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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 ‘욕망의 이민 3대’ 트럼프 가문] 독일 ‘아싸(아웃사이더)’에서 미국 ‘인싸(인사이더)’로 

 

그 뒤엔 불법 이민, 부정 입학, 탈세 의혹… 볼턴 이어 조카 까지 트럼프 인성 폭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카인 메리 트럼프. 가운데 책은 메리 트럼프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폭로한 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거쳐왔던 삶의 이면이 다시 한 번 대중에게 공개됐다. 조카인 메리 트럼프(55)가 [이미 과한데 결코 만족을 모르는: 나의 가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냈는가(Too Much and Never Enough: How My Family Created the World’s Most Dangerous Man)]라는 책을 펴내면서다. 메리는 트럼프의 형인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1938~1981년)의 딸이다. 프레드 주니어는 43세 나이에 알코올 중독에 따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는 평생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의 책은 학력부터 가족관계까지 여러 일화를 들며 삼촌인 도널드 트럼프를 저격한다. 책을 인용해 보도한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는 어려서부터 남들을 속이거나 조롱하기를 즐겼으며 특히 장난감을 숨기는 등 남동생 로버트 트럼프(72)를 괴롭혔다고 한다. 트럼프에겐 체이스맨해튼 은행 중역을 지낸 여동생 엘리자베스 트럼프 그라우(78)도 있다. 어린 도널드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아 누나 메리앤 트럼프 배리(83)가 숙제를 자주 대신해줬다고 했다. 공부를 잘했던 메리앤은 연방 판사로 일하다 동생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은퇴했다.

메리는 도널드 트럼프가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친구 조 서피로에게 돈을 주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학업적성시험(SAT)을 대신 치게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얻은 높은 점수로 펜실베이니아대(유펜) 와튼스쿨 학부에 입학했다고도 했다. 이런 일화는 임기 중 황당한 행동과 발언을 일삼는 트럼프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재료로 읽히고 있다.

미국에서 트럼프 가문의 역사는 도널드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트럼프(1869~1918년)가 1886년 독일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서부의 라인 강 서쪽에 있는 칼슈타트(Kallstadt)라는 소읍에서 포도밭을 가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재 인구 1200명 수준의 칼슈타트는 독일의 라인란트팔츠 주에 속하며 지리적으로는 팔츠 지역에 해당한다. 팔츠는 가톨릭 인구가 대부분인 바이에른에서 드문 개신교 지역이었다. 종교적·문화적으로 소수파이자 ‘아웃사이더’라는 이야기다.

트럼프 조부, 병역 피해 미국 귀화 성매매 술집 사업

프리드리히의 아들 프레드(프레더릭의 애칭)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민심이 반독일로 돌아서자 자신의 집안은 독일이 아니라 스웨덴의 카를스타드(Karlstad)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1987년 대필작가를 동원해 펴낸 [거래의 기술]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트럼프 집안은 아버지 때부터 탄압을 피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신의 근본을 대놓고 부인한 셈이다.

프리드리히가 8살 때인 1877년 아버지(트럼프 대통령의 증조부) 크리스티안 요하네스 트럼프(1829~1877년)가 폐 질환으로 48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치료비로 거액의 빚을 남겼다. 카타리나 코버 트럼프(1836~1922년)와 여섯 자녀는 작은 포도밭에 매달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야 했다. 카타리나는 1883년 14세의 다섯째 프리드리히를 인근 프랑켄탈이라는 소읍의 이발사 프리드리히 랑에게 보내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게 했다. 프리드리히는 2년 6개월간 주 7일 이발소에서 일하다 고향에 돌아왔다. 마침 징집 연령도 다가오고 있었고, 미국에는 1883년 형부와 함께 이민을 떠난 누나 카타리나가 있었다.

16세 프리드리히는 1886년 10월 어머니에게 쪽지를 한 장 남기고 집을 떠나 독일 북부 브레멘 항구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대형 증기선 아이더호에 몸을 실었다. 당시 독일에서 2년간의 병역 의무를 치르지 않은 남자의 해외 이민은 불법이었다. 트럼프 가문은 미국 이주부터 불법으로 시작했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다. 프리드리히는 맨해튼의 이발소에서 이발사로 일하며 돈을 모아 1891년 뉴욕에서 당시 갓 주로 승격한 미국 서북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로 이주했다. ‘푸들 도그’라는 식당을 인수해 ‘데이리 레스토랑’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했다. 1층에는 음식과 술을 마시는 공간이, 2층에는 ‘레이디 룸’이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성매매를 하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식당과 술집인 셈이다.

고향 독일로 귀국했다 추방, 미국서 부동산사업 시작

식당 주인이 된 그는 ‘프리드리히 트럼프’라는 독일 이름을 같은 어원의 영어 이름인 ‘프레더릭 트럼프’로 바꾸고 미국에 귀화했다. 1894년 프레더릭은 워싱턴주 몬테 크리스토로 옮겨 호텔을 열었다. 그러다 1896년 북극에 가까운 캐나다 서북부 유콘 지역의 클론다이크에 금이 발견돼 골드러시가 벌어지자 유콘으로 가는 길목인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베네트로 옮겼다. 프레더릭은 1897년 베네트에 ‘악틱(북극)’이라는 이름의 식당 겸 호텔을 열었다. 장사가 잘 돼 곧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2층짜리 건물로 확장했다. 1900년 베네트에서 유콘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자 프레더릭은 유콘의 화이트호스에 식당을 겸한 호텔을 열었다.

하지만, 골드러시의 거품이 꺼진데다 캐나다 정부가 도덕적인 법률을 통과시키며 성매매 단속망을 강화하자 프레더릭은 1901년 호텔을 팔고 독일 고향마을로 돌아갔다. 독일의 칼슈타트로 돌아간 그는 1902년 이웃집에 살던 엘리자베트(엘리자베스의 독일식 이름) 크리스트(1880~1966년)와 결혼했다. 하지만 독일 당국은 그가 탈세와 병역 기피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귀국했다고 판단해 추방령을 내렸다. 임신한 부인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프레더릭은 뉴욕주 퀸스에서 새 출발을 했다. 1914년 세계대전이 터지고 1917년 미국이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군 측에 참전하면서 프레더릭은 독일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살아갔다.

프레더릭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숨졌다. 프레더릭은 딸 엘리자베스(1904~1961년)와 장남 프레데릭 크리스트 트럼프(1905~1999)와 차남 존 조지 트럼프(1907~1985)를 남겼다. 프레데릭 트럼프는 트럼프 대통령의 부친이고, 존 트럼프는 메사추세츠 공대(MIT) 교수를 지내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이더 개발과 개량에 나섰던 전기공학자다. 프레데릭은 숨지기 직전 부동산 개발에 투자한 상태였다. 트럼프 가문의 부동산 사업의 모태다. 엘리자베스는 두 어린 아들과 함께 ‘엘리자베스 트럼프 & 손’이라는 부동산 개발회사를 차려 사업을 이어갔다.

13살 때 아버지를 잃은 장남 프레드(프레데릭의 애칭)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부친이다. 22살 때 부동산 개발과 건설업에 뛰어든 프레드는 대공황 시기였던 1930년대에 뉴욕주에 ‘혼자 물건을 고르고 돈을 아끼세요’라는 광고문구를 앞세운 수퍼마켓을 열었다. 프레드는 이익을 남기고 이를 킹컬렌이라는 경쟁 체인에 넘겼다. 그 밑천으로 다시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군함을 건설하는 조선소 인근에서 군인과 군무원을 위한 주택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귀환 장병을 위한 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그 다음에는 인구가 밀집된 뉴욕시에 아파트 붐이 일었다. 아파트 건설은 트럼프 가문에 떼돈을 안겼다. 트럼프 집안은 건설·분양과 함께 임대사업도 함께 벌였다. 트럼프 그룹은 이때 세웠다. 1968년 아들 도널드가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함께했다. 바로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다.

어릴 땐 문제아, 커서는 정당·부인 바꾸기 수 차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5형제. 왼쪽부터 막내 로버트(1948년 생), 셋째 엘리자베스(42년생), 장남 프레디(38년생), 넷째 도널드(46년생), 장녀 메리앤(37년생)
프레드는 아들인 도널드에게 늘 “인생은 경쟁”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라고 말하는 이유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은 이렇게 대물림됐다. 하지만 프레드는 인종차별 성향이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아파트 임대를 해주지 않다가 1973년 흑백 평등대우와 분리금지를 명시한 민권법 위반으로 수사까지 받았다.

독특한 것은 트럼프의 정치 이력이다. 뼛속까지 공화당 같지만 사실 1987년 이전에는 민주당을 지지했으며 정치 자금도 기부했다. 1987년 공화당으로 말을 갈아탔지만 1999년 공화당에 등을 돌리고 개혁당을 지지했다. 2001년 다시 민주당으로 갈아타고 2009년까지 지지 후원했다. 이후 정치 지원을 멈췄다가 2011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독립당을 후원했다. 사업상이나 기분에 지지 정당이 왔다갔다 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다시 공화당원이 된 것은 2012년부터다. 당원 복귀 4년 만에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 데 이어 당선까지 했다.

트럼프는 지지 정당만큼 부인을 자주 ‘바꾼’ 것으로도 유명하다. 3차례 결혼했다. 1977년 체코 중부 모라비아 출신 이바나 젤니치코바와 결혼했다가 1992년 이혼했다. 이듬해 미국 태생의 마를라 메이플스와 재혼했다가 6년 만에 헤어졌다. 23세 연하인 지금 부인 멜라니아 크나우스와는 2005년 결혼했다. 트럼프는 다섯 자녀를 두고 있다. 이바나와의 사이에서 도널드 주니어, 에릭, 이방카 등 세 자녀를 뒀다. 마를라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 멜라니아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다. 장녀 이방카(이바나의 동유럽식 애칭)는 트럼프의 최대 정치적 자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대인과 결혼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카는 유대인의 지지를 이끄는 고리로 통한다. 조지타운대를 2년 간 다니다 아버지가 졸업한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로 옮겨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트럼프의 생애도 독특하다. 1946년 미국 뉴욕주 퀸스에서 독일계 이민 2세인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스코틀랜드 태생의 이민 1세인 어머니 매리 앤 맥러드 트럼프 사이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퀸스는 미국 내 한인 밀집지구 중 하나다. 어린 시절 트럼프는 문제아였다. 부모도 학교에 불려와 자녀 교육 훈시를 들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음악 교사를 때려 눈에 멍이 들게 한 적도 있었다. 이유 불문하고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공격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부모는 그런 말썽꾸러기 아들을 13살 때 뉴욕군사학교에 보냈다. 엄격한 규율과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군사학교 문화가 사춘기의 트럼프를 지배했다. 이는 트럼프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고교 시절을 군사학교에서 보낸 트럼프는 뉴욕 주에 있는 예수회 계열의 가톨릭 사립대학인 포덤 대학에 진학했다. 예수회에서 세운 대학에 다녔지만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 장로회 소속의 개신교 신자다. 트럼프는 포덤대를 4학기 마치고 펜실베이니아 대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대의 경영학교인 와튼스쿨에서 학부를 마쳤다. 포브스에 따르면 비즈니스 배경의 억만장자의 90%는 와튼스쿨,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컬럼비아 비즈니스 스쿨 중 한 군데를 다녔는데 트럼프가 여기에 포함된다.

부동산 개발로 이름 알리고 TV쇼로 인지도 높여

대학을 마친 트럼프는 아버지처럼 부동산 개발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브루클린과 퀸즈 일대에 중산층과 서민용 임대주택을 지었지만 트럼프는 럭셔리한 부동산 개발을 추구했다. 트럼프는 뉴욕 한복판인 맨해튼에 뛰어들어 부동산 개발에 나섰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현재가치 680만 달러, 약 78억원)를 종잣돈으로 했으니 금수저 출신의 금수저 창업이었다. 당시 미국 경제 불황으로 뉴욕 거리엔 노숙자가 넘쳐났다. 28세의 트럼프는 맨해튼 한가운데인 그랜드 센트럴 역 인근의 코모도 호텔 재개발에 나섰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하얏트 호텔과 손잡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뉴욕시로부터 40년 간 재산세 면제라는 유례없는 지원까지 이끌어내기도 했다.

1980년 재개장한 호텔은 번창했다. 34세의 트럼프는 뉴욕의 부동산 업계에서 촉망 받는 스타가 됐다. 5번가에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58층짜리 호화 주상복합 빌딩인 트럼프 타워를 세우면서 명성을 더했다. 트럼프 타워는 그의 본거지가 됐다. 트럼프는 맨해튼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초고층 빌딩을 올리며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았다. 사업은 해외로 확대됐고 트럼프는 글로벌 부동산 업계의 황제가 됐다. 트럼프는 사업을 하면서 자기 스타일로 밀어붙여 대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이 그에게 강한 확신을 심어줘서 거침없는 언변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에게도 시련기가 있었다. 1990년대에 카지노 사업에서 낭패를 봤다. 트럼프는 4차례나 파산을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파산법의 틈새를 잘 활용해 은행과의 벼랑 끝 협상으로 자금을 얻어내 재기할 수 있었다. 1995년 그가 신고한 손실만 9억1600만 달러(약 1조원)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18년 간 소득세를 면제받았다. 면제 받은 세금은 고스란히 사업 밑천이 됐다. 세금 회피 의혹에 시달린 이유다. 미국 유권자는 세금 회피라는 뉴욕타임스의 보도보다 ‘절세의 기법’이라는 트럼프 측의 해명에 손을 들어줬다.

2000년대 들어 트럼프는 대중의 스타로 떠올랐다. 2004년 자신이 지분을 가진 NBC방송의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견습생)’를 진행한 것이 계기였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트럼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 참가자들에게 밉살스럽게 “너는 해고야(You‘re fired)”라고 말하면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스 USA, 미스 유니버스 등 미인대회를 열며 대중의 관심도 모았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 스타화라는 그의 전략은 정치적인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데 큰 힘이 됐다는 분석이다. 유세 과정에서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 독설, 비행 등 모든 것이 기사화되면서 이는 미국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결국 그에게 대통령 당선을 안겨준 힘이 됐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43호 (202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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