부품·소재 국산화 사업에 추경예산 1173억원을 바로 투입했다. 내년에는 부품·소재 연구개발 사업에 올해의 2배가 넘는 2조원의 예산을 편성한다. 중기부 장관은 SK 회장에게 “중소기업의 불화수소를 사라”고 압박하고, 지금은 법무부 장관이 된 청와대 민정수석은 애국과 이적을 가르며 “죽창을 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십년 간 지속되어온 부품·소재 국산화 노력이 갑자기 한일 민족주의의 충돌을 위한 무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반도체 민족주의는 중국에서도 불붙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대표 IT 기업인 화웨이에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등 IT 제품 핵심 구성 요소의 공급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네트워크 장비와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화웨이는 인텔·퀄컴 등으로부터 반도체를, 구글로부터 안드로이드 운용체계(OS) 등 모바일 소프트웨어를 공급받아 왔다. 이에 중국에선 화웨이 제품을 쓰자는 움직임이 일고, 화웨이는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직접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런정페이 CEO는 “화웨이가 외부 환경 악화에 맞서 내부적으로 더욱 단결하게 됐다”며 “미국 부품을 쓰지 못하게 돼도 자체 개발하거나 다른 나라 기업에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화웨이는 자체 OS ‘훙멍’을 개발했고, 자회사 하이실리콘은 스마트폰의 두뇌라 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을 생산한다. 최근 플레이스토어 등 구글 서비스 없이 내놓은 최신 스마트폰 ‘메이트 30 프로’에 쓰인 세계 최초 5G 기능 통합 AP ‘기린 990’도 하이실리콘 작품이다.

최근 미중 무역 갈등으로 더 발등의 불이 됐지만, 사실 반도체 기술 자립은 중국의 정책 우선순위 중 하나였다. 지난해 반도체 수입이 석유 수입보다 많은 3120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해외 반도체 의존도가 크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2015년 발표한 ‘중국 제조 2015’ 계획에서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 2025년 70%로 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14년에는 정부 주도로 24조원 규모의 반도체산업투자펀드를 설립했다. ‘정보기술 분야 핵심이자 경제·사회발전과 국가안보를 지탱하는 전략적, 기초적, 선도적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 선진국과 격차를 줄인다는 목표다. 거대한 내수 시장과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생각하면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성적표는 기대에 못 미친다. 천문학적 투자에도 D램 등 핵심 분야 기술 격차는 여전하다는 평가다. 칭화유니그룹은 4년 전 낸드반도체 양산에 30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시제품도 못 냈다. 이런 가운데 최근 D램 공장 건설 계획을 밝혔지만 시장은 의구심을 보인다. IC인사이트에 따르면, 2018년 중국 반도체 자급률은 15.4%로 중국 제조 2015의 목표 달성은 어려울 전망이다. 반도체 생산 규모가 238억 달러로 2014년보다 2배 이상으로 늘었지만 외산 반도체 수요도 급증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국민을 하나로 동원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경제 개발을 끌어낼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 고유의 작동 방식을 외면한 채 정권의 이익이나 정책 목표를 위해 정부가 자원 배분에 영향을 미친다면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세계 최고 자리를 지키려 첨단 공정 및 소재 기술을 확보하려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절박함, 이들과 협력해 최적의 기술을 제공하고 판로를 확보하려는 장비 및 부품소재 기업들의 노력이 반도체 혁신과 소비자 편익에 가장 기여한다. 수조원의 예산을 갈라줄 100대 부품소재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리스트를 결정하는 공무원이나 교수가 이들만큼 절박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산화할 소재를 정부가 정해주고 예산을 쏟아붓는 것보다 시장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책의 목표여야 한다. ‘국산화’ 미진이 핵심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중국은 최초의 집적회로(IC)가 개발된 지 8년 만인 1965년 이미 IC칩을 생산한 나라다.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산업에 발을 들이기 한참 전이다. 하지만 문화혁명을 거치며 산업은 초토화됐고, 인력을 키울 기회는 송두리째 사라졌다. 이후 계속된 투자에도 중국은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목표로 삼는 ‘국산화’ 역시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중국은 막대한 반도체 교역 적자를 보고 있지만, 수입된 반도체의 절반 이상은 다른 제품에 쓰여 다시 수출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도체 적자’로 해석해서 국산화에 예산을 쏟아붓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려 시장 왜곡을 일으키는 셈이다.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이득을 얻으려는 정부는 ‘국산화’를 강조하지만, 실제 필요한 것은 각 참여자가 글로벌 공급망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아가도록 시장의 자율성을 열어놓는 일이다. 기술 경쟁력 강화는 꼭 필요하지만, 이를 명분으로 기술과 시장을 권력의 영향력 안에 두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국가건 시장 참여자가 시장을 이기긴 어렵기 때문이다. 반도체처럼 세계 시장에 통합되어 움직이는 산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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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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