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책에 휘청” vs “그린 뉴딜 위해 희생”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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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신재생에너지 발전 확대를 위해 한국전력공사(한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7월 이른바 탈(脫)원전 비용을 한전의 전력산업기반기금(전력기금)의 여유재원 등을 활용해 보전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한전이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전기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최악의 손실을 입은 한전이 정부 정책으로 더욱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의견과 정부의 ‘그린 뉴딜’ 달성을 위해 한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뒤섞이고 있다.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7월 송갑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 발의한 전기사업법 일부개정법률 안에는 시장형 공기업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하는 경우에 한해 두 종류 이상의 전기사업을 허가하는 내용이 담겼다. 현행 전기사업법상 전기 사업자는 전기 생산과 판매 사업을 함께 영위할 수 없는데, 일부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에 대해 예외적으로 생산과 판매를 겸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REC 폭락도 힘든데… 한전 등장에 업계 ‘덜덜’신재생에너지 발전업계는 한전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 진출에 대해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전국태양광발전협회가 8월 11일 한전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 참여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한 결과 투표에 참여한 212명 가운데 무려 207명이 반대했다. 특히 한전이 대규모 발전사업에만 참여하고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거래는 제한한다 해도 반대한다는 사람이 160명으로 가장 많았다.현재 신재생에너지 발전업계는 공급 과잉으로 REC 가격이 폭락하면서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는 SMP(계통한계가격)와 REC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SMP는 전력량에 대해 전력 거래 시간대별로 적용되는 전력 시장 가격이다. 2012년 신재생에너지 발전 의무 할당제(RPS)가 도입된 이후 발전 설비용량 500㎿(메가와트) 이상의 발전사업자는 매년 일정 비율 이상의 발전량을 신재생에너지 발전으로 충당해야 한다. 이에 따라 직접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를 도입하거나, 다른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로부터 REC를 구매해 의무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입장에선 RPS를 적용받는 발전사업자에 REC를 판매하거나 전력거래소를 통해 주식처럼 REC를 매매할 수 있다.전력거래소에 따르면 태양광 부문 REC 가격은 2017년 8월 12만6976원이었으나, 2018년 8월 9만7766원으로 하락했고, 지난해 4월에는 6만9074원까지 떨어졌다. 지난 7월에는 4만4581원으로 폭락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이 증가하면서 발급된 REC는 늘고 있는 반면, REC 수요는 감소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한국에너지공단과 전력거래소 등은 지난해 발급된 REC 물량 3196만6789 REC 가운데 실제 거래된 REC는 1957만2546 REC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반면 신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은 2017년 11기가와트(GW)에서 2018년 13.4GW, 지난해 15.8GW 등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올해 7월에는 18.5GW로 늘었다.SMP도 지속적으로 하락세다.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2018년 6월 킬로와트시(㎾h)당 89.79원이던 SMP는 2019년 6월 78.54원으로 하락했고 올해 6월에는 70.92원까지 떨어졌다. 발전용량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전력 수요는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전력 수요가 치솟는 8월에조차 전력공급예비율이 50%를 넘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월 8일과 8월 9일의 전력공급예비율은 각각 49.8%, 51.1%를 기록했다. 전력공급예비율은 전력 공급 능력에서 전력 최대 수요를 뺀 예비전력을 전력 최대 수요로 나눈 값으로, 전력계통의 여유를 나타내는 지표다.신재생에너지 발전업계에선 “REC와 SMP 동반 하락으로 수익 악화를 겪고 있는 와중에 한전마저 신재생에너지 발전에 뛰어들면 영세 발전사는 고사 위기에 내몰릴 것”이라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생산한 전력을 한전의 계통설비(송배전망)에 접속하지 못해 대기 중인 물량이 넘쳐나고 있다는 하소연도 들린다. 전력계통을 독점하고 있는 한전이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에 진출한 후 자사에만 유리하도록 전력계통을 운영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에너지정책학)는 “송배전망을 독점하고 있는 한전이 독점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정부의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것을 전제로 신재생에너지 발전 참여를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린 뉴딜’ 달성 위해 한전 참여 불가피이에 대해 한전은 “신재생 발전에 직접 참여하면 공동접속설비, 발전사업단지 등의 인프라 구축으로 민간 중소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의 사업성이 개선될 것”이라며 “해상풍력 공동접속설비의 경우 한전이 투자비용을 공동 부담하면 민간 부분의 원가는 줄면서 한전은 신재생 발전사업 실적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한전은 “민간 신재생 발전사업자 등이 우려하는 REC 가격 하락, 망 중립성 훼손 등에 대해서는 향후 입법 과정에서 해소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전문가들은 정부가 그린 뉴딜 목표를 이행하려면 한전 등 대규모 사업자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 진출은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7월 발표한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에는 지난해 12.7GW인 신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발전용량을 2025년까지 42.7GW로 늘리는 목표가 포함됐다. 8월 기준 태양광, 풍력 발전용량이 14.5GW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규모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이 전제돼야 그린 뉴딜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한전 등 대규모 사업자 없이 신재생에너지 발전 확대를 추진했다가 자칫 중국 등 다른 나라에만 이익이 돌아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세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의 대부분이 수입 제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중국산 태양광 모듈 수입액은 1억6954만 달러(약 2000억원)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22% 증가했다. 한국이 올해 상반기 전 세계에서 수입한 태양광 모듈 가운데 중국산 제품 비중은 무려 98%에 달했다.유승훈 교수는 “태양광 발전 제품에 대한 국내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중국산보다 가격이 많이 비싸고 풍력발전 제품의 경우 기술력이 부족하다”며 “영세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입장에선 수입 제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유 교수는 “한전 등 대규모 사업자의 참여가 없으면 신재생에너지 발전 확대가 수입 제품 증가로 귀결될 것”이라며 “한전처럼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이 신재생에 뛰어들어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상에 나서면 신재생발전 국산화도 속도를 낼 것”이라고 했다. 한전이 원자력 발전을 국산화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한 사례가 신재생에너지 발전에도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기금 예탁 169% ‘급증’한편, 정부가 전력기금으로 탈원전 비용을 보전할 계획인 가운데 올해 전력기금 지출 계획에서 공공자금관리기금(공자기금) 예탁 규모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2020년도 전력기금 운용 계획 변경안에 따르면 올해 전력기금 지출 계획에서 공자기금 예탁 규모는 1조8856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지출 계획(7000억원)보다 무려 169% 급증한 수치다. 공자기금은 연기금 등의 공공자금으로 조성되는 기금으로, 정부의 공공사업 자금으로 활용된다. 올해 전력기금 지출의 약 38%가 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셈이다.전력기금은 한전의 6개 발전자회사를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진행돼온 한전의 공익사업을 지속 추진하기 위한 재원 확보를 목적으로 2000년 말 신설됐다. 정부가 전기요금의 3.7%를 법정부담금으로 징수해 전력기금을 조성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내는 사실상 ‘준조세’다. 한전이 기금을 징수하고, 산업부가 기금을 운용한다.정부는 당초 계획보다 신재생에너지 관련 지출을 확대한 변경안을 확정했다. 신재생에너지 금융 지원(융자)에 대한 지출이 당초 계획보다 2865억원 늘었고, 신재생에너지 핵심기술 개발 지출도 200억원 증액됐다. 전력 효율 향상 지출도 3000억원 증가했다. 이 외에도 하천수 냉난방 및 재생열 하이브리드 시스템 기술 개발(20억원), 지능형 발전소 플랫폼 구축(145억원), 가정용 스마트 전력 플랫폼 사업(353억원) 등의 지출이 신규 편성됐다.그러나 전기 안전, 에너지 복지 등과 관련된 일부 사업 중에는 지난해보다 지출이 줄어든 사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 안전 관리 지출은 1086억원으로, 지난해 지출 계획보다 14% 감소했다. 노후변압기 교체 지원(8억원·15% 감소), 농어촌 전기 공급 지원(81억원·7% 감소) 등 에너지 복지 관련 지출도 줄었다. 올해 신규 추진된 전기재해 종합분석센터 구축, 에너지저장장치(ESS) 안전조치 이행 지원, 신(新)산업 전기 안전센터 구축 등은 전력기금 지출 계획에 포함되지도 못했다.재생에너지 지원에 대한 올해 지출 계획은 1조2066억원으로 당초 계획보다 2450억원 늘었지만, 지출 계획이 줄어든 신재생 사업도 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차액 지원(96억원·3% 감소), 태양광재활용센터 구축 기반 조성(10억원·30% 감소), 고분자연료전지 신뢰성평가센터 건립(4억원·20% 감소), 태양광 아이디어 시제품사업화지원센터 구축(10억원·22% 감소) 등이 대표적이다. 전기차 산업 기반 구축의 경우 올해 지출 계획에서 제외됐다.연구개발(R&D) 관련 사업에서 지출 계획이 줄어든 사업이 있다. 청정화력 핵심 기술 개발(24억원·9% 감소)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멀티터미널 직류송배전 기술 개발, ESS 기술 개발 사업의 올해 지출 계획은 각각 35억원, 247억원이었으나 최종 변경안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올해 신규 추진된 원자력 생태계 지원 사업, 원전해체연구소 구축 등도 지출 계획에서 제외됐다.한무경 국회의원(미래통합당)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에너지경제연구원(에경연)의 ‘지속가능한 전력기반조성사업 운용을 위한 방안연구’에 따르면 전력기금의 재량 지출을 선형 모델로 전망할 경우, 신규 사업 지출이 없다면 2029년 여유재원은 10조3398억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너지기술개발계획 비용 30% 지원 등 신규 지출 규모를 최대로 잡아도 여유재원은 7조3988억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난해 여유재원과 비교하면 44% 증가한 수치다. 이에 대해 에경연은 전력 판매량, 전력 판매 단가 등이 지속 상승하는 가운데, 신재생에너지 발전 차액 지원 사업이 2011년 12월 종료되면서 관련 지출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차액 지원 사업은 전력기금 사업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사업비의 19.4%다.전력기금의 여유재원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전력 기금의 법정부담금 요율은 2005년 12월 3.7%로 책정된 이후 15년째 요지부동이다. 전력기금의 법정부담금은 2001년 전기요금의 3.23%였다가 2002년 1월에 4.59%로 인상됐고 2005년 12월 3.7%로 인하돼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급속도로 불어나는 전력기금을 감안해 법정부담금 요율을 낮춰 소비자나 기업 등의 부담을 경감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기금 요율 인하 요구 ‘봇물’에경연도 보고서에서 “공자기금 예탁 규모 등을 감안해 국가 재정 운용 차원에서 요율 조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기사업법, 부담금관리기본법, 국가재정법 등에도 부담금 축소 의무가 명시돼 있다. 기획재정부도 ‘2017년 기금운용계획 존치평가’에서 전력기금 부담금 요율 인하 검토를 산업부에 권고했으며, 감사원 역시 지난해 ‘기업불편·민원 야기 규제 운영실태’에서 전력기금 법정부담금 요율 인하 방안을 마련하라고 산업부에 통보했다. 산업계는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전력기금 부담금 요율 인하를 요구해왔다.전력기금의 공익적 성격을 감안해 전력기금 지출에서 에너지 복지사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전기요금 복지 할인, 에너지 바우처 사업 등은 한전이나 한국가스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이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빈곤선 150% 이하 소득 가계의 에너지 요금, 에너지 위기, 단열 및 에너지 관련 소규모 주택 수리 등을 지원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정책 지원 수혜자가 에너지 복지 관련 혜택을 선택할 수 있는 ‘에너지 수표’를 발행하고 있다.양준모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준조세 성격의 전력기금은 기금 조성의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전력기금을 통해 전력 산업 발전을 도모하고 이 발전이 소비자 이익으로 환원돼야 한다”며 “정책 실패 모면 용도로 전력기금이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