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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우리 사회가 만든 기준 ‘시험인간’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논란… 공정하다 믿었던 스펙이 불공정한 사회 만들어

▎올해 1월 서울에서 열린 2020 공공기관 채용정보 박람회에 취업 준비생들이 몰려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몇 주간, 인천공항 보안요원들의 정규직 전환이 화제였다. 24시간 운영되는 공항의 특성상 현장근무자들은 대부분 3교대로 근무할 텐데, 이런 시차근무는 그 자체가 세계보건기구(WHO) 기준 2등급 발암요인이다. 그래도 청년들 중 일부가 이런 업무에서나마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았다는 사실은 그리 나쁜 뉴스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통해 분명해진 것 중 하나는 질병의 검역과 방역도 국가의 안전보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시 군인들처럼 검역과 방역요원들의 역할도 코로나 역병같은 큰 일이 터졌을 때 중요하지만 평상시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평시에 이들을 감축하거나 관련 지원을 축소할 수는 없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평소 잘 준비된 요원들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지가 유사시에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얼마나 잘 보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듯, 필수적이지만 평소에는 그 필수성이 드러나지 않는 인력의 운용은 시장원리에 맡길 수 없다. 시장원리에 따르자면 이들의 고용은 비용 낭비가 될 테니까. 이 직종을 시장경제의 논리 밖에서 국가가 직접 고용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논리를 반대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천공항 보안요원 정규직 전환에 대해 인터넷을 휩쓴 감정은 한마디로 분노였다. 일의 전개과정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시험이다.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한 국가단위의 구조조정은 ‘평생직장’의 신화를 깨부수고 그 자리에 비정규직이라는 직급을 심어놓았다.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범주가 하나 생겼을 뿐인데, 이 범주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면서 이미 있던 일자리들을 삼켜왔다. 그 결과 이전까지 직장이라면 당연하게 보장될 거라 믿었던 조건들을 보장하는 괜찮은 직장(descent job)은 줄어들었고, 점차 그 기준 자체도 오그라들었다.

기업에 필요한 맞춤채용은 ‘시험’ 아닌 ‘검증’

요즘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취업하던 시절과 달리 괜찮은 직장의 조건으로 많은 것을 양보했다. 그러나 대기업 중에도 청년들이 원하는 근무환경, 육아 등의 기준에 미달하는 곳이 흔하다. 그나마 국가가 운영하는 직장들이 여기에 가까운데, 취업기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은 기회를 공정하게 나누는 방법은 뭘까? 결국은 시험이다.

그런데, 시험은 당연한 답일까? 원래 공채시험은 일본과 한국에만 있는 아주 특이한 취업 경로였다. 사업자 입장에서 일 잘하는 직원을 채용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현재 자기 회사에서 낮은 직급이나 계약직으로 일하는 직원들 중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이미 일하는 모습을 봐 왔으니 성품이 어떤지, 일은 얼마나 잘 하는지,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지 등을 누구보다 잘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약직의 정규직화는 자연스러운 직업 경로다.

기업은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한꺼번에 필요한 경우에나 공개채용 시험을 운영한다. 왜냐하면 시험은 출제와 채점에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반면 그렇게 선발한 인력의 질은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모든 괜찮은 직장으로 향하는 길은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원칙이 사회적 합의처럼 간주되고 있는 거다.

그 이유가 뭘까?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시험인간]이라는 책을 쓰면서 나와 동료가 거의 십 년간 고민한 질문이다. 일단 지필시험은 한국사회에서 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검증도구다. 우리는 심한 경우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시험을 치르며 자라왔다. 상급학교 진학과정에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시험은 당연한 관문이었다. 심지어 좋은 취업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도 시험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 시험들이 그냥 스쳐지나 가는 것이 아니라 공식에 의해 합산 된다. 보통 말하는 ‘스펙’은 바로 그 생애단계별 시험의 합산 결과다. 스펙의 주요 변인인 ‘무슨 대학, 무슨 과를 졸업했는지’는 그가 지금까지 치른 중요한 시험들에서 얼마나 잘 했는지를 드러낸다. 스펙은 그가 평생 동안(시험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그의 능력이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증명이 됐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결과다. 대학생들 중 일부가 ‘분교’와 ‘본교’를 차별하려는 이유도 그게 합산결과의 명확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우리에게 시험을 통해 스펙을 쌓으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니 당연히 그걸 제일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다. 피치 못할 이유로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면, 최소한 스펙이라도 보고 뽑아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 절차는 공정할 수가 없다. 왜? 지금까지 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고용은 인건비, 간접고용은 수용비?

문제는 이게 생각만큼 당연한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단 지속가능하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시험은 점차 사라지는 도구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의 조합은 지필시험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개인의 여러 측면을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SNS가 당신 가족보다 당신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데이터 전문가들의 확언이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실용성도 매우 낮다. 특히 높은 경쟁률을 해소하기 위해 시험의 변별력을 키우다 보면 시험 내용이 기괴해진다. 원어민도 이해 못하는 외국어 시험문제, 평생 쓸 일 없는 고등수학 문제가 시험지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야 변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무의미한 문제들을 푸는 연습을 하며 청년기를 소모하는 건 개인에게도 사회 전체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시험과 스펙은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노동법을 우회하는 파견근로나 간접고용 같은 문제가 시험과 스펙을 통해 오히려 정당화된다. ‘당신이 지금 안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이유는 젊을 때 그만큼 노력을 안 한 탓’이라는 논리 말이다. 작금의 분노도 결국 이런 논리에 반하기 때문에 불붙은 것 아닌가.

어쨌든 이 사태의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시험을 잘 보면 잘 살 수 있다고, 그러니 시험공부 열심히 하라고 가르쳐서 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 시험 말고도 노력을 요구하는 다양한 길들이 존재하며 그 길이 모두 존중 받을 자격이 있음을 가르치지 않았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지도 않은 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벌써 인천공항 정규직이 그렇게 늘어나면 인건비 비중이 늘어 전체 직원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우려한다. 직접고용하면 인건비로, 간접고용하면 수용비로 계산하는 이 규칙은 누가 만들었던가?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 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42호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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