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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설계 표절 시비] 알면서도 표절, 다툼 일면 모르쇠 

 

머릿돌엔 시행자·시공자만 기록… ‘양심’ 지킬 DB구축 필요

▎경주타워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본 누구나 사진 한 장쯤 갖고 있는 에펠탑. 하지만 에펠탑 야경 사진을 SNS 등에 올리거나 배포하면 저작권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건축가 사후 저작권 보호기간(70년)이 1993년에 끝나 주경 사진은 괜찮지만, 2055년까지 야경 사진은 저작권에 걸릴 수 있다. 1985년에 조명이 설치돼 이때부터 70년간 저작권을 보호받는다는 게 에펠탑 관리업체(SETE)의 설명이다.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관광객이 사적으로 찍는 것은 무방하지만 상업적 촬영과 이용은 금지하고 있다.

한해 에펠탑을 찾는 관광객은 평균 700만명에 이른다. 에펠탑이 파리를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물이 도시의 얼굴이자 경제력인 셈이다. 그 뒤엔 건축의 창작성과 저작권을 강력하게 보호하는 사회제도와 시민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도 저작권 보호법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심지어 건축 전문가들조차 표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 후진국성 분쟁이 비일비재하다.

표절 판별 기준 모호, 전문가 윤리의식 부족


▎사진:각 업체 홈페이지
한국의 비뚤어진 건축설계 풍토의 대표적 사례는 12년간 이어진 경주타워 표절 분쟁이다. 경주타워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가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에 세울 상징물을 2004년 현상설계로 공모해 지은 건축물이다. 건축주는 재단법인 문화엑스포다. 조직위는 공모전에서 서울 동남아태종합건축사사무소(이하 동남아태)와 경주 길록건축사사무소가 공동 출품한 첨성대 형상화 작품을 선정했다. 이 당선작은 수 차례 설계심의를 거치면서 황룡사9층목탑의 실루엣을 투각(음각)한 유리 타워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는 공모전에서 우수상에 그친 이타미준건축연구소·창조종합건축사사무소의 설계안이었다. 창안자는 고(故) 이타미 준(한국 이름 유동룡 1937~2011)으로 제주도의 포도호텔과 방주교회를 설계한 재일교포 건축가다. 그는 2007년 8월 건립된 경주타워의 실체를 보고 디자인을 도용 당했다며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유 선생은 조직위와 동남아태를 형사 고소했으나 두 차례나 기각됐다. 손해배상청구로 민사소송도 했지만 1심에서도 졌다. ▷유리 소재의 직사각형 형태 ▷신라 불탑 형상화 ▷안쪽을 깎아 관통하는 음각 등 경주타워에 사용된 기법을 근거로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를 설득하지 못했다.

재판을 뒤집은 근거는 조직위의 설계심의 회의록에서 나왔다. 회의록엔 ‘유리 타워에 황룡사탑을 음각으로 파내자’, ‘우수상의 아이디어이니 저작권 시비에 대비해 법률 자문을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 선생의 소송을 맡았던 조문현 변호사(법무법인 두우)는 당시 회의록을 살펴보며 느꼈던 심정을 얘기했다. “(회의록엔) 재단의 설계심사위원회가 ‘디지털 첨성대 형상을 없애고 황룡사탑을 넣어라’, ‘형상을 음각으로 하면 어떠냐’ 등 변경을 제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 업체(유 선생)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 않느냐’는 대화까지 있더라구요. 그 심사위가 공모전을 심사했던 위원들이에요. 조직위가 회의록을 옛날에 모두 파기했다고 발뺌했다면 (유 선생이 소송에서) 졌을 겁니다.”

저작권법에 건축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없는 점도 판사의 재량에 따라 표절 시비가 갈리는 배경이다. 유 선생이 연달아 패소한 것도 증거 불충분 때문이었다. 건축설계 업계에서는 “재판부가 전체적으론 닮았어도 세밀한 부분에선 조금씩 다르므로, 아이디어를 빌려왔어도 표현이 다르다고 여겨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음악은 노래·작사·작곡·연주 등으로 역할이 나뉘는데다, 8소절 이상 유사하면 표절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건축계에선 자재·공법·문양 등 건물 구성 요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그 중 일부가 조금만 달라도 표절로 보기 어렵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즉, 표절자가 자백하지 않거나 원작자의 시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작권을 인정받기 힘들다는 의미다.

건축주 입맛대로 움직이는 건축사 영세성도 문제


▎사진:(왼쪽부터)ITM건축사사무소 / 경주세계문화엑스포조직위원회 / 운생동건축사사무소 / 네이버맵
이러다보니 건축계에선 저작권이나 표절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길 꺼려한다. A건축사는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 없다는 관점으로 보면 업계 관행이 이해될 것이다. 흉내내기 어려운 희귀한 기술과 독특한 표현이 아니면, 응용 범위가 무한대인 이 바닥에선 디자인 등록도 제값을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공학 기술의 지적재산권은 많이 인정하면서 창작물의 저작권은 소홀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한 원인”이라며 “공법은 산업통산자원부 특허청이, 디자인은 문화체육관광부로 이원화된 업무체제도 때론 표절 시비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B건축사는 “경주타워가 일반 건물이 아니라 상징 조형물에 가까워 아이디어의 독창성이 표절 시비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됐을 것”이라며 건축물 저작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경우는 한국에선 흔치 않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법규정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의식도 문제다. 경주타워 공모전은 1위 당선작만 저작권이 조직위에 귀속되고 2위부터는 속하지 않는다. 이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의 판결에 따른 것이다. 예전에 공공기관이 공모·발주할 때 ‘입상작의 저작권·사용권 등 모든 법적 소유권을 주최자가 갖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1회 사용권을 넘어 저작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불공정 행위는 민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지금도 관행처럼 일부 남아있다.

건축사협회가 이의를 제기하자 공정위가 2009년에 ‘발주자(건축주)는 당선작에 대해 저작권 1회 이용 권한과, 전시·출판 사용 권한만 가질 수 있고, 입상작 저작권은 저작권법에 따라 별도 합의한다’고 판결했다. 저작권이 원작자에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주타워 심사위원들은 당선자가 다른 입상자 아이디어를 갖다 쓰도록 종용했다. 통상 설계 심사위원은 건축학과 교수나 유명 건축사로 구성된다. 전문가그룹이지만 도덕성과 저작권에 대한 이들의 낮은 의식수준이 드러난 대목이다.

자존심을 구기면서 자신의 당선작을 바꿔야 하는 건축사의 영세성도 표절에 둔감하게 만든다. 현상설계 출품작은 투시도·조감도 같은 스케치 수준이어서, 당선작이 되면 건축사와 건축주의 협의를 통해 건축·토목·구조·전기·기계·통신·소방 등을 시공하기 위한 설계 과정을 거친다. 이 때 건축사 대부분이 건축주의 입맛에 맞춰 움직인다. 때론 부당한 요구도 담담히 수행한다. 이유는 단 하나, 건축주가 ‘쩐주’라서다.

건축사는 몇몇 기업형 업체를 제외하곤 대부분 영세한 자영업자다. 일거리가 생기면 단기계약 직원을 임시로 고용하거나 다른 건축사와 잠시 협업한다. 공모전에 출품할 때 준비 비용만 2000만~3000만원이 필요한데 향후 성공 보수를 나누기로 약속하고 이를 분담해 공동 작업하는 일이 빈번하다.

C건축사는 “일거리를 쫓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이합집산·합종연횡이 다반사다. 이렇게 서로 엮이다 보니, 알면서도 표절하고 다툼이 일면 모르쇠로 일관하게 된다”고 말했다. 표절 시비가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 친고죄에 해당하는 점도 이런 관행을 방치한다는 지적이다.

강영주 건축사(마온건축사사무소)는 건축사협회를 통해 발표한 글에서 “건축사도 의사처럼 윤리선언을 한다. 선언서엔 정직하게 업무를 수행하며 동료 건축사의 수임업무와 지식재산을 존중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축사가 이기적인 건축주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면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데, 그 모든 원인이 돈으로 수렴된다”고 비판했다. 알면서도 실행하기 어려운 건축사의 녹록치 않은 여건을 보여준다.

한 업체가 설계·시공·감리를 모두 맡는 턴키 방식도 창의적인 건축에 방해물로 작용한다. 보통 건축주가 건축사를 선택하고, 그 건축사가 설계하면, 건설사가 그에 맞춰 시공하는 것이 기본 순서다. 하지만 턴키에선 건설사가 주가 되어 모든 것을 총괄하며 그 중 하나로 건축사를 부린다. 이에 따라 건축사의 기획력보다 건설사의 이윤에, 창의적 디자인보단 단기간 완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턴키가 일반 대규모 건물을 지을 땐 유용하지만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건물엔 부적합하다. ‘정치권이 건설사에게 권한을 몰아주고 막대한 정치자금을 챙기던 시대에 태어난 후진국성 산물’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작의 가치 높이는 학문 연구와 DB 구축 필요

B건축사는 “한국에선 아이디어를 낸 사람보다 돈을 낸 사람의 목소리가 커 건축시장을 왜곡한다”며 “내 돈 주고 샀는데 왜 내 맘대로 못하냐는 건축주의 인식이 창작자를 푸대접하는 분위기를 만든다”고 꼬집었다. 이는 불과 10년 전에도 비일비재했으며 지금도 일각에선 여전하다. 2010년 서울 인사동 전통문화거리 준공을 기념하는 머릿돌엔 시행자·시공자만 기록되고 설계한 건축사는 빠져 저작권 표시 논란이 일었었다. 같은 해 남산공원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식엔 건축사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아 갈등을 빚기도 했다.

B건축사는 “프랑스에선 예술가 마르셀 뒤샹과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활약에 힘입어 1930년대에 창작의 가치를 인정하고 건축을 학문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사회적 노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윤하 노둣돌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건축학과 교수와 학생은 과거에 공부했던 우수사례 잔상을 지우고, 자기검열을 통해 기시감을 없애는 등의 노력을 하면서 무의식적 표절을 경계하지만 쉽지 않다. 시시비비를 가려줄 객관적 기준이 미비해 결국 건축사·건축주의 양심에 맡길 수 밖에 없다”며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 저작권 분쟁 땐
한국저작권위원회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위탁을 받아 저작권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주 업무는 ▷저작권 등록 안내·신청·검색 ▷저작권 분쟁 조정·알선 ▷저작권 침해 민사·형사적 구제다. 저작권 등록은 법적 추정력과 대항력을 제공해 손해배상 청구와 보호기간 연장을 도와준다. 저작권 분쟁이 발생했을 때 위원회에 신청하면 전문가 1명 또는 3명으로 구성된 조정부가 분쟁을 해결해준다. 피해자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저작권 침해정지·손해배상·부당이득반환·명예회복 등을 청구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저작권위원회 홈페이지(www.cros.or.kr) 참조.

-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1528호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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