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좋은 디플레, 나쁜 디플레 

 

소비자물가 동향을 보면, 한국에도 ‘디플레이션 시대가 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일부 품목의 소비자물가는 하락했다. 그러나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고 있고, 계절적 요인도 있어 아직 디플레이션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일본에서도 버블 경제가 붕괴했을 무렵 디플레이션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일본에서 경제 기자 시절 작은 기사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 기사를 읽은 게이단렌 부회장이자 재계 유명 인사인 두 사람이 싸움 직전 상황까지 갔다. 1995년 일이다. 일본에서 버블 붕괴가 시작되고 주가가 급락했다. 엔화 가치가 1달러당 70엔대로 치솟았다. 엔고 때문에 수출 기업은 곤경에 빠졌다. 그 때 한 대형 유통 업체가 수입 캔맥주를 하나에 100엔에 할인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산 맥주 가격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이 업체 대표는 적극적으로 언론에 나서 “엔고 효과를 고객에게 환원하겠다, 디플레이션을 환원하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크게 히트쳤다. 이런 할인 판매는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필자는 당시 취재차 한 전기·전자 대기업 대표를 만났다. 엔고로 고통 받는 기업이었다. 그에게 유통 업체들의 ‘가격파괴’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큰 목소리로 반박을 시작했다. “생산자의 이익을 깎은 결과가 가격 파괴다. 이것이 임금 인상을 억제해 소비도 위축될 것이다.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면서 “대량으로 수입한 맥주를 100엔에 팔아 이윤을 남긴다고 해서, 그것을 엔고 환원, 가격 파괴로 선전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유통 업체가 강한 것은 재고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디플레이션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형 유통 업체 사장이 맹렬히 반발하며 양측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는 지금부터 20년 전, 일본에서 ‘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다.

1990년대 초반 일본의 물가는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부동산 가격도 그랬다. 그런데 버블 경제가 꺼지자 상황은 삽시간에 돌변했다. 필자는 거품이 한창 꺼지던 1992년 미국 특파원으로 나갔다가 1995년 귀국했다. 고국을 떠난 3년 동안 일본은 완전 탈바꿈했다. 회사 근처의 술집 가격은 3년 전보다도 쌌다. 100엔 맥주, 80엔 햄버거 등 가격이 1992년보다 절반 아래로 떨어진 상품이 잇따라 등장했다. 가격 파괴였다. 버블 경제의 붕괴와 동시에 나타난 ‘엔고’로 국내산·수입산 할 것 없이 물건 가격은 모두 떨어졌다.

부동산 불패 신화도 여지없이 깨졌다. 특파원으로 나가기 전인 1991년, 5400만엔에 구입한 도쿄 교외의 아파트 가격은 귀국해 보니 불과 4년 새 2800만엔으로 반 토막이 났다. 당시 대다수 일본인들은 반세기 가까이 물가와 부동산은 상승한다고 맹신했다. 그렇기에 물가 하락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가격 파괴’는 이전까지는 겪어보지 못한 놀랍고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 났을까. “디플레이션으로 일본 경제는 붕괴할 것이다” “디플레이션 뒤에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온다”는 등의 주장도 있었지만, 실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80엔 햄버거처럼 극단적 가격 파괴는 사라졌지만, 물가의 하향 안정화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과거 전기·전자 대기업 대표의 말처럼 생산자의 이익은 깎였을까.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기업들은 엔고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부품과 원자재를 조달하고 유통 마진을 깎는 등의 비용 절감으로 대응하며 충분한 이익을 내고 있다. 구조조정이 진행된 것이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일본의 높은 물가는 항상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이제는 물가가 비싸다고 일본 방문을 꺼리는 관광객은 드물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3100만 명을 넘어섰다. 버블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89년에는 불과 280만 명이었다. 10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많은 외국인이 일본에서 맛집 탐방이나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고급 호텔이나 브랜드 매장에도 전 세계 관광객이 넘친다. ‘물가 비싼 일본’은 이제 옛날 얘기가 됐다. 이 때문에 최근 일부 이코노미스트들은 “좋은 디플레이션과 나쁜 디플레이션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물가 안정과 부동산 가격 하락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곧 ‘뉴 노멀’로 자리잡는다. 좋은 디플레이션의 경우다.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 가격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달을 때 일본 경제도 세계의 정점을 향해 달렸다. 주가와 기업 이익이 급증했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수치상 세계 일류가 돼도, 일반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라는 점을 실감하지 못했다. 열심히 일해도 생활은 힘들고 주택을 구입할 수도 없었다.

디플레이션은 일본인들이 해외에서 쇼핑에 몰두하고,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등의 비정상적 일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경제 체질 개선에도 기여했다. 물가 상승이 없다는 것은 경제 성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경우 경제는 활력을 잃는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10년 이상 1%대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어떻게 경제를 지탱해 왔을까. 경상수지 통계에 그 답이 숨어 있다. 지난해 일본의 경상수지는 약 20조엔(약 215조원) 흑자였다. 이 중 무역흑자 규모는 2조엔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해외 직접 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배당금·이자 등 1차 소득수지가 20조엔 흑자였다. 버블 경제 전성기 시절엔 일본의 경상수지는 거의 모두 무역흑자에서 나왔다. 최근 20년 새 일본은 수출로 버는 나라에서 해외 투자에서 나오는 배당 수익을 창출하는 나라로 대전환했다.

디플레이션 경제는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디플레이션도 있다. 외국인 관광객은 급증했고, 여행수지는 흑자로 전환했으며, 환율 영향 등을 받아 물가는 하락하고 있다. 일본에서 쇼핑을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도 늘었다. 물론 좋은 디플레이션을 위해 희생한 측면도 있다. 세계 주요 도시의 고급 호텔 요금은 그간 상당폭 상승했는데, 일본만이 지난 20여 년간 제자리걸음 중이다. 서비스나 물건 가격만이 아니다. 인건비까지 디플레이션 되고 있다. 그 덕분에 기업 이익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그러나 직원들의 급여 수준은 결코 세계적 수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본 톱 클래스의 급여 수준은 아시아의 주요 기업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낮다는 조사 결과도 나온다.

일본은 한걸음 잘못 떼면 활력이 부족한 노인 국가가 될 우려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저출산·고령화의 진전으로 장기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잠깐일 수는 있지만 일본의 디플레이션의 공포는 없어졌다. 기업들의 불합리한 고가 정책을 시정하고 경제 구조를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면 디플레이션도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물가 및 부동산 가격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가 좋은 걸까. 물건 가격이 상승하지 않으면 기업 이익을 압박한다. 급여를 올리지 않으면 우수한 인재는 점점 해외로 빠져 나간다. ‘좋은 디플레이션’과 ‘나쁜 디플레이션’ 논쟁은 일본에서도 20년이 지나도록 결론을 내지 못했다.

- 타마키 타다시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니혼게이자이신문 서울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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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호 (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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