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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6) 캠프데이비드 협정] 30년 중동전쟁 협의해 끝냈지만 실익은 엇갈려 

 

이스라엘은 가자·서안 지구 권리 유지… 이집트는 배신자로 찍혀 아랍권서 고립

▎1978년 9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가운데)이 이집트의 안와르 엘 사다트 대통령(왼쪽)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로 초청해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 사진:지미 카터 도서관
1978년 9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집트의 안와르 엘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로 초청했다. 그리고 13일에 걸친 회담 끝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합의한다. 문제투성이에 한계도 많았지만, 이후 중동 지역에서의 대규모 전쟁을 억제하는데 나름 이바지했다. 이번 화의 소재이자, 본 연재의 마지막으로 소개할 이야기다.

흔히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중동.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등 여러 갈등이 얽혀있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다. 열강의 도움을 받은 유대인들이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자, 아랍의 열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전, 그 땅에 고대 이스라엘이 존재했음을 내세우지만,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오랜 세월 살아온 자신들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는 것에 불과했다. 이에 독립이 선포된 날 밤, 이집트·이라크·레바논·요르단·시리아 등 주변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른바 ‘1차 중동전쟁’이다.

그 후에도 안정된 영토 위에서 독립국가 건설을 완수하겠다는 이스라엘의 목표와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을 제거하겠다는 아랍의 목표가 충돌하며 전쟁이 계속됐다. 1956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서 2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1967년에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 3차 중동전쟁을 벌였다. 1973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했는데, 이를 4차 중동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열세에 처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다. 1~3차 전쟁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4차 전쟁에서도 초기의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했다. 특히, 3차 전쟁에서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점령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한다. 아랍국들로서는 복수전에 나서 영토를 되찾아야 하지만 이스라엘의 기세에 눌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와중에 중동을 둘러싼 정치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4차 중동전쟁이 ‘석유파동’을 촉발하며 세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아랍의 산유국들이 원유가격을 대폭 인상하면서, 이스라엘이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를 감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필수 자원인 석유를 무기로 삼은 것으로, 국제사회가 중동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계기가 됐다. 미국도 중동 정책을 재고했는데, 세계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과 중동의 관계 회복이 전제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집트, 자국 경제난과 아랍 권익 해결사로 나섰지만


▎제 4차 중동전쟁 모습
그 뿐만이 아니다.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과 대척점에 섰던 대표적 국가인 이집트도 태도 변화를 보인다. 30년 넘게 전쟁을 치르며 부담한 국가적 손실이 더는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사다트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난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스라엘과의 대화에 나선 것 역시 그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사다트는 1977년 11월 19일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했는데, 비록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강경 발언을 쏟아내긴 했지만, 그의 방문 자체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 회담은 바로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성사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도 아랍의 강력한 국가이자 중동전쟁 내내 숙적이었던 이집트와 평화를 구축한다면 국가 안보 차원에서 훌륭한 돌파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회담에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평화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 반환 문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반환 문제,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팔레스타인 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이밖에도 난민문제, 관련 당사국의 안전보장 문제, 외교관계 정상화 문제, 해로에서 항해의 자유 문제 등이 다뤄졌지만 주요 쟁점은 이들 세 가지였다. 한데 이상하다. 시나이 반도야 이집트가 당사자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사안은 이집트와 상관없지 않은가?

당시 이집트는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에 나서자 다른 아랍국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따라서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이 아랍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협상에 나섰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부분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보라. 유대인은 같은 지역을 놓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대립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게 땅을 넘겨주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땅과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된다. 이에 회담은 큰 진통을 겪었는데, 고성과 언쟁이 오간 것은 약과고 사다트의 경우 짐을 다 싼 후 귀국하겠다며 나서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양국의 담판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하며, 이스라엘의 안전한 수에즈 운하 항행을 보장하고, 팔레스타인 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결론을 맺게 된다.

얼핏 보면 이집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는 이스라엘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지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집트와 전면전을 각오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고 국제사회의 압력도 만만치 않았다. 하여 이집트와 미국 모두 당연히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협상 초기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돌려줄 수 없다며 초강경하게 나왔다. 베긴은 시나이 반도의 유대인 정착촌을 단 하나도 이전할 수 없다며 고집했고, 장광설을 늘어놓아 사다트와 카터를 지치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집트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문제는 젖혀두고 오로지 시나이 반도 문제에 매달리게 했고, 미국으로부터는 시나이 반도에 설치한 공군기지의 이전비용 30억 달러를 얻어냈다.

불확실성 증폭시켜 입장 역이용 실리 챙긴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문제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양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치를 허용하는 주체가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해당 지역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은 셈으로, 당초 철군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무력화한 것이다. 이밖에도 베긴은 자신은 잃을 게 없다는 배짱으로 불확실성을 증폭시켰고, 속임수를 동원해 협정의 문구와 부속서한의 내용을 원하는 방향으로 가져왔다. 팔레스타인 인의 권리 문제에 대해서도 베긴은 ‘이스라엘 아랍인’의 권리를 인정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최소한의 손실로 이집트와의 평화를 얻어냈다. 반면에 이집트는 큰 대가를 치른다.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음으로써 자존심을 지켰다지만, 아랍권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아랍연맹 회원자격이 정지되는 등 오랜 기간 아랍 세계에서 고립되게 된다. 사다트도 이슬람 과격분자에게 암살 당했다. 물론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스라엘이 이를 유리하게 활용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이스라엘의 협상술이 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41호 (20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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