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News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 미국 폐습 혁신의 아이콘 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용감한 신세계로 가는 길을 보여주다 

 

여성·장애인·동성·환경 소수의견 대변한 평등법의 大母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9월 18일 별세하자 미국 워싱턴 DC 시내 그를 기리는 벽화에 시민들이 포스트잇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9월 18일 별세하면서 그가 이룬 진보의 역사에 관심이 쏠린다.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은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워싱턴의 자택에서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컬럼비아 법과대학원을 마치고 교수로 일하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 때인 1980년 워싱턴DC의 연방항소법원 판사에 임명됐으며, 1993년 역시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해 연방대법관이 됐다. 그 뒤 27년간 미국 연방대법관으로 일하며 양성평등·장애인·환경문제 등에서 진보적인 판결로 시대를 이끌었다. 이런 판결과 활동을 바탕으로 미국 진보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으며, 2015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0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에 들었다.

긴즈버그의 대표적인 양성평등 판결로 1996년 ‘미 합중국 대 버지니아주’ 사건이 있다. 이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오랫동안 남자만 입학을 허용했던 공립학교인 ‘버지니아 종합군사학교’에 여학생도 입학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판결을 했다. 긴즈버그가 다른 대법관을 열성적으로 설득해 9명의 연방대법관 중에서 7대 1의 압도적인 다수 결정을 이끌어 냈다. 당시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은 아들이 이 학교 재학생이라는 이유로 제척을 자청해 재판에서 빠졌다. 제척은 공정한 재판과 법원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법관이나 법원 직원 등이 특정사건 관련자이거나 가족·친척관계일 경우, 해당 사건의 재판 참여 등 직무 집행에서 제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재판에서 다수를 대표해 판결문을 작성한 긴즈버그는 “성별을 기준으로 하는 이 학교의 입학 정책은 ‘유사한 처지의 사람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다르게 대우하는 것을 금지’하는 미국 수정헌법 14조의 평등보호조약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당시 버지니아주는 이 학교에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대신 주 내에 있는 리버럴아츠 여대인 메리 볼드윈 칼리지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버지니아 여성 리더십 대학(VWIL)을 세우겠다고 했다.

성평등 공감 이끈 양성통합교육· 공정임금법

하지만 긴즈버그는 VWIL이 버지니아 종합군사학교 수준의 혹독한 군사훈련이나 시설, 교육과정, 교직원, 장학금 등 재정적 기회, 그리고 졸업생의 명성이나 유대를 제공할 수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성만 입학하는 관습을 지키기 위해 궁색한 ‘꼼수’를 동원한 버지니아 주를 명쾌한 논리로 깬 셈이다. 그야말로 양성평등 분야에서 타협을 하는 대신 정공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샛길이 아닌 큰길을 통해 양성평등의 길로 가도록 한 판결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1950년대 미국의 기념비적인 민권 관련 판결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교육하지 않고 같은 학교에 다니게 했던 것처럼, 긴즈버그는 젠더 문제에서도 성별 분리가 아닌 통합 교육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이 판결은 미국 교육에서 양성평등을 이끈 기념비적인 판결로 통한다.

2007년 긴즈버그는 소수 의견 하나로 미국의 양성평등 관련 법률과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긴즈버그는 대법원 판결에서 밀렸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의 소수의견을 제시해 미국의 법률과 정책을 바꿨다는 점이다. 그 계기는 릴리 레드베터라는 노동자가 성별로 인한 임금차별이 부당하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레드베터 대 굿이어 타이어&고무’ 사건이었다. 1964년 제정된 미국 민권법은 인종은 물론 성별로 인한 임금차별도 금지하는데 레드베터는 자신이 성차별을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5대 4로 이 소송을 기각했다. 여성이 남성보다 급여를 적게 받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해도 급여는 지급 주기에 따라 시효가 있다는 법 조문이 근거였다.

하지만 긴즈버그는 여성은 자신들의 임금이 남성보다 적다는 것을 모르는 일이 많아 급여 주기마다 시정을 요구하는 게 힘들고, 남성이 지배하는 직장에서 여성이 작은 급여 차이로 소송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소수의견을 통해 ‘의회가 민권법의 해당 조항을 수정해 이 판결을 무효로 하라’고 촉구했다. 결국 미국 민주당은 2008년 긴즈버그의 제안대로 이를 수정하는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공화당의 반대로 상원에서 부결됐다.

이 법은 2008년 미국 대선 쟁점으로 떠올랐다.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는 지지했고,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는 반대했다. 결국 오바마가 당선하고 의회가 민주당 지배로 바뀌면서 수정법이 다시 제안돼 2009년 1월 22일 상원을, 27일 하원을 각각 통과했으며 29일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뒤 첫 법안으로 서명하면서 발효됐다. 오바마의 서명 1호 법률이 긴즈버그의 소수의견을 따른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 됐다. 당연히 이 법안의 최고 공로자는 긴즈버그다. 긴즈버그가 미국에서 양성평등과 소수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변화를 이끌어낸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결국 대선 쟁점으로 부상했으며, 나라의 법과 제도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소수의견 하나로 도도한 물결을 돌려세운 셈이다. 긴즈버그가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이유의 하나다.

관리주체 위반에 초점 둔 ‘레드로우 환경’ 사건


▎2011년 1월 25일 워싱턴 주 의사당 연설에 나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포옹하며 인사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긴즈버그의 진보적인 역할 중에서 장애인과 관련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9년 연방대법원에서 정신질환 환자를 시설에 강제로 수용하는 대신 지역사회 기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1999년에는 ‘옴스테드 대 LC(루이스 커티스)’ 사건이다. 당시 정신분열증을 앓던 루이스 커티스와 그의 친구로 인격장애를 겪던 일레인 윌슨은 오하이오 주가 자신들을 정신병원에 격리시킨 후 ‘지역사회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긴즈버그는 미국 장애인법을 근거로 정당화하지 않은 시설 격리는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그 뒤 미국에서 정신질환자의 인권과 인격, 의사를 존중하고 시설 격리 대신 지역사회 서비스를 바탕으로 자립생활로 이끈 역사적인 판결로 평가된다. 긴즈버그가 주도한 판결이 의회의 입법 행동을 이끌어내고 그 법이 미국 장애인 정책을 전환시켰다. 한국에서도 이의 영향을 받아 장애인 관련 법률과 제도적 변화가 이뤄졌다.

그는 환경과 관련해서도 진보적인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0년의 ‘지구의 벗들 대 레드로우 환경 서비스’ 사건이다.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노스 타이거 강 유역의 주민들을 대리해 환경단체인 지구의 벗들이 제기한 소송이다. 주민들은 이 강은 레저용으로 사용해왔는데 환경오염으로 이용이 불가능해지자 소송을 냈다. 연방대법원은 7대 2로 주민들 편을 들었으며 긴즈버그가 판결문 작성을 맡았다. 긴즈버그는 주민과 강 이용자들이 오염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관리회사가 수질 기준을 반복적으로 위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운동이나 레저용으로서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주민들의 불평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긴즈버그가 주도한 이 연방대법원 판결은 미국에서 환경과 관련한 소송을 쉽게 제공하는 길을 열었다. 환경오염 피해자들의 피해 입증 책임 대신 관리 주체의 위반 여부를 판결의 기준으로 새롭게 확립했다.

긴즈버그는 2015년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도 주도했다. 미국은 2003년 매사추세츠 주를 시작으로 법률 제정·수정과 법원의 판결, 또는 주민투표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각 주에서 동성결혼 허용이 확산했다. 결국 2015년 6월 연방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은 헌법에서 보장받는 권리라고 판결하면서 미 합중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는 2013년 동성결혼식의 주례를 서는 등 동성결혼이 법적인 권리임을 계속 주장해왔다. 긴즈버그는 이슈인 낙태 문제에도 진보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낙태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긴즈버그는 살아온 길 자체가 ‘진보의 용감한 신세계’를 이루는 과정이었다. 유리천정을 깨고 젠더 평등을 추구했으며, 판결을 통해 미국을 진보적인 세계로 한걸음씩 이끄는 삶을 살아왔다.

여성·엄마·유대인 차별 ‘삼중고’ 극복하며 성장


▎1993년 7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인준 청문회에 참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사진:1993년 7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인준 청문회에 참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1933년 이탈리아·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몰려 사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긴즈버그는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코넬대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정부학을 전공하고 1954년 졸업했다.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인 어머니는 고교를 월반해 졸업했지만 경제 사정으로 오빠만 진학하고 자신은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의 유대인인 남편과 결혼한 뒤 정성을 다해 딸을 키웠다. 긴즈버그는 이처럼 누구보다 애틋했던 어머니를 고교 졸업 직전에 여의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서기의 인생이 시작됐다.

긴즈버그는 같은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던 한 살 위인 마틴 긴즈버그(1932~2010년)와 사귀었다. 마틴은 1953년 코넬대를 마치고 하버드 법과대학원에 진학한 뒤 오클라호마 주에서 ROTC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두 사람은 루스가 대학을 마친 1954년 졸업 한 달 만에 결혼했으며, 1955년 딸이 태어났다. 나중에 1965년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 루스는 남편을 따라 오클라호마 주로 가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마틴은 군복무를 마치고 하버드 법과대학원에 복학했다. 법과대학원 3학년 때 암에 걸려 부인의 보살핌으로 1958년 학업을 마치고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마틴은 세법 분야에서 유명한 변호사로 자리 잡았다. 부인이 대학 교수와 법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외조를 아끼지 않았다.

루스는 1956년 남편이 다니던 하버드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먼저 졸업한 남편이 뉴욕에 일자리를 얻자 컬럼비아 법과대학원으로 학교를 옮겨 1959년 공동 수석으로 졸업했다.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는 1950년에야 여학생을 처음 입학시킬 정도로 여성에게 문을 닫아걸었다. 양성 평등 분야에서 지극히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법과대학원은 분위기가 달랐다. 이미 1930년대에 여학생들이 입학해 변호사와 법학자로 성장했다. 상법학자로 유명한 소야 민치코프가 이미 1937년에 졸업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여전히 여성에게 보수적이었다. 긴즈버그는 법과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그는 나중에 “유대인이라는 점, 여성이라는 사실, 아이 엄마라는 세 가지”를 당시 받았던 차별의 이유로 꼽았다. 그는 헌법학자로 컬럼비아 법과대학원 학장이자 유대인인 제럴드 건서 교수가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재판연구관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차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럿거스 법과대학원에 조교수 자리를 얻게 됐을 때 헌법을 담당하고 싶다고 하자 학장이 헌법은 여자들이 맡는 게 아니라면서 민사소송법을 맡으라고 하기도 했다. 1972년 모교인 컬럼비아 법과대학원의 첫 종신 여성교수가 돼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누구보다 앞서 성차별과 젠더 평등과 관련한 법학 연구를 수행하면서 상당한 논문을 발표했다. 대학에 ‘성차별’이란 과목을 첫 개설하고 관련 교과서도 내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양성평등 부문을 개척하는 법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활동가로서 긴즈버그의 모습이다.

그러다 1980년 워싱턴DC의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되면서 대학 교수에서 법원 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연방법관 정원이 152명 증원된 것을 계기로 여성 법조인 41명을 항소법원과 지방법원 판사로 임명했는데 긴즈버그가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트럼프 보수편향 정치에 맞서 암 투병에도 업무

1993년 긴즈버그는 클린턴 대통령의 발탁으로 샌드라 오코노 대법관에 이어 두 번째로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됐다. 인준 청문회 당시 연방상원의 법사위원장이 현재 민주당의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다. 미국 여성들에겐 평등 세계로 가는 법률 전사로, 진보 인사들에겐 새로운 세계를 여는 길잡이로 통했다.

말년의 긴스버그는 암 투병을 계속하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지만 결코 사임하지 않았다. 공화당 소속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의 후임을 보수적인 법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대선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트럼프가 입맛에 맞는 인물을 후임으로 뽑을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트럼프가 임기 내 임명을 감행할 경우 현재 5대 4인 보수와 진보의 균형은 6대 3으로 벌어질 수 있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어서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11월 3일의 대선에서 트럼프가 우편투표를 빌미로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재판으로 끌고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최종적으로 연방대법원이 당선인을 결정할 수도 있다. 긴즈버그의 삶과 죽음이 보여주는 무게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54호 (2020.10.05)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