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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5) 체임벌린, 오판의 결과] 히틀러와 담판에서 허점 노출, 뒤통수 맞아 

 

단호히 대응했다면 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도

▎1938년 뮌헨협정의 4개국 정상, (왼쪽부터) 영국 체임벌린, 프랑스 달라디에,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
불과 여섯 달이었다. 6개월 만에 상황은 극단적으로 뒤바뀌었다. 1938년 9월 30일 독일 총통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맺고 귀국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환호하는 영국 국민들 앞에서 “명예와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 히틀러는 뮌헨협정을 파기했고, 다시 6개월 후인 1939년 9월에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38년 유럽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세계정복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게르만족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에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는데, 1936년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뒤집은 것이었다. 한데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이 일에 실망했지만 어떤 유혈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했다”라고 말한다. 독일과 평화를 위한 대화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6개월 만에 휴지조각 된 ‘뮌헨협정,

그런데 히틀러가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렸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방에는 300여 만에 이르는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국경선이 새로 그어지면서 강제로 편입된 사람들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민족인 이들을 억압했는데, 히틀러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주데텐란트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압제로부터 게르만족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당연히 체코슬로바키아는 강하게 반발했고 예비군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전쟁 불사로 맞섰다. 군사 동맹국인 프랑스에도 참전을 요청했다. 유럽이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영국은 당황했다. 물론 영국에게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연합국으로 1차 세계대전을 함께 치른 프랑스가 혹시라도 ‘적국’ 독일에 패배할 경우 유럽의 균형추는 독일로 기울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세계 경제 대공황의 후유증을 채 극복하지 못하고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전쟁 자체에 대한 공포감(의사결정 위치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바 있다)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담판을 벌인 것은 그래서다.

1938년 9월 15일, 뮌헨으로 건너간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만났다. 9월 22일과 28일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히틀러와 협상한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주데테란트의 독일 점유를 인정하는 대신 독일은 더 이상의 영토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데 합의한다. 히틀러가 헝가리와 폴란드에게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넘기라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지만, 이 역시 수용한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항의하자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영국은 주데테란트 문제로 전쟁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어이없는 상황이다. 영국이 무슨 권리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독일에게 주니 마니 하는가? 영국이 그것을 가지고 협상을 벌일 자격이 있는가? 체코슬로바키아로서는 당혹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일이었을 것이다. 강대국들에 의해서 영토가 갈가리 찢겨 나가는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만 중요할 뿐, 약소국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무튼 체임벌린은 안도했다. 그가 히틀러를 믿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발언이 존재다. 그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목표했던 히틀러와의 신뢰를 형성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확실히 지킬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측근에게는 “히틀러가 협정을 위반하지는 못할 거야. 만약 그런다면 전 세계에 자신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셈이 되니까. 세계 여론 때문에라도 차마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걸세”라고 하였다. 히틀러를 믿었든 안 믿었든, 최소한 히틀러가 협정을 어기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임벌린은 뒤통수를 맞는다. 주데텐란트를 차지한 히틀러가 6개월 만에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군하며 ‘뮌헨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곧이어 폴란드를 공격하자 결국 체임벌린은 개전선언을 하며 그토록 막고자 했던 전쟁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이를 두고 체임벌린의 오판과 순진함을 비판하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히틀러에게 철저히 속았다는 것이다. 체임벌린이 단호히 대응했다면 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가 힘을 합쳐 맞섰다면 충분히 독일을 격퇴했을 것이고, 히틀러의 야욕을 사전에 분쇄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국에서 벌어지는 문제 때문에 자국을 전쟁의 위험에 빠트리고, 자국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보내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어떻게든 전쟁을 막고자 했던 체임벌린의 노력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옳은 명분도 빈틈에 무너진다

더욱이 체임벌린은 무조건적인 유화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영국의 국방력 재건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특히 공군력 증대에 크게 기여한다. 뮌헨협정 직후에도 군비를 늘이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평화를 추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실책에 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요새이자 중화학공업의 본산 주데테란트를 독일에 넘겨줌으로써 독일의 힘을 강화시켜주었다. 전문가의 조언도 외면했는데, 평소 외교관들을 싫어했던 그는 외무부를 따돌리고 비전문가 측근과 일했다. 그러니 히틀러와의 담판 과정에서 많은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실책은 히틀러와 독일군에 대해 오판한 점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첫 정상회담을 마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히틀러는 완벽히 나의 통제 안에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했듯이 히틀러가 약속을 파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독일의 군사력에 대해서도 과대평가했는데(괴벨의 선전전, 영국 첩보부의 잘못된 보고 탓도 있다) 그는 훗날 “히틀러는 1938년 9월에 기회를 놓쳤다. 그 때였다면 프랑스와 우리에게 가공할만한, 어쩌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시간을 번 덕분에 영국이 독일과 싸울 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독일에게 시간을 주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흔히 적대국과 담판할 때는 기만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큰 법이다. 그렇다고 평화를 포기하고 무조건 강경 대응만 할 수도 없는 노릇. 리더는 심사숙고하여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든 빈틈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과 치밀한 준비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무리 옳은 명분이라도 성공하지 못한다. 바로 체임벌린처럼.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39호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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