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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 지원의 명암] ‘가시적 성과’ 우선에 ‘혁신 평가’는 없다 

 

일시적 수요 단절에 정부 과제 매달려... 민간자금이 벤처투자 주체돼야

▎기술 혁신에 방점을 둔 스타트업들 대부분은 정부과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 없음.
국내 스타트업 사이에서 혁신을 확인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정부 주도 지원’이 꼽힌다. 국내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의 설립과 성장 과정에서 ‘마중물’ 역할을 한 귀중한 투자금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정부 지원의 투자 규모와 명칭만 달라질 뿐 국내 스타트업과 벤처 투자 관행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꼽힌다.

투자자들은 성과를 내야하기 때문에 투자한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의 매출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역시 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정부 과제에 매달려 당장 실적을 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혁신은 뒤로 밀린다는 이야기도 쏟아진다.

정부의 스타트업 및 벤처 지원정책은 역대 모든 정부에서 관심을 갖은 사안이다. 현 정부에서도 지난 2019년 3월 ‘제2벤처 붐’ 조성을 위해 대규모 투자와 규제 개혁에 나서면서 스타트업과 벤처 업계 전반에 기대감을 키웠다. 정부는 당시 ‘제2벤처 붐 확산 전략’을 내놓고 2022년까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벤처기업) 20곳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4년간 12조원 규모의 스케일업펀드를 조성하겠다며 구체적인 투자 규모도 밝혔다. 또 인수합병(M&A)이 활성화된 역동적인 회수시장을 조성해 국내 벤처 투자 업계의 고질적 문제로 꼽히던 투자회수의 어려움을 덜어주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투자 회수 우선시하는 투자 풍토 여전


정부 계획은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구성됐지만, 문제는 정작 국내 스타트업·벤처 투자 풍토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이 여전히 투자회수를 최우선순위에 두면서 혁신 기술 개발 성과보다는 매출액 등 눈에 보이는 성과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책금융 자금은 주로 한국벤처투자의 모태펀드와 산업은행, 한국성장금융 등을 통해 조성된다. 이들의 출자 사업에서 운용사로 선정되길 원하는 벤처캐피탈 등 투자사들은 투자 성과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국내 벤처 투자에서 공공자금의 역할의 비중이 큰 것은 단점으로 작용한다. 2019년 신규로 결성된 펀드들의 출자자 비중은 모태 펀드가 20.4%로 단일 출자자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국성장금융과 산업은행 등을 포함한 정책금융 자금은 전체 신규 결성 펀드 규모의 33.2%를 차지했다. 국내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지금까지 국내 벤처 투자 역사에서 정책 자금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동시에 투자사들이 성과를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미래 성장성이나 혁신성을 측정하는 일관적인 방법을 마련하기도 어렵고, 매출액과 같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대신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엔젤투자자 등 민간자금이 벤처투자의 주체로 떠올라야 진정한 모험 자본 투자 풍토가 자리 잡힐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투자자들은 기업의 혁신성에 방점을 두기 어렵다. 투자 단계부터 회수를 염두에 두다 보니 국내 신규 투자금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투자 유형은 우선주 투자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신규 투자 금액 가운데 우선주 투자가 2조5428억원을 기록하며 연간 신규 투자 금액 4조2777억원 가운데 59.4%나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통주 투자가 7379억원으로 전년(5958억원) 대비 23.8% 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우선주 투자는 전년(1조8794억원) 대비 35.3%나 늘었다.

국내 스타트업·벤처 투자 시장에서 우선주 투자 선호 현상은 이미 2000년대부터 문제로 지적되던 사항이다. 특히 RCPS(전환상환우선주) 형식의 투자가 선호되는데 RCPS는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권과 채권처럼 만기 때 투자금 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환권, 그리고 회사 청산이나 매각 시 매각대금 분배 등에 우선권을 모두 갖고 있는 주식이다. 스타트업·벤처들에게서 받아올 수 있는 투자금 상환 권리는 모두 챙기면서 국내 투자 업계가 모험자본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기도 하다.

투자 안정성에 민감하다 보니 스타트업·벤처 기업들은 매출액 등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실적 채우기에 나서야 한다. 비교적 빠르게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서비스업 기반 스타트업·벤처 기업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초기 연구개발에서부터 시제품 제작까지 수년간 시간이 필요한 제조업 기반 스타트업들은 정부 과제나 지원 사업에 의존해 실적을 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더구나 초기 시장과 주류 시장 사이에서 일시적 수요 단절을 의미하는 캐즘(CHASM)을 만나면 매출 실적이 뒷걸음칠 수도 있다.

매출액 역성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국내 스타트업·벤처 투자 풍토상 기술 혁신에 방점을 둔 스타트업들은 캐즘을 만나면 버티기 쉽지 않다. 실제로 국내 스타트업 가운데 유니콘 기업으로 선정된 11곳 가운데 쿠팡과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야놀자, 위메프 등은 이커머스 또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업체들이다.

정부 과제에 기대느라 본업은 뒷전

기술 혁신에 방점을 둔 스타트업들 가운데 대부분은 정부 과제와 연구개발 프로젝트 등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정부 과제 등 지원 사업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진입 장벽은 높지 않지만 스타트업·벤처 기업 입장에서는 투입해야 하는 인력 부담이 만만치 않아서다.

당장의 수익원을 위해 정부 과제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본업에서 혁신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가상현실(VR) 스타트업 대표는 “제조업 기반 스타트업들은 초기 단계에서는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정부 과제”라며 “정부 과제가 없다면 생존도 불가능했겠지만 정부 과제에도 신경 쓸 것이 많아 주변 창업자들에게 3개 이상은 동시에 진행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1539호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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